왜 배우는가?

Posted by on May 31, 2016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 No Comments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지 않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있을 뿐.
오해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만큼 관계에 해악을 끼치는 일도 없다.

‘오해력’에 대한 무지는 이해력의 강화로 극복될 수 없다.
왜 배우는가? 아마도 자리를 바꾸기 위해서인 것 같다.

무지를 바라보는 앎의 자리에서 앎을 바라보는 무지의 자리로 말이다.

깔끔한 교육공학?

Posted by on May 27,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깔끔한 교육공학?] “문제”를 정의하는 행위는 정치적이다. 예를 들어 보자. ADHD는 ‘문제’ 혹은 ‘질병’인가? 수업시간의 수다는 정말 ‘문제’인가? 영어에 대한 흥미가 없는 학생은 ‘문제적 상황’에 놓인 것인가? ‘문제’와 ‘비문제’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며, 대개 ‘문제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 의해 확정된다.

정의된 문제의 범위와 심각성에 따라 ‘해법’이 달라지고, 이에 동원되는 자원과 인력이 배분된다. 이런 면에서 교육의 문제를 푸는 다양한 기술, 전략, 시스템 등을 연구하는 교육공학 또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외부자인 내가 보기에 주류교육공학은 너무 ‘깔끔한’ 학문이 되어버렸다. 문제도 해법도 참 ‘바르게’ 보일 때가 많은 것이다.

교실에서 맞딱뜨리는 문제는 선생-학생의 상호작용을 넘어서서, 선생이 담지한 세계와 학생이 담지한 세계가 충돌하면서 일어난다. 그런데 교수학습전략은 세계의 충돌이라는 사태의 극히 일부분에 적용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한 관계의 단면을 변화시킴으로서 또다른 국면을 만들어 낼 뿐, 관계를 송두리째 바꾸지는 못한다. ‘해결사’로서의 교수학습전략 이나 ‘혁신적 기술’의 도입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교육의 근본적 변화에 주목하는 교육공학이라면 사회문화적, 정치적 모순에서 눈을 돌릴 수 없다. 교육이라는 ‘문제상황’에서는 다양한 매개(mediation)가 있을 뿐, 궁극적 해법(solution)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교육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 있지 선생과 학생이 맺는 관계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깊이와 너비의 패러독스: 넓은 것이 깊다.

특정 강좌의 주제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손을 뻗을 것인가. 수업 읽기 자료를 선정할 때마다 빠지는 고민이다. 예를 들어 다음 학기에 강의하게 될 (것 같은) <영어교육과 교육공학>의 읽기 범위는 대략 다음의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어느 수준에서든 한 학기 수업에 충분한 읽기 및 토론자료를 뽑아낼 수 있다.

1. 현재 한국의 영어교육에 직접 관련되는 자료와 기술 – 한국의 영어교육에서 당장 이슈가 되고 있는 교육공학적 담론과 관련 기술을 다룬다. 중고교 학교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거나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영어교육의 4기능(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 문법, 어휘 등의 영역과 연결하여 검토한다.

2. 컴퓨터를 이용한 영어교육(CALL, Computer-assisted language learning) 이론 전반: 한국 상황에 국한하지 않고 CALL 전반에 대한 이론 및 실제를 다룬다. 1에 비해 조금 넓은 주제를 다루지만 핵심은 여전히 ‘교육’에 있다. (스마트 교육이나 거꾸로 교실 관련 논의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3. 제2언어 교수학습이론: 제2언어습득을 비롯한 외국어 교수학습의 핵심 이론들을 다룬다. 특정 이론을 중심에 놓고 각각의 이론이 제시하는 최상의 교수학습환경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을 탐색하는 식으로 수업을 전개한다.

4. 일반적인 학습 및 발달 이론: 예를 들어 비고츠키의 중재(mediation)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학습 및 발달의 관점에서 조망해 본다. ‘해법(solution)이 아닌 중재, 매개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대해 집중 토론한다.

5. 컴퓨터 기반 의사소통(CMC, 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관련 이론: 1-4와는 다르게 ‘교육’이라는 키워드에서 벗어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디지털 기반 의사소통을 조망한다. 이를 통해 ‘언어교육공학’과 ‘리터러시의 변화’라는 두 주제를 통합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른다.

6.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HCI), 사용자 경험(UX) 및 디자인에 대한 논의: 예를 들어 Don Norman의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 같은 책을 읽으면서 디자인과 HCI, UX 등에 대한 토론을 해본다. 이를 통해 학습을 위한 공학적 설계를 포함하는 디자인 개념에 대해 고민해 본다.

7. 생태적 관점에서 본 기술, 학습, 발달: 생태적 관점에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다. 특히 깁슨 등이 제시한 어포던스(affordances)의 개념을 중심으로 현재 활용되고 있는 다양한 기술을 평가하고 개선점을 도출한다.

사실 3년 전 이 수업을 했을 때 학생들의 반응은 갈렸다. 일일이 확인하진 못했지만 몇몇은 다양한 소프트웨어/기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부족으로 애를 먹었고, 몇몇은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수렴되지 않는’ 수업 내용에 불만을 표출했다. 나 또한 <영어교육과 교육공학>을 지나치게 기능적인 과목으로 파악하는 우를 범했다.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과 잠재력을 “효과적인 영어공부”라는 틀에 가두어 놓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수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흡인력을 유지하면서 한 학기 수업을 이끌만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너비와 깊이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이야기가 절실하다. 몇몇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4-7번과 같은 논의가 강의명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결국 교육과 기술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지과정, 디자인, 발달, 어포던스, 리터러시의 본질 등의 개념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깊이’와 ‘넓이’는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라 변증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성격을 규정하는 사이다.

(그런데 난 왜 다음 주 수업 준비를 안하고 다음 학기 걱정을 하고 앉아 있는 건가. 미루기의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한 의례적 글쓰기인가.)

하나, 그리고 천

Posted by on May 26, 2016 in 단상 | No Comments

1000을 배워서 1밖에 못써먹을 거, 뭘 1000씩이나 배워야 하냐고 묻는 이들은 그 1을 써먹기 위해서 반드시 1000을 배워야 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무지하게 비생산적인 인간’과 ‘포기를 모르는 장인’을 구분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강의식 수업은 OOO이다

한 중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은 OOO(이)다. 왜냐하면 __________ 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뭐라 대답하시겠어요? 그 학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은 수면실이다. 왜냐하면 자도 자도 끝없이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식 수업에 비해 토론 및 다양한 모둠활동을 활용한 수업이 학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겠죠.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수업들은 모두 일방적 강의 포맷이었다는 겁니다. ^^

빈곤, 뇌, 그리고 언어교육

Posted by on May 26,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링크, 수업자료 | No Comments

“언어교육 연구에 계급이 없다”는 말을 하면 “언어교육이 그런 것까지 신경쓸 수는 없지 않나?”라는 뉘앙스의 답이 돌아오곤 한다. 물론 언어교육학자가 사회경제적 구조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논쟁하면 된다. 하지만 빈곤이 학습자들에게 미치는 사회문화적 영향과 그에 따른 뇌신경발달의 변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진공상태의 연구”를 면치 못할 것이다. 계급은 그저 “수많은 변인 중 하나”가 아니라 아동의 경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변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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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분석 결과,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어린이들은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동년배에 비해 메틸화가 많이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메틸화는 가난한 어린이의 세로토닌 수송단백질 생성을 억제함으로써 세로토닌의 가용성(availability)을 감소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우울증과 관련된 현상이다. 또한 가난한 어린이들은 편도체의 활성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우울증의 가족력이 있는 어린이들은 우울증 증상을 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위스콘신-매디슨 대학교의 세스 폴락 박사(아동심리학)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다: “가난이 인지능력과 정신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의 내인성 생물학(intrinsic biology)이 빈부(貧富)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번 연구와 같은 후성유전학 연구에 의하면, 유전적 차이만이 중요한 요인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은 특별한 유전자를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경험에 따라, 그 유전자의 활성화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272463

시멘트 vs Cement, 그리고 뇌의 처리 패턴

한국어 사용의 ‘잔재’로 특정 영어 표현의 느낌이 영 좋지 못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cement a marriage/relationship”같은 표현. 한국어 단어 ‘시멘트’를 수십 년 써왔더니 저 표현들을 볼 때마다 공사장에 시멘트를 들이 붓는 장면이 생각나면서 눈살이 살짝 찌푸려진다. “결혼/관계를 단단하게 만들다, 유대를 강화하다” 정도의 중립적 의미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멘트라는 구체적 개체가 ‘유대를 강화하다’라는 추상적 의미로 사용될 때의 뇌 활성화 패턴에 대한 연구는 있지만, ‘외국어-외래어’ 짝에 대한 반응을 살펴본 연구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인간 대 기계, 그리고 개념적 불만

Posted by on May 25, 2016 in 과학,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 정립에 대한 개념적 불만이랄까.

1. 인간은 자신을 닮은 컴퓨터를 만들려고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기계를 만들려고 지금도 노력한다.

2. 아울러 인지혁명, 컴퓨팅 기술의 발달에 따라 자신을 설명하는 데 갖가지 컴퓨터 메타포를 사용해 왔다. “Mind as a computer”는 신경과학, 심리학, 교육학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3. 인공지능(AI)의 발달이 가속화됨에 따라 “인간은 컴퓨터와 무엇이 다른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두루 두루 닮은 기계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애써 왔으면서,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면서, “기계와 다른 인간만의 특징”을 강조하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냥 오늘 짝과 이야기하다가 든, 답없는 생각이었습니다.

질문하는 인간

Posted by on May 24, 2016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갈수록 지식과 정보의 축적보다 크고 작은 질문을 잊지 않는 일이 어려워진다. 끈질기게 던져야 할 질문, 이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또다른 질문들, 그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들이 망각의 강으로 너무 쉽게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정보가 공적이고 일반적이라면 질문은 사적이며 맥락적이다. 답이 아니라 질문을 수집하고 뒤집어 새로운 질문으로 탈바꿈시키는 능력이 절실해지는 때, 선생의 역할은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게 돕는 것 아닐까.

최근 교실 관찰 연구의 화두 – “수다” 그리고 학교 시공간의 재배치

중고등학교에서 가장 신나는 시간은? 그렇다. 바로 쉬는시간과 점심시간이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칠 때마다 학생들의 에너지가 폭발한다.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학생을 위한 공간이라고 말하지만 학교가 오롯이 학생의 것이 되는 때는 쉬는시간과 점심시간 뿐인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는 몇몇 학교에선 말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다른 관점에서 아이들을 본다. 수업을 빠져나와야 비로소 살아나는 학생들. 교사의 강의가 아니라 친구들과 수다에서 활기를 얻는 모습에서 “공부에 열의 없는 아이들”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지금도 “학교가 놀러오는 덴 줄 알아?”라는 잔소리는 전국의 학교에 울려퍼지고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조용히 공부하자’는 제안 혹은 강압은 얼마나 교육적인가? “못떠들게 하기”는 (교사와 학부모들이 그토록 관심을 갖는) 학습효과 증진에 얼마나 효과적인가?

몇몇 학생들과 대략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모둠활동 하면 뭐가 좋아요?”
– “음… 친구랑 이야기할 수 있는 거요.”
“친구랑 이야기하면 뭐가 좋은데요?”
– “그냥 놀기도 하고, 모르는 거 있을 때 얘기도 하고… 하다가 쉬기도 하고…”

이 짧은 대화는 모둠활동의 가치를 오로지 ‘학습효과 증진’으로 파악하는 접근의 명백한 한계를 설명해 준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모둠을 통해 학습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지만, 학생들이 모둠을 통해 얻는 것은 놀 수 있는 시공간이다. 교사의 의도와 학생의 활동에 어느 정도 교집합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교사의 학습의도가 곧바로 학생들의 학습활동이 되진 않는다.

모둠활동의 핵심을 “학습의 의무”나 “주어진 문제해결”이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언제든 생각을 표현할 권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많은 것들이 새롭게 드러난다. 뼈아픈 것은 전자의 목표 즉 학습 결과에만 집착할 경우 학습 과정에서의 사회적, 정서적 요인들이 무시된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같은 접근은 학습결과에 직격탄을 날린다. 효과적 학습이라는 명분 하에 인지발달의 조건이 되는 동기적, 정서적, 사회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실의 실질적 변화를 꾀하려면 학생들의 몸의 리듬과 정서적 에너지를 고려하여 학습 및 놀이를 위한 시공간을 재배치해야 한다. 학습이 일어나는 정의적(affective), 사회적, 물리적 환경을 바꾸지 않고 학습법만을 바꾸려는 시도는 언제나 사상누각에 그치고 만다.

교사의 과업(task)이 아이들의 수다방(chat room)이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학생들도 교사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느끼고 저항하는 주체(agent)이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것을 잊거나 무시하는 게 ‘어른들의 특기’인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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