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은 아니길

Posted by on Aug 20,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토요일 오전 한산한 지하철, 야호! 임산부석 말고도 맨 가 자리가 두 개나 있다. 두어 정거장 지났을까. 열 서너살 쯤 된 여학생이 옆에 와 섰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세워 왼손으로 잡는다. 음악하나 보다 생각하는데, 전화하던 이 친구, 눈물이 터졌다. 좀 우는 게 아니라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꺼이 꺼이 운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본의 아니게 듣게 된 이야기. 왠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바이올린을 그만두라고 했나 보다. 아니 때려치라고 했던 듯하다. 토요일 레슨을 가면서 그 상황에 대해 누군가에게 눈물로 하소연하는 듯… 지하철에서 그렇게 서럽게 우는 이는 처음 봤다. 아마 대부분의 승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하필 티슈도 손수건도 없다. 안타깝다고 뭘 해줄 수 있겠나. 안타까운 시선은 허공에 흩어지고 친구는 내렸다. 부디 오늘 연습이 마지막은 아니길.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

Posted by on Aug 20, 2016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지식과 관련된 일을 하며 먹고 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어야만 하고, 주변의 엄청난 장서가/독서가들에게 종종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다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게으름이 첫째 이유요, 읽는 속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느리다는 것이 둘째 이유다. 최근에는 체력의 부족까지 절감한다. (잠시 눈물 좀 닦고)

그래서 “책을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와 같은 질문을 던질 자격조건이 있다면 틀림없이 부적격자일 테지만 조금씩이나마 계속 읽고 있는 입장에서 대답을 해보고자 한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기의 유치함을 느꼈는데 졸려서 다시 쓰진 않기로.)

혹자는 책을 통해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을 중요시한다. 더 많이 알아야 더 똑똑해 질 수 있다면서 말이다. 어떤 이들은 책을 통해 대리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독서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을 대신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자기계발에 활용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활동이 독서라는 주장이다.

모두 나름 일리가 있고,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각자의 관점에서 읽고 각자의 방식대로 느끼고 활용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나의 경우 독서의 가장 큰 목적은 ‘타인의 영향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쯤 되는 듯하다.

내가 믿고 있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 내 경험에 대한 나의 해석 — 이 모든 것이 점점 견고해지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이가 들어가는데 나이테는 늘지 않는 것은 또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넌 어째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냐?’는 말은 때로 퇴화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최종확인 아닌가?

더 많은 지식이 쌓였는지, 더 많은 이들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 더 많은 영역에서 더 많은 역량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 반대라 느낄 때도 꽤 많다.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타인의 지식과 의견, 감정과 목소리의 영향력에 노출될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더 쌓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더 흐트러버릴 수 있어서, 나를 지킬 수 있어서가 아니라 기꺼이 열어보일 수 있어서, 더 잘 써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써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지식을 끝까지 밀어부친 이들의 마음을 슬쩍 엿볼 수 있어서, 그래서 벅차달까.

오늘도 나는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읽고 있다. 이 시간, 타인의 야식사진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엉?)

서수 앞에는 정관사 The가 필요하다?

First, second 등의 서수 앞에는 반드시 the를 붙여라?

저도 오랜 시간 이것을 ‘규칙’으로 외우고 있었습니다. 서수 앞의 ‘the’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우니까요. 그런데 이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다음 예를 보시죠.

“She took a first step in jazz.” (그녀는 재즈에 첫 발을 디뎠다.)

“It is a first step toward a deeper understanding of feminism.” (그것은 페미니즘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이와 같이 ‘a first ~’ 구문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죠.

아, first 말고 다른 예시는 없냐구요? (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 있습니다. 다음 예를 볼까요?

“She gave me a second look.” (그녀는 나를 두 번째(다시) 쳐다보았다.”

The coach gave him a second chance. (코치는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이 문장들에서도 “a”가 서수인 second 앞에 붙었네요.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설명인 “the + 서수”와 이들 예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다시 완벽한 정답은 없습니다만, 일반적으로 “the + 명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The + 명사”는 특정(specify)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The first”라는 표현은 여러 개의 대상 중에서 ‘첫 번째’라고 콕 짚어서 이야기할 때 씁니다. 예를 들어, 글 속에서 “There is a total of five examples.”라는 문장이 나왔다면 그 다음에 ‘첫 번째’라고 할 때는 “The first”를 쓰는 게 맞습니다. 다섯 가지 예시가 있다고 했고, 그 중에서 첫 번째는 특정할 수 있는 대상이죠. 독자는 다섯 번째 예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구요.

그런데 위에 제시한 ‘a first step’이나 ‘a second look’과 같은 표현들은 한정된 원소로 이루어진 집합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와 같은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첫 걸음’이라는 표현이 ‘두 번째 걸음’과 ‘세 번째 걸음’이라는 대상을 상정하지 않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a second look’은 ‘다시 보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첫 번째 보기’나 ‘세 번째 보기’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A second chance”의 경우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럼 이런 원리를 염두에 두고 다음 문장의 관사를 골라 보시죠.

I need a/the/무관사 second job. (이대로는 먹고 살 수가 없네. 일자리가 하나 더 필요해. – 이런 맥락에서)

The politician is considering a/the/무관사 third option. (옵션 A와 B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던 사람이 새로운 옵션 이야기를 꺼낼 때.)

#관사공부중
#아직멀었다

영어선생이 영화 에디팅에서 배울 수 있는 것

2004년에 BBC, NHK, A.C.E. 등이 모여서 만든 <The Cutting Edge: The Magic of Movie Editing> 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타란티노나 스필버그, 스콜세지 같은 감독들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쓰기 수업을 할 때 학생들과 함께 이 다큐를 본 적이 있다. 헐리우드의 작품들이 대략 200시간을 찍어 2시간 정도로 편집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2시간 짜리 초고를 써놓고 2시간 짜리 글을 만드는 게 가능하겠냐?’고 물었더니 학생들이 뭔가 느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대부분은 느끼기만 했다. 기말과제는… ㅠㅠ)

사실 나는 수업에서 ‘편집자’의 역할을 꽤 자주 한다. 지난 5년간 맡았던 수업의 절반 정도에서 주별 과제에 대한 학생들의 쪽글을 편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수업을 진행했으니 말이다. 교과서에 있는 이야기를 읊는 게 편하지만 그건 내가 재미없어 못하겠더라.

학생들이 가르치는 일과 영화 편집을 어떻게 비교하고 대조할지 궁금하다. 정답은 없지만 답’들’이 넘쳐나는 질문이 점점 더 좋아진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삶을 위한 영어공부>의 회원이 오늘로 2천 명이 되었습니다.

‘자극적이지 않고, ‘뻥’ 안치고, 공포심 조장하지 않고, 뚜벅 뚜벅 공부하는 사람들이 볼만한 콘텐츠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시작한 소박한 커뮤니티. 요즘 잘나가는 책들이나 블로그처럼 대단한 것도 없고, 본업 후 짬시간을 쪼개어 하는 일이라 업데이트도 더디지만, 그래서 더 애착이 가네요. 앞으로도 별거 없지만 잘 쓰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내용을 조금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언어도 사는 것도 단번에 되는 건 없잖아요? ^^

“다른 언어를 배워 그 언어의 네이티브처럼 말하지 않겠다. 그들의 언어를 배워서 그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https://www.facebook.com/lifeandenglish/

가공할만한 괴로움 시나리오

Posted by on Aug 17,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최근 아내의 이색(?) 택시 승차 경험과 내가 에어콘 고장 버스 탄 일을 합하니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탄생한다. 이 ‘짬뽕’의 내용은 바로…

한낮 땡볕에 에어콘 고장난 택시 안에서 환단고기 맹렬 추종자의 열정적인 설교를 듣는 것.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긴긴 역사 속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4계절이 뚜렷한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라 이렇게 살기 좋고’ 등등.

세계의 중심은 무신, 사드 땜에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고 하는데. 게다가 4계절이 뚜렷해서 살기 좋다고라? 이제 거의 아열대 기후에다가 여름은 생사람 잡을 판인데.

어휴, 그런 택시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교육공학 수업 준비중

Posted by on Aug 17, 2016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교육공학 수업 준비하며 고민하는 것들 (서울비 Lee Jun Seop 님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들이 마구 섞여 있습니다.)

1. 파워포인트는 좋은 툴인가?

– 진공상태에서 ‘이 툴은 좋나요?’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음.

– 이메일은 좋은 툴인가? ->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누구와 소통할 때 좋은 툴인지 물어야 함.

– 하지만 파워포인트가 갖고 있는 내재적 강약점이 없다는 뜻은 아님. 예를 들어 파워포인트로 수업을 하면 학생들은 강사가 아니라 파워포인트를 보는 경향이 분명히 높아짐.

– 한두 마디라도 넘어가는 경우 학생들의 머리 속에는 ‘왜 저거 안하고 넘어가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음.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의 질문은 대부분 ‘파워포인트 파일 안주시나요?’가 됨. 이건 교사연수나 대학 강의나 비슷.

– 즉, 파워포인트는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매체 자체의 성격으로 인해 강사와 학생 사이의 인지 과정에 필연적 변화를 가져오게 됨.

– 이는 타이핑과 손필기의 차이 등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남.

– 따라서 기술을 안다는 것은 기술과 사회적 맥락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고려하면서도 기술의 사용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변화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함.

2. 관계를 매개하는 기술

– 강의를 하다 보면 자신의 삶과 기술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보다는 정답을 주는 ‘사이다’를 원함

– 하지만 다양다종한 문제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일 경우가 많음

3. 기술 리터러시 (Technological literacy)

–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나와 상황간의 관계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vs “어떻게 당면한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것인가?” – 이 문제는 인터넷 시대의 리터러시가 갖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

– 일전에 올린 아래 글이 나의 문제의식을 잘 드러냄.

“긴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요약본을 원한다.
이제 그들의 머리는
‘요약하는 사람들”이 점령한다.

장문을 피하는 것은
단순히 인내력의 문제가 아니며,
긴 글을 읽는 건
사회를 읽는 실천적 행위일지 모른다.

인간은, 세상사는
언제까지나 복잡할 것이기에.”

– 기술을 해법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누군가의 ‘요약’을 바랄 수밖에 없음. 기술은 그저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

– 하지만 도구는 인간의 사고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마인드매핑을 할 때의 인지와, 글을 쓸 때의 인지가 다름. 파워포인트를 만들어야 할 때의 인지과정과 학술논문을 써야 할 때의 인지과정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

– 기술 리터러시는 ‘그저 도구’로서의 기술이 아니라 ‘개인의 사고과정과 사회적 관계의 양태를 변화시키는 매개’로서 기술을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해야 함.

4. 기술로서의 언어와 문자

–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기술이라면 아마도 문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

– 글이 말에 비해 ‘위대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글과 말을 동원할 때의 사고과정은 현격히 다름.

– Ong, Vygotsky, Frawley 등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언어와 문자의 기술적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

5. 해법(solution)이 아닌 중재(mediation)으로서의 기술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교사들이 원하는 기술은 자신의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 주는 기술. 기술을 대하는 태도가 ‘해결책’이라는 틀에 맞추어져 있음.

– 그러다 보니 이미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컨텐츠를 찾게 됨.

– 유명 교사들의 커뮤니티에서 ‘이런 자료 없나요?’라는 질문이 대표적인 예.

– 기술은 해법이 아니라 중재. 교육의 다양한 맥락에서 해결책을 준다기 보다는 인지와 상호작용의 양상을 바꾸는 ‘계기’.

–> 결국 영어교육에 대해 공학적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제가 하는 읽기/쓰기/말하기/듣기 수업에서 어떤 도구를 쓰면 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언어습득 과정에 개입하는 다양한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문화적 양상들을 철저히 이해하고, 이들의 관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계기를 찾는 것임. 이것이 꼭 디지털 기술일 필요는 없음. 때로는 종이와 연필, 포스트잇, 교사의 몸짓 등으로 충분할 수 있음.

– 기술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킴. 하지만 그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교육적이라는 보장은 없음.

– 영어교사는 어디까지 고민할 것인가? 나도 모름. 이번 수업에서 같이 고민해 보자는 것임!

앎으로서의 지식, 상품으로서의 지식

어느 영역에서나 앎으로서의 지식과 상품으로서의 지식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이 상품기획자의 상술이냐 지식인의 무능이냐 묻는 것은 핵심을 벗어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지식을 구함은 언제나 ‘앎의 기쁨’이 과장된 수사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 그 슬픔에 기꺼이 동참하는 일. 가끔 쓰린 가슴 쏟아낼 벗들이 있음에 견딜만한 일.

넋두리라 불러도 좋을 이야기다. 벌써 8월 중순이니까.

답없는 국어 영어, 답있는 수학 과학

Posted by on Aug 11,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일상 | No Comments

“수학 과학은 답이 딱 정해져 있잖아요.” (전사하다가)

학생들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국어,영어는 정답이 없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수학,과학은 정답이 정해져 있어서 한 가지 올바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른바 ‘어문과목’에서도 엄밀한 접근법이 필요하고, 수학과 과학 등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공존하고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알려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라 ‘현재 수준에서의 최선의 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따라서 공부의 핵심은 ‘콘텐츠’보다 ‘방법론’에 있음을 깨달아 가기를 바란다.

교사-학생의 관계, 왜 변해야 하나

‘교사-학생 관계가 변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교육 주체들이 전통적 권력관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실의 변화를 논의함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이 질문에 대해 혹자는 ‘학습 효율성의 제고’라고 답할지 모른다.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권위가 무너질 때 학생 개개인의 지식과 정보 습득이 더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학습효율의 제고가 교사-학생 권력관계의 변화가 성취해야 할 핵심적인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사–>학생’이라는 일방적 위계를 깨야 하는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학생과 학생 사이의 위계를 깨고 배우는 자들의 자유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더 살펴보자.

학교는 철저하게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먼저 학교는 ‘사회경제적 모순의 집합소’다. 빈부격차, 지식과 경험, 외모와 지능의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공간인 거다. 하지만 학교는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차이의 힘이 공동체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게 놔둬서는 안되는 ‘사회’라는 말이다. 이 사회가 유지되고 진화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평등한 권력관계’라는 플랫폼 위에 놓여져야만 한다. 이 플랫폼이 무너질 때 학교는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직업훈련소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 학교가 변화해야 하는 이유만큼이나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자본주의 양극화의 모순’을 넘어서기 위한 학교교육의 변신을 고민해야 한다. 학교는 사회를 반영하는 사회이지만, 기성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처음 문제로 돌아가 보자. 교사-학생 권력관계의 변화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는 학교의 역할이 ‘사회가 필요로하는 지식의 전달’만큼이나 ‘구조적 모순을 담지한 학생들간의 관계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본다. 교사-학생 관계의 변화는 이러한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촉매가 될 수 있다. 제도적으로 명백해 보이기에 당연히 인정해야 할 것 같은 교사-학생의 수직적 위계가 깨져야만 사회문화적, 경제적 차원에서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학생-학생간 불평등이 전복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문제는 교사-학생간의 권력관계가 학생과 함께 배우려는 교사들에 의해 전복되지 못하고, ‘소비자로서의 학생 권익’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힘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 점에서 ‘학습효과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가 아니라 ‘평등한 인간들의 소통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교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식과 정보의 교환소가 아닌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가꾸어가는 토양으로서의 교실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학교교육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나이브하다. 하지만 교육이 자본주의적 변화를 그대로 받아안아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천만하다. 전자의 폐해는 나이브한 이상주의자의 몫이지만, 후자는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에 직격탄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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