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016. 9.28.

Posted by on Sep 28,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극도로 피곤한데 잠에서 깼다. 계절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 아직 해를 기다리는 새벽 네다섯 시는 하루 중 가장 고요한 때다. 컴퓨터의 윙윙거림이 새어 들어오는 차들의 웅웅거림과 섞여들고, 달라진 소리의 풍경 때문인지 거실마저 낯설다. 시간의 밖으로 튀어나와 우주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불시착한 기분.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근하는 세계와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다시 꿈으로 돌아가겠지. 나의 하루는 이렇게 끝난 걸까 아니면 시작되는 걸까.

대의의 정치와 신의의 정치

Posted by on Sep 28,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여전히 나의 타임라인에는 힐러리 클린턴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관, 친월가 성향, 공화당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외교정책 노선에 대해 성토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를 근거로 그들은 버니 샌더스의 힐러리 클린턴 지지와 이후의 행보를 맹비난한다. 민주당 경선에서 제시된 샌더스의 정책 노선과 대척점에 있는 힐러리 클린턴은 절대 지지할 수 없는 인물이며, 그에 대한 선거운동은 자가당착이고 배신이라는 논리다. 실제로 샌더스는 클린턴 당선을 위해, 즉 트럼프의 낙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뛸 것임을 천명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도 여전히 힐러리 클린턴의 강성매파적 외교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한다. 외교, 군사정책과 관련하여 ‘그래도 트럼프보단 낫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클린턴이 천안함 사건 때 항공 모함을 동해도 아닌 황해로 보내자는 주장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나의 우려가 터무니없지 않다는 점을 방증한다. 게다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외교 전략가는 무려 헨리 키신저!

아울러 많은 공화당원들이 그를 지지하고 나선 건 트럼프가 역대급 개차반이어서이기도 하지만 클린턴의 정치가 공화당의 이념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클린턴 비판자들의 주장이 단지 그에 대한 오해와 중상모략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이 점을 애써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샌더스의 클린턴 지지 행보가 제도권 정치의 정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샌더스는 민주당 플랫폼에서 대선 후보가 되려다 실패했고, 경선의 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샌더스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대선에서 녹색당의 Jill Stein 등 제3후보에 투표할 것이다. 그들의 샌더스 지지가 정치세력으로서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기에 누구에게 투표하건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 민주당 플랫폼에 자신을 던졌던 샌더스에게 민주당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는 자연스런 선택이다 ‘아깝게 졌으니까 나가서 출마할거야’라고 했다면 팬덤에 기반한 반짝쇼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신뢰의 정치인 샌더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는 말이다.

몇몇 사람들은 대의(cause)가 모든 것을 변호해준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현실 정치인에게 신의와 대의는 분리할 수 없는 가치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 낙선에 힘을 쏟으면서도 <Our Revolution> 등의 단체를 만들어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는 샌더스의 행보를 응원한다. 나아가 클린턴(대통령)의 편파적 견해에 균형을 잡아주면서 그가 밝힌 민주사회주의적 비전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로 힘써주기를 바란다. 대의를 위해 신의를 버리지 않고, 신의에 갇혀 대의를 소홀히 하지 않는 지혜로운 정치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덧댐: ‘그래봐야 세계 초강대국의 오만함이 얼마나 바뀌겠는가’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눈꼽만큼의 변화라도 누군가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또한 사실 아닌가.

Writing a lot vs. Writing defiantly

Up to a point, writing a lot matters. It really is important for building one’s writing muscle. When it comes to getting a project done, however, writing persistently is far more important than writing a lot. I call this ‘writing defiantly,’ where one rows strenuously against the current of highly stressful everyday events. This is a valuable lesson I learned from hitting the cul-de-sac in several of my writing projects, where I definitely poured out a lot of text but the manuscripts had nowhere to go other than in a dark, lachrymose corner of my hard disk drive. Some writers may be able to achieve what they want by producing lots of words in a flash, but writing on a regular basis, shine or rain, tormented or commended, matters much more to ordinary writers like me. So writing a lot is good; writing persistently is better. All the best for my friends grappling with those unruly yet lovely manuscripts.

즉흥곡: 그리움에게

Posted by on Sep 24, 2016 in 강의노트,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음악이 없었으면 어떻게 버텼을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저음이 좋아진다.

문법용어와 일상용어의 경계 – 현재완료의 ‘경험’

“현재완료가 경험, 계속, 결과, 완료라는데 잘 이해가 안돼요. 설명해 주세요.”

“(프린트를 보며) 경험은 여기 나온 것처럼 ‘~해본 경험이 있다’는 뜻이예요. 예문은 I have been to Paris. 파리에 가본 적이 있다.”

“그럼 I went to Paris.는요? 그것도 경험은 한 거잖아요.”

“경험을 하긴 한 거죠. 그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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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양보절’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중학생 친구 프린트를 봐주다가 위와 같은 대화를 하게 되었네요.

현재완료의 용법으로 대부분의 문법서들이 “경험, 계속, 완료, 결과’라는 분류를 제시합니다. 사실 제가 ㅅㅁ 시리즈로 공부할 때도 같은 용어를 썼던 것 같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일본 문법서의 영향이 컸던 듯합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런 문법용어(metalinguistic terms)가 이해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완료도 예외는 아니죠.

우선 현재완료는 ‘완료’라는 단어를 담고 있죠. 이는 Present Perfect의 번역어인데, 여기에서 일단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일상용어에서의 완료와 문법적 시상(grammatical aspect)에서의 완료는 사뭇 다른 개념이니까요. 전자가 ‘끝!’의 의미라면, 후자의 의미는 상당히 복잡하죠.

나아가 하위 분류인 ‘경험, 계속, 완료, 결과’에 다시 ‘완료’가 나옵니다. 현재완료 안에 또 완료가 있으니 혼동이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도 맨 처음 현재완료 문법을 접할 때 ‘완료 안에 완료?’라고 질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들이 이런 용어의 벽에 부딪쳐 영어에 흥미를 잃는 경우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이는 국어교육에도 마찬가지여서 몇몇 학생들은 ‘체언, 용언, 관계언’ 등의 용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국어가 싫어진다고 하더군요.

위의 대화에서 나온 현재완료의 경험 용법은 ‘~해본 적이 있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재를 기준으로 봤을 때 경험해 본 바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설명하면 뭔가 부족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I have been to Paris.는 I visited Paris.라는 경험을 담고 있는 것이고,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경험’의 의미에 비추어 보면 둘다 경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좀더 나은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대략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실제로 일어난 일은 한 가지예요. 철수가 파리에 간 적이 있는 거죠. 말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한 가지 사건을 보고 어떤 애는 ‘철수가 동석이를 때렸다’라고 하는데 다른 애는 ‘동석이가 철수에게 맞았다’라고 하죠. 그것처럼 철수가 파리 간 적이 있었다는 걸 과거로 말할 때와 현재완료로 표현할 때는 미묘하게 뜻이 달라져요.

Chulsoo went to Paris. 라고 하면 그냥 ‘철수가 파리에 갔다’의 의미예요. 그래서 철수의 과거 여행을 묘사할 때 ‘철수는 파리에 가서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몽마르뜨에 가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라는 표현을 한다면 “Chulsoo went to Paris.”가 적당할 거예요.

근데 Chulsoo has been to Paris. 라고 하면 이 문장을 말하는 순간 그러니까 바로 지금의 시점에서 철수라는 사람은 파리에 갔다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강조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 이 말을 할 때에는 현재가 중요하죠.

그래서 이걸 영어로 하면 “Chulsoo has the experience…” 정도의 의미가 될 거예요. 한국어로는 ‘~한 적이 있다’, ‘~한 경험을 갖고 있다’ 정도가 되구요.”

문법용어라는 숙제, 언젠가 끝내야 할 것 같은데 쉽지 않네요.

다의어와 광고

Posted by on Sep 24, 2016 in 링크, 말에 관하여, 영어 | No Comments

도대체 어떤 인간이 광고를 이렇게 ㅋㅋㅋ

보면서 추측한 것은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영어 표현 이야기가 나왔을 것 같다는 거. 전쟁 시리즈에서 “shoot a photo”라는 표현과 “shoot a gun”을 절묘하게 겹쳐놓았기 때문이다. “Shoot”에는 “쏘다”와 “찍다”의 의미가 모두 있다. 물론 처음의 공차기도 shooting이다. ^^

과학 리터러시 단상

Posted by on Sep 21, 2016 in 강의노트, 과학,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더 쉽게 쓰라”는 압력에 대해 불만을 떠뜨린다. 학계의 평가가 논문 생산량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현실, 개별 학문 분과의 고유성, 과학자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과학 이외의 업무 부담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일리가 있는 항변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쉽게 써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보다 더 무겁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가치있는 지식이 전체 사회구성원들과 효율적으로 공유되고 있는가”, 나아가 “혹시 그렇지 않다면 공유의 지평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과학적 지식의 공유는 과학자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소통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과학 리터러시가 적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 자본, 과학의 어그러진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더 직접적으로 과학 담론을 왜곡하는 원인은 과학저널리즘의 부재와, ‘비과학-미신짬뽕저널리즘’의 과재(夥在)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빈약한 과학-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 언론과 교육이 손잡고 비과학적 소통을 조장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과학 리터러시를 떠받치는 기둥은 정보의 신뢰성에 대한 판단능력이다. 이는 비판적 사고의 핵심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필요할 때 쉽고 빠르게 믿을만한 정보원에 접근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 정보를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개개인이 합리적인 절차를 걸쳐 논리적으로 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전자는 지식 생산 및 유통 시스템의 수준, 후자는 개인의 지식 향유 행태와 관련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둘이 유기적 관계에 있지만, 사뭇 다른 무게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양질의 과학지식이 유통되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를 향유하게 되면, 점차 ‘쓰레기’ 기사들은 발붙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단편적이고 선정적인 지식이 ‘클릭 낚시’를 위해 분별없이 유통된다. 전자의 경우 과학지식의 유통과 소비가 선순환적 관계를 맺지만, 후자의 상황에서는 개개인이 정보의 신뢰를 판단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동원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혹은 당연하게도!) 몇몇 소수를 제외한다면 정보의 신뢰등급을 판단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유통되는 과학지식의 양과 질이 개개인의 지식 소비 행태, 나아가 정보 분별을 위한 노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 리터러시는 개인의 역량(competency)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인프라에 가깝다. 엉터리 지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지식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요구하는 것은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빠르고 안전한 운전 역량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위험한 도로에서도 매끈한 운전솜씨를 발휘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언제나 예외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얼마나 많은 단어를 담고 있을까?

옥스포드 영어사전 표제어 수 (2판, 20권 세트 기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단어: 약 17만 1천
더이상 사용되지 않는 고어: 약 4만 7천
하위 표제어로 들어가 있는 파생어는 약 9천 5백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명사, 형용사는 약 1/4, 동사는 1/7 정도
나머지가 감탄사, 접속사, 전치사, 접미사 등이다.
(이들 통계는 한 단어가 다른 품사로 사용되어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경우를 고려하지 않은 것에 주의)

“The Second Edition of the 20-volume Oxford English Dictionary contains full entries for 171,476 words in current use, and 47,156 obsolete words. To this may be added around 9,500 derivative words included as subentries. Over half of these words are nouns, about a quarter adjectives, and about a seventh verbs; the rest is made up of exclamations, conjunctions, prepositions, suffixes, etc. And these figures don’t take account of entries with senses for different word classes (such as noun and adjective).”

https://en.oxforddictionaries.com/explore/how-many-words-are-there-in-the-english-language

다시 리터러시다

Posted by on Sep 19, 2016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나는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이 수십년 후 아무 쓸모 없을 거라는 ‘현자’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 예측은 수십 년 세월을 건너 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 뭘 해봐야 소용 없어”라는 말은 미래의 한 시점에서 수십 년을 돌아보면서 던질만한 ‘후일담’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나아가 한 사회는 시간을 건너 뛸 능력이 없다. 경험과 지식은 우리 몸에 차곡 차곡 쌓이고, 그 축적이 권력 관계 속에서 자리잡은 총체가 한 사회의 능력이 된다. 지식의 발전이 그러한 축적 속에서 가능할 뿐이라면, 비약적으로 달라진 세계에 대해 대비하는 방법은 앎의 사회적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길 외에는 없다.

지금 제대로 배워야 내일을 준비할 수 있고, 수많은 오늘들이 모여 새로운 시대를 연다. 많은 것들이 뒤집어질 내일을 상정하고 지금의 교육에 절망하기 보다는 지금 고장난 부분들을 조금씩 고쳐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떡할 거냐고?

읽고 쓰기부터 차근 차근 해보자. 엄청난 데이터가 쏟아져 내리는 울트라메가수퍼빅데이터 시대에 아직도 읽기 쓰기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읽기는 빅데이터의 엑기스에서 정수를 뽑아내는 일이고, 쓰기는 그 정수를 엮어 시대에 맞는 지식을 빚어 내는 일 아니던가? 단순히 데이터의 크기가 아니라 지적 활동의 퀄리티를 본다면 인류가 수백, 수천년 간 연마해 온 리터러시는 그렇게 만만히 볼 활동이 아니다.

소위 ‘인공지능과 알파고 시대’라는데,
나는 ‘다시 리터러시’라고 소심하게 중얼거린다.

실없는 말들이 좋다

Posted by on Sep 15, 2016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동생1: (기관)장은 위에서 떨어지지 뭐.
조카1: (눈이 휘둥그래지며) (위)장이 어떻게 위에서 떨어져?
동생2: 그냥 떨어지면 사람이 죽잖아. 그래서 떨어질 때 낙하산을 달아줘.
나: 풉.
조카2: (동그랑땡을 보며) 오 주니어 버거닷!

실없는 말들을 들으니 머리가 맑아지는 거 같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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