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주면 쌤이 아니다?

나: 시험 잘 보셨다면서요? 뭐 맛난 거라도 먹었어요?
준(가명): 그런 거 없어요.
니: 아…
선(가명): 니가 나보다 평균 20점은 높을텐데.
준: 설마.
선: 진짜로. 진짜로. 전 통닭 시켜먹었어요.
나: 아 통닭. 맛있었겠네요. 점수는 낮아도 통닭 드셨군요. ㅎ
준: 아 왜 난 아무 것도 없어.

……

나: 시험문제 주관식 어떤 거 나와요? 영작 같은 거 많이 나오나요?
준: 영작도 나오고요. 단어 주고 순서 바꿔 쓰라는 거.
나: 아…
선: 맞아. 필요하면 단어 좀 바꿔 쓰라고.
나: 아 동사 같은 거 시제 바꾸고 그런 거요?
선, 준: 네.
준: 그리고 뭐더라. 문장을 영작하고 몇 번째 단어를 쓰라고 해요. 세 번째 단어만 쓰라든가.
나: 아 그런 문제도 나와요?
준: 네. 영어로 썼을 때 세 번째, 네 번째 단어만 써라. 그런 거요.
나: 특이하네요.
준: 근데 지난 번에는 답이 두 개였는데…
나: 그럼 몇 번째 단어 쓰라는 것도 답이 두 개가 되잖아요.
준: 그렇죠. To 부정사 나오는 거 였는데 답은 하나만 된대요.
나: 엥? 가능한 답이 두 개였다면서요. 선생님도 두 문장 다 맞다고 하신 건 아닌가요?
준: 선생님이 둘다 쓸 수는 있다고 했는데… 원래 생각했던 문장 하나만 된다고 했어요.
나: 선생님이 둘다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준: 근데 문장은 하나만 인정해 줘서 전 틀렸어요.
나: 흠… 그건 좀… 혹시 학교에 막 항의 전화 오고 그런 거 없었대요?
준: 엄청 많이 왔대요.
나: 그랬을 거 같은데… 결국 답 안고쳐주신 거예요?
준: (강조하며) 당연하죠. 고쳐주면 그게 쌤이예요?
나: 아… 고쳐주면 쌤이 아니다?
준: 절대 안고쳐주죠. 여태껏 시험문제 몇 개 오류 있었는데 한 번도 답 고쳐주는 거 못봤어요.

……

나: 내일은 뭐 하세요?
선: 아아아… 전 수행평가 과제 해야돼요.
준: 전 아무 것도 안해요.
나: 주말인데 뭐 아무 것도 안해요?
선: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제일 좋은 건데.
준: 그쵸.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최고.
나: ㅎㅎㅎ 하긴 아무 것도 안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죠.
선: 그룹과제가 제일 싫어요.
나: 아 같이 뭐 해야 되는 거예요?
선: 네.
나: 꼭 안하는 애들이 있죠?
선: 안하는 것도 그렇고, 온다고 그랬다가 안오고, 연락 끊기고.
나: 심하네요.
준: 버스타는 애들.
나: 아 ‘버스탄다’고 해요?
준: 네. 무임승차.
나: 아 그걸 버스 탄다고도 하는구나.
준: 네네.

……

나: 자 그럼 안녕히 가시고, (준에게) 부디 아무 것도 하지 마시고, (선에게) 그룹과제 잘 하시고요.
준, 선: 네 안녕히 가세요~

===

대부분의 교사들이 겪는 중간기말 시험문제 스트레스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가끔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는 교사들이 분명 있다.

“고쳐주면 그게 쌤이예요?”

무심코 튀어나온 말.
하지만 가슴에 와서 콕 박힌 말.
원래는 이런 말이었어야 하지 않나.

“(틀린 줄 알면서도) 안고쳐주면 그게 쌤이예요?”

그나저나, 아무 것도 안하는 주말.
좀 부럽구나. ㅎㅎㅎ

디테일의 힘 vs. 선언의 무력함

Posted by on Oct 20, 2016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삶이 힘겨울 때, 자세히 말할 기운마저 잃는다. 좀더 정확히 말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순간 삶이 더더욱 힘겨워진다. 그래서 택하는 것이 선언이다. 주워온 아포리즘, 암호같은 경구, 맥락을 상실한 토막글, 무언가 말했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유령글, 현실을 잡아내기엔 너무나도 성긴 그물글이 많아진다.

요즘의 내가 이렇다.

선언은 본래 널리 퍼져나감을 겨냥한다. 타인에게 닿아야 한다. 하지만 침잠하는 삶 속에서 선언은 내면의 찻잔 속 태풍이다. 마음 모퉁이 몇 군데를 튕기다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도 전에 사라진다. 더 큰 세계를 향해 떠났지만 뭉툭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끼어들 현실은 없다.

디테일은 작은 것이지만 그것을 관찰하고 만들어내는 일은 깊고도 넓은 시선을 고집하는 이들의 것이다. 어두움에 익숙해지기 위해 암흑 속에서도 눈 부릅뜨고 세상을 직시하는 이들 말이다. 나아가 아름답고 편하며 즐거운 것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는이들에게만 균형잡힌 디테일이 허락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쁜 풀꽃처럼 자세히 볼수록 더러운 것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잔인하고 추악하며 우둔하기까지 한 디테일의 향연 속에서 선언하지 않고 버텨내기 힘든 나날이 이어진다. 눈 질끈 감고 돌아서고 싶어진다. 그래서 더더욱 잔혹한 시대에서도 디테일을 잃지 않는 이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너무 잦은 선언으로 무력해지는 마음의 균형을 잡게 해주시는 분들,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깨닫게 해주시는 분들 말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할아버지가 제일 이쁘신 듯 ^^

Posted by on Oct 19, 2016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할아버지 한 분이 불쑥 옆으로 다가왔다. 놀랐다. 사실 좀 쫄았다.

“거기서 뭐하는 거요?”
“아 네? 그냥 사진 좀 찍고 있었는데요.”

순간 담쟁이 사진 찍다가 ‘이거 도둑놈 아닌가’ 하는 눈빛 세례를 받았던 경험이 재생되었다. 어서 여길 뜨자.

“뭘 그렇게 찍어?”
“아 여기 이거 매달려 있는 꽃이 예뻐서요.”
“그게 이뻐요?”

아 이건 뭐지.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요’도 붙었다. 급 친근 모드다.

“네. 햇빛 받으니까 반짝거려서 예쁘네요.”
“(씨익 웃으시며) 그게 이쁘지. 말도 못하게 이쁘지.”
“(안도하며) 네네. 그러네요. 건물 여기 저기 누가 달아놓으셨더라고요.”
“일루 와봐. 일루 좀 와봐.”
“네?”
“일루 좀 와보라니까 일루. (따라오라 손짓까지 하신다. 안따라가면 큰일 날 분위기. 철제 문을 열고 다세대 주택 옆으로 난 좁은 통로로 들어가신다.) 얼마 전에 이사와서 여길 내가 싹 치웠어. 혼자서 다. 얼마나 지저분하던지. 근데 다 치우고 났는데 그게 한보따리 나오더라구.”
“아…”
“그런데 이게 너무 이쁜 거야. 너무 너무 이쁜거야. 이거 봐 이거. 이거 진짜 이쁘지않아?”
“네 정말 예쁘네요.”
“(신이 나셔서) 그래 내가 이걸 다 정리를 해가지고 여기다가 놔뒀지. (대형 비닐 봉다리를 푸시며) 이게 이렇게 많더라니까.”
“정말 엄청 많네요.”
“그래 그래. 근데 젊은이가 그게 이쁘다고 하니까… 이쁜 거 볼 줄 아네. 진짜. 사진 찍고 있는 거 보니까 좀 주고 싶어서 그래.”
“아 안주셔도 되는데요. 사진 찍어서 괜찮은데.”
“아니 사진은 사진이고. 이건 어디 가서 돈주고 사려고 해도 절대 못산다니까. (한웅큼 꺼내시며) 이거 내가 줄 테니까 가져가. 이쁘잖아.”

걸어서 십여 분 거리, 중간에 살 것들도 있는데 저걸 들고 다니기가 심히 불편할 듯하다.

“아 제가 집이 그렇게 가깝지 않아서 들고 가기도 좀 그래서요.”
“그래?”
“네네.”
“흠…. (순간 정적)”
“안주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럼 기다려. 내가 봉지 따로 줄 테니까 싸가지고 가. 이거 가져가서 아무렇게나 걸어놔도 이뻐. 많으면 나눠주고.”
“아 네네.”
“잠깐 기다려. 내 곧 나올게.”

졸지에 조화를 손에 받아들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이내 봉지를 가지고 나오시는 할아버지.

“자 여기다 가져가면 되겠네. 내가 이거 지금 잘라서 집을 다 꾸며놨잖아.”
“네 그러네요. 건물 여기 저기 보이네요.”
“내가 나이가 몇이야. 여든 하나야. 근데 택시 운전을 해요. 이것도 다 내가 다듬어서 꾸미고 있어.”
“아 정말 수고 많으셨겠네요.”
“그래도 기분이 좋잖아. 예쁘니까 보면 기분 좋아지고. 이거 다 꽃 보면서 서로 화목하게 살자고 하는 거야. 사이좋게 살자고.”
“네네. 좋네요. ^^”
“이쁘게 잘 해놓고, 남으면 누구 또 주고 그래.”
“네, 감사합니다.”

산책 길에 졸지에 조화 한뭉치를 들고 왔다. 여든을 넘긴 할아버지에게 ‘이쁘잖아’ 소리를 몇 번 들었는지 모르겠다. 새로 이사오신 집에서 사이좋게, 화목하게 지내실 수 있기를. ^^

근데 이거 어떡하지 ㅎㅎ

여유와 의미

Posted by on Oct 19, 2016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여유가 생겨도 의미 없이 보내는 일이 잦다.
아니 꼭 ‘의미’를 찾아야 한다면 그게 여유인가?
애매한 언어를 비웃으며
시간은 흐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쓸모와 능력

Posted by on Oct 19, 2016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내게 쓸모와 능력은 다르다.
‘능력있는 사람’이 못된다는 걸 깨닫기도 했지만
쓸모라는 말에 점점 더 끌린다.
쓸데 없이 능력만 넘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능력이 ‘없어서’ 쓸모를 갖게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학생들이 말하는 ‘행복’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행복은 없다.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한다고 믿지만, 그리고 추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이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사소한 일에도 웃을 수 있는 것. 지금은 나에게 너무 먼 것.
적당한 여유와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처한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 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 것.
행복이란 큰 걱정이 없는 상태이다.
행복은 시험이 끝나 친구들과 술마시며 웃고 떠드는 느낌이다.
행복: 고민과 걱정이 없는 상태.
감정의 주체가 긍정적인 정신적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
그날 그날 충분한 ‘행복감’을 느끼는 것. ‘행복감’이란 무언가 다소 감각적인 느낌. ‘아 행복해!’ 하는 감정.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의 합이 그냥 행복인 것 같다.
아무런 다른 일 생각나지 않으면서 웃을 수 있는 것.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행복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
자유로운 상태에서 타자에 대한 공헌을 통해 공동체 감각을 갖는 것.
정서적으로 충만하여 부족함이 없는 상태.
걱정거리가 없거나 있어도 괜찮은 것. :)
행복, 삶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조각.
힘든 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행복은 밤에 잠에 드는데 마음 속에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는 것.
평범한 일상.

===

단어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단어의 사용이 우리 생각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단어를 정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부질없으며 때로는 막무가내인지 생각해 보기 위해 했던 작은 활동.

어쩌면 나에게 ‘행복’은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쩔 수 없는 우울함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행복에서 비껴나야 행복할 수 있는, 역설의 관계라고나 할까.

국회 발언중 모유수유하는 아이슬란드 의원

Posted by on Oct 16, 2016 in 링크 | No Comments

아이슬란드의 중도우파 당인 아이슬란드 독립당(Iceland Independence Party) 의원 Unnur Brá Konráðsdóttir이 국회발언 중 모유수유를 하고 있다. 모유수유 중 발언을 요청받자 이렇게 행동했다고 하는데, 그 어떤 거리낌도 동요도 없는 듯하다.

느슨하지만 꽉찬 관계

중학생들과 전치사를 배운다.

“자자. 여기 보세요. go to work. 이건 무슨 뜻일까요?”
“…”
“go to school 있잖아요. 학교가다. 그니까 이건?”
“일하러 가다?”
“맞아요. 일하러 가다. 직장에 가다. 따라해 보세요. Go to work.”
“Go to work.”
“그럼 go to work랑 go to school 중에서 뭐가 더 나은 거 같아요?”
“둘다 가기 싫은데… / 학교 가는 데 돈 주는 거?”
“ㅎㅎㅎㅎㅎ”

===

“전치사, 여기 보니까 처음에 시간의 전치사, 뒤에 장소의 전치사가 나오네요.”
“네.”
“근데 전치사들 한번 비교해 보세요. 시간에 쓰이는 거랑, 장소에 쓰이는 것들…”
(학생들이 대~충 페이지를 흝어본다.)
“이게 사실 비슷하죠? On, in, at, before…”
“그러네요.”
“이게 왜 그럴까요?” (질문 던져놓고 순간 아차… 넘 어려운 걸 물어봤네. ㅠㅠ)
“…. (멀뚱멀뚱)”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한번 듣고 흘려요. ㅎㅎㅎ (아 멋적어) 시간이라는 게 뭘까요? (아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데~) 이게 시계를 보면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고 그런 건 눈에 보이는데 ‘시간이 뭐냐’고 하면 사실 할말이 없거든요.”
“…. (계속 멀뚱멀뚱)”
“그래서 시간을 나타낼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거, 실제 경험할 수 있는 걸로 이야기를 하죠. 그게 바로 장소죠.”
“”…. (계속 멀멀뚱뚱)”
“At the corner 라고도 하지만 at 7 o’clock 이라고도 하잖아요. From 망원동 to 합정동, 이라고도 하지만 from 4:30 to 5:30 라고도 하고요.”
“네 그쵸.” (나: 아 드디어 대답을 했다!)”
“그렇게 장소를 나타내는 말을 가지고 시간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제 끝내야지) 암튼 (<– 급히 말 맺을 때 나의 습관) 시간이랑 장소에 대해 말할 때 전치사가 쓰이고, 걔네들이 비슷비슷하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네.”

===

“Strange but interesting 나왔네요. Strange는?”
“이상한!”
“그쵸. 그니까 ‘이상하지만 재미있는’이라는 뜻이겠죠? 이거 보니까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생각나요. 저도 봤거든요.”
“재밌죠?”
“네. 재미있던데요? 팀버튼 영화가 좀 strange but interesting 하죠.”
“네. 이상한 애들이 좀 나오죠. ㅎㅎㅎ”
“아 그러고 보니까 Dr. Strange도 곧 나온다고 하던데.”
학생 중 하나: “(완전 실망한 투로) 아 그거 번역을 박OO가 한대요.”
“아 그 사람이 어떤데요?”
“번역을 디게 못하거든요. 여혐 번역도 많고.”
“아…”
“그래서 별로예요.”
“아 그럼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네요.”
“???”
“번역 없이 영화 보면 좋잖아요.”
“……”

===

금요일 오후를 거의 늘 이렇게 보낸다. 방전되기 일보 직전에 만나는 친구들. 갈 때는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나올 때는 조금 덜 무거운 것도 같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주고받는 관계이지만 서로에게 매이지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나는 친구들로부터 배우고 친구들은 나에게 배우지만 서로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관계. 숙제도, 강의료도, 시험도, 내신도 없다. 책을 안가져와도 오케이. 딴 소리를 좀 해도 오케이. 사정이 생기면 미리 연락하고 안오면 그만. 하지만 그게 서로에 대한 신뢰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태껏 그래왔듯 계속 만날 것이라 다들 믿고 있으니… 물론 이 관계도 언제 툭 끊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디 관계 뿐이랴.

계약과 구속이 들어설 틈 없는 느슨한 관계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느슨하지만 꽉찬 관계들이랄까…

‘전문가’적 ‘진정성’

Posted by on Oct 12, 2016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영상의 증거능력은 못본체로 무력화하고, 동료 전문가들의 이의제기는 버티기로 무시하고, 자신의 기록에는 온전한 망각을 시전하며, 전문가 단체의 규정과 권고에는 흘려버리기로 대응하는 방식을 이른다. ‘전문가’적 ‘진정성’은 전문가들과 진정성을 동시에 내팽개치는 능력을 지녔기에, ‘전문가’가 되려 할 수록 비전문가가 되고, ‘진정성’을 갖추려 할수록 진정성이 사라지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적 진정성’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으니 바로 ‘-적的’이다. 지금 우리는 전문가도 진정성도 사라져 ‘적’들만 둥둥 떠다니는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하다.

Sammy는 교실에 자리가 두 개

개별화 교육(Differentiated Instruction; DI)에 대해 읽다가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서 남겨둔다.

“Sammy는 한 자리에 몇 분 이상 앉아있질 못하는 학생이었다. 조금만 오래 앉아있으려 해도 주의가 산만해져서 결과적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알게된 교사는 교실에 Sammy 자리를 하나 더 마련했다. 필요할 때마다 두 자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수업을 듣게 하려는 배려였다.” (Carol Ann Tomlinson & Tonya R. Moon. (2013). Assessment and Student Success in a Differentiated Classroom. ASCD. p.13, 발번역입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학생을 방치하거나 ‘왜 그러느냐’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 주는 교사. 그런 모습에 대해 ‘왜 쟤만 자리가 두 개예요? 완전 불공평해요!’라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 학생들. 그 광경을 그리며 흐뭇해지면서도, 언젠가 뉴스에서 본 아파트 단지 사이의 철조망이 떠올라 입안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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