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음을 간직하는 법에 대하여

Posted by on Jan 31, 2017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왜?
이걸?
어떻게?

논문에 접근하는 개념적 질문 셋.

논문쓰기 강의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난 지금

왜?
이걸?
어떻게?

결국 답은,
사람들 안에,
나와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만들어 갈 세계에 있다는 걸 알지만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쓸데없음을 간직하는 법에 대하여…

Two frames about the evil forces

There are largely two frames about the evil forces: (1) They don’t know the facts. They are not able to put themselves in other people’s shoes. They are misinformed in every aspect. (2) They surely know how to ignore the facts. They are superbly able to “stick to their own shoes.” They have their own media, which exerts control across society.

The former construes the evil as “unable” and “misguided.” The latter as “able” and “self-generated.”

Yes, they are misinformed. But the more crucial is the fact that they can engineer and spread fake news as well as control media. They may hopelessly lack empathy, but the more dreading point is that they can generate the ‘alt-reality’ that soothes people’s indifference and intolerance, and even crowns hatred and violence.

The fight lies in how to decapacitate the evil, draining its financial, institutional, and psychological resources, not in how to explain their pathetic ignorance away.

공부하고 밥벌이하며 살아간다는 것

지금은 새벽 두 시 이십 칠 분. 하루 종일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 소식, 다른 하나는 한 지인의 양심적 병역거부 결단 소식입니다. 지진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속 뉴스를 보게 되고 글을 읽게 됩니다. 평화주의자로 살기로 마음먹은 그 친구의 얼굴이 자꾸 떠오릅니다. 마음은 정처없이 부유하고, 그런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연착륙시켜 보려는 시도도 잘 되지 않더군요. 친구를 위해 노래를 하나 연주하고 새로 구입한 책을 조금 읽다 덮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새벽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재난과 병역거부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 비껴나 어제 지도교수와 한 이야기를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터라 졸업 이야기가 어쩌다 나옵니다. 어제도 졸업 후 미국에 남아있게 될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 쪽으로 진로를 결정할 것인지 등등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선 저는 대학에 남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대학에 남는 것이 학자로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에게 가장 좋은 학자는 세계를 깊이 성찰하고, 성찰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런 성찰과 소통을 연대로 이어내는 사람입니다. 특히나 교육과 언어학, 심리학과 인류학 등이 ‘짬뽕된” 응용언어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있기에, 삶에 대한 이해와 개입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한편으로 저는 밥벌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관심이 많다 함은, 밥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직업을 반드시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밥벌이라는 표현은 저에게 비루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삶을 지탱하고 제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제 앞가림은 꼭 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사실 (절대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나름 힘들었던 시절을 겪은 후로 가난이 개인과 관계에 대해 미칠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저와 지도교수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습니다. 저는 지도교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경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분야를 개척한 “대가” (이 단어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라 빌려 씁니다) 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근본적으로는 정말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지도교수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언제 졸업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졸업과 관계 없이 지도교수가 제 삶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 같습니다.

어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지도교수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연구를 하는 학자로 남고 싶냐고. 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연구 research 중심 대학으로 가려고 생각해 보면 지금 출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슬슬 걱정도 된다고. (물론 저는 졸업만 해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꼭 연구중심 대학에 가려는 생각도 없고요.)

지도교수가 말했습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였죠.

“정말 연구자로 살아가고 싶다면 어떤 기관이든 들어가서 계속 연구를 해라. 요즘 학생들은 연구중심 대학에 바로 가려고 하는 생각이 많은 거 같다. 너무 고른다. 하지만 평생 연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교육 중심 대학 teaching school 으로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거기서 시작하는 거다. 그리고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길을 만들면 된다. 물론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면 거기에서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이 학교에 오기까지 5번 학교를 옮겼다. 처음에 간 학교는 아주 작은 지방의 학교였다. 나는 가족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누구든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연구중심 대학에 가야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연구자로 살고 싶다면 어디든 가서 연구를 하면 된다. 그런데 너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느 쪽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저는 말했습니다. “I’ll go wherever they pay me.” (월급 주는 데로 가야죠.)

지도교수가 웃더군요. 그리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좋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가에 너무 가치를 두는 건 좋지 않다. 그리고 만약 네가 진정한 연구자로 살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건 하루의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할애하는 일이다. 학교 사정이나 집안 사정, 혹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반드시 일정 시간을 읽고 쓰는 데 써야 한다. 물론 이게 쉽지는 않다.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학자로 살아가려 한다면 삶의 고난이 와도 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일 때문에 다른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나는 운이 좋아서 이걸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시간에 “파티션을 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참고로 지도교수는 매우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실천과 이론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을 꾸준히 확보하지 않으면 학계 academia 에서 네가 원하는 일을 꾸준히 하긴 힘들다.”

이제 새벽 세 시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반성해 봅니다. 사실 많은 세월 동안 사회 정치적 이슈와 씨름하면서 살아왔고, 이를 후회하진 않습니다. 앞으로도 삶의 본질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러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그 삶 속의 많은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제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세상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튼튼하고 쓸모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 (공부라고 불리는!)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핵심을 위해 매진해야 하고, 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라는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무얼까. 지도교수의 말 속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삶의 일정 부분을 늘 읽고 쓰는 데 쓰는 것. 그리고 마음 아픈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이 공부의 시간을 양보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 공부의 시간을 통해 ‘명예’를 얻거나 ‘좋은 연구 중심 대학’에 가기 위해 쓰지 않는 것.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의 파티션”을 치는 것.

가끔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꼭 졸업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가끔은 이왕 4년 한 거 마치고 오라는 말씀도 ㅠㅠ) 교사 자격증이 있으니 임용 시험을 보거나 사립학교에 지원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맞장구를 칩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면 그거 하고 살면 된다고.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된다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이 꼭 다른 길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공부해서 남주냐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남주려고 공부하는 삶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에 파묻히는 공부가 아니라 나를 세계로 덮어버리는 공부도 가능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 일상의 행복을 접는 게 아니라, 공부를 통해 일상에서 더 깊은 행복을 맛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처럼, 내가 사랑하는 말과 사람의 세계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1.5.12.

Open Peer Review

Posted by on Jan 29, 2017 in 링크, 수업자료,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학술지의 맹검(Blind Review) 제도는 양날의 검이다. (1) 학문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자발적 헌신이라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심사자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힘들고, (2) 특혜없이 공정한 논문심사를 지향하지만, 전문성과 책임감 모두 미달인 심사평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익명성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그 폐해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에 대해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 가지 고려할 만한 방안은 코넬 대학교의 arXiv.org에서 시행하고 있는 공개 동료심사(Open Peer Review)이다. arXiv에서는 편집자들이 공개적인 리뷰를 첨부하여 논문의 프리프린트에 첨부하고, 이를 기반으로 선별된 아티클을 ‘출판’ 상태로 바꾸는 방식을 취한다. 아래 링크에서 이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다.

“Today’s peer review process for scientific articles is unnecessarily opaque and offers few incentives to referees. Likewise, the publishing process is unnecessarily inefficient and its results are only rarely made freely available to the public. Here we outline a comparatively simple extension of arXiv.org, an online preprint archive widely used in the mathematical and physical sciences, that addresses both of these problems. Under the proposal, editors invite referees to write public and signed reviews to be attached to the posted preprints, and then elevate selected articles to “published” status”.

https://arxiv.org/abs/1011.6590

Let them in!

Posted by on Jan 29, 2017 in 단상, 영어, 일상 | No Comments

“Let them in! Let them in! Let them in! Let them in!”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아마도 ‘지 일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난리냐 XX”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 일도 아니면서’가 공항을 짓고, 인터넷을 깔고, 교육제도를 발전시키고, 미국 사회를 건설하고, 인류 문명을 세워 왔다는 것을 영영 모를 것이다. ‘지 일 아닌 일들’이 ‘지 일’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 말이다.

스치듯 안녕

Posted by on Jan 29, 2017 in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간만에 취미생활. 사전을 한 권 샀다.

나: “사전 씹어 먹어야지.”
짝: “어. 집에 소화제 많아.”
나: @#%@# 진짜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그럼 이제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하네.”말고, “사전 씹어 먹고 소화제 털어 넣는 소리 하네.”가 되는 건가?
짝: …………………..

이 세상엔 ‘나름의 기지’로 등장했다가 ‘싸늘한 반응’으로 즉시 퇴장당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2017년 설 연휴도 오자 마자 저무는군요. (한숨)

다의어의 세계, 아이덴티티의 세계

예전에 중학생 친구들을 가르칠 때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이거 왜 이렇게 뜻이 많아요? 얼마나 많이 외워야 되요?”
“그치? 단어 하나에 뜻이 너무 많지?”
“네네. 영어 짜증나요.”
“ㅎㅎㅎㅎㅎ”

단순하지만 언어가 작동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다의어 polysemy”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단어가 하나의 뜻에 그치지 않고 여러 뜻을 가진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지능력과 어휘-맥락의 작동방식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됩니다. 이에 저는 저 순간을 의미 있는 교수 기회(teachable moment)로 삼았습니다. 아울러 짜증나게 영어만 그렇다는 생각은 외국어에 대한 상위인지의 허점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었기에 간단한 과제로 대응해 보았습니다.

사회적 아이덴티티와 다의어

중학생들에게 다의어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학 이론을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양한 사회적 역할과 아이덴티티의 변화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대충 이런 식이었죠.

“우리가 속한 사회 집단을 생각해 보면 보통 몇 개, 많게는 수십 개가 되죠. 반, 학교, 직장, 학원, 집, 종교 단체, 동호회, 동문회, 향우회, 친구 모임, 각종 게임 서버, 소셜 네트워크, 온라인 커뮤니티 등등등. 각각의 그룹에서 우리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 겁니다. 단체의 성격에 따라, 그 단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거기에서 맡고 있는 역할에 따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길 바라는 지에 따라,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말과 행동, 옷차림까지 달라지죠.

다시 말해 우리 각자는 한 사람이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정체성(identity)을 발현합니다. 한 사람이지만 그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죠. 그렇다고 몇 초 단위로 성격이 달라지면 위험하겠죠? 그야말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테니까요. 물론 이게 안되어도 큰일입니다. 왜 큰일이냐고요? 가족에게 하는 말과 행동 그대로를 담임선생님이나 학급 친구들한테 해보시면 왜 큰일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단어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상황에 쓰이게 되죠. 각각의 상황마다 그 단어의 행동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어울리는 단어나 문법도 조금씩 달라지는 거죠.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친구들(collocation, 연어)이나 모이는 방식(structure, 문법)이 달라지니 결국 그 뜻이 달라지게 됩니다.

결국 맥락 context 과 쓰임 use 에 따라서 단어의 뜻이 변화하는데, 이 변화의 패턴을 잘 정리해 놓은 것이 사전에 등재된 단어의 여러 뜻입니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출현하는 단어들을 모아서 이것들을 정밀하게 구분하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사전 편찬자들을 제일 머리아프게 하는 건 ‘애매하게 쓰인’ 단어들이예요.

여기에서 재미난 현상이 발견됩니다. 잘 보면 사전에서 뜻이 많은 단어는 별별 맥락에서 다 사용되는 단어들이예요. 예를 들면 동사 중에서 ‘take’나 ‘get’같은 걸 보시면 보통 수십 개의 뜻이 나오죠. 오만 가지 상황에서 굉장히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여러 가지 뜻을 표현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take나 get 같은 건 뚜렷한 개성이 별로 없어요. 좋게 말하면 유연성이 뛰어난 녀석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두루뭉술의 대가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이 단어를 보세요. Protanopia. 아마 못들어 보셨을 거예요. ‘적색맹’이라는 뜻이예요. 다양한 색맹 증상 중 하나죠. 여러분 적색맹이라는 말 자주 사용하세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포켓몬 고 할때도 사용하나요? 아니죠. 적색맹이라는 말은 의학용어로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사용되겠죠? 그래서 사전을 찾으면 ‘적색맹’ 혹은 ‘제1색맹’ 같이 딱 하나의 뜻으로 풀이되어 있어요. 겹치기 출연 안하고 자기가 나올 데를 딱 아는 거죠. 이런 단어들은 출현 빈도는 낮은데, 성격이 뚜렷해요.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get 같은 친구와는 다른 거죠. ㅎㅎㅎ

자 이제 왜 어떤 단어들은 그렇게 뜻이 많은지 아시겠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면 어떤 단어에 뜻이 많은 이유를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 가기 전에 한 가지 과제를 드릴게요. 정말 영어 단어만 그렇게 뜻이 많은 걸까요? 우리말 단어들은 안 그럴까요? 집에 가서 국어사전을 찾아 보세요. 예를 들어 ‘가다’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뜻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같이 이야기해 봐요.”

===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더 넓은 아량(?)으로 국어사전에서 ‘가다’를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전 이만 갑니다. 명절이 벌써 다 간 느낌이네요. 아까 마신 커피의 카페인발이 너무 오래 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효율성의 비결

Posted by on Jan 27, 2017 in 일상 | No Comments

카페 너른 책상. 반대편에 맥북과 최신형 아이패드로 무장한 분이 앉았다. 패드와 노트북을 번갈아가며 작업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음… 나름 듀얼모니터군. 왠지 효율이 높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잠시 후 생수를 가지러 다녀오는 길, 패드에 가득 찬 공유의 얼굴과 마주친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아낸다. 효율성의 비결은 저 얼굴이었구나. 거울만 봐도 인생의 효율이 높아질 것 같은 사람들과, 누군가가 정해 놓은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거울 볼 틈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느닷없는 결론: 도깨비는 도깨비답게 생겨야 하는데 말이지.

하고 싶은 이야기

Posted by on Jan 24, 2017 in 강의노트, 일상 | No Comments

얼마 전 한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년 만에 만났지만 오랜 세월 알고 지낸 터라 어색함은 없었다. 시간 참 빠르네요, 예전 학교 다닐 때 ‘아무 생각 없이살았는데 말이지, 좌충우돌. 이제 초점이 안맞아서 애기가 ‘아빠 이거 봐’하고 들이밀면 슬쩍 밀치면서 봐요, 나도 순간 ‘초점 거리가 이리 밀렸나’하면서 흠칫 놀라곤 해, 나이드는 건 다 비슷하네, 그래도 아기들 키우는 거 보면 정말 힘들 거 같아, 그렇지 뭐.

잡다하게 시작된 대화는 희망 없는 한국사회와 끝나지 않을 먹고사니즘 이야기로 넘어갔고 예상된 운명처럼 “우리가 왜 이걸(영어교육) 하고 있나”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쳤다. 학교에 자리를 잡고 오랜 시간 논문을 발표해 온 그도, 시간강사로 살아가며 가르치는 데 좀더 애쓰고 있는 나도 이 질문을 똑같이 붙잡고 있었던 거다.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되는지…”라는 그의 말에 조심스레 답을 하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건 좋아. 학생들 만나면 힘을 많이 얻지. 솔직히 맘에 안드는 애들도 있지만 ㅎㅎ 근데 우리가 공부한 걸 결국 ‘영어교육과’라는 데서 풀게 되는데, 이 공간이 점점 본질과는 멀어지는 거 아닌가? ‘본질’이라고 하니 뭐 거창한 건 아니고, 응용언어학이든 인지언어학이든, 비판이론이든,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못된다는 거지.

내 능력이 안되는 걸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학생들이나 과가 원하는 게 정해져 있고, 교수든 강사든 그 틀에 맞춰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니까. 진짜 중심에 가 닿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이걸 생각하면 답답하지. 논문을 쓰고 발표를 하고 그래도 이게 결국 효율성의 문제로 가버리니까. 게다가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 봐야 전문가들은 저 밖에 있고. 영어교육에 대해서는 다들 할 말이 많으니까. 그런 무력감도 있는 거 같아. 게다가 신경망 번역까지. ㅎㅎㅎㅎㅎ”

그는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그리고 가슴을 두세 번 두드리며 말했다.

“맞아, 진짜 해야 되고 하고 싶은 이야기… 그게 안되지.”
“안되지…”

시간표와 체력 등을 고려해 한두 번 거절한 학교에서는 다시 강의 요청이 들어오지 않는다. 다행히 새로운 곳에서 연락이 왔고 완전히 새로운 수업들을 짜고 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질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학생들이 “내가 왜 이걸 듣고 있지?”라는 질문을 최대한 적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 뿐.

강의는 거절하는 게 아니고 회의는 빨리 봉합하는 게 좋다. 추운 날도 곧 지나갈 것이고, 2월에는 처음으로 여는 ‘방학특강’에서 새로운 분들을 만난다. 시대는 개떡같지만 만남에 대한 설렘은 아직 죽지 않았다.

A rather unexpected impact of the T—- era on writing instruction

Posted by on Jan 23, 2017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My next argumentative essay writing class will have some additional components: (1) telling facts from alternative facts, (2) telling truths from post-truths, and (3) tallying the total number of participants in a political event by comparing two photos with a ridiculously different density of people. (S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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