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페코엔시 구단의 승리

Posted by on Jan 23,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2016년 11월 28일, 브라질 1부리그 프로축구 팀 아소시아상 샤페코엔시 지 푸테보우의 선수 및 스탭들 중 65명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합니다. 코파 수다메리카나 2016 결승전을 치르기 위해 콜롬비아로 가던 중 비극을 맞은 것이었죠. 구단 멤버 대부분이 사망한 후 열린 첫 경기에서 샤페코엔시의 승리가 선언되고, 승리의 메달이 유족들에게 수여됩니다. 경기의 해설자 또한 사고 생존자였다고 하네요.

질문 정하기, 인간 지우기 — ‘스크립트 문답’에 대한 깊은 우려

‘정해진 질문과 답변’이라는 말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습니다. 답을 알고 하는 질문이 무슨 질문이며, 질문을 미리 알아버린 답이 어떻게 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답을 정해 놓고 질문을 하라는 요구는 매끄러운 진행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1) 자신의 삶에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거나 (2) 정치가로서 정책과 비전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3) ‘귀찮은’ 질문들을 피해가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정치적 행태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에 주목합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인간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질문과 답을 정해놓고 ‘대화’를 진행함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너의 질문이나 호기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너의 목소리를 빌리겠다, 이런 자리에 캐스팅 되었다는 사실로 만족해라, 어떤 비판이나 호기심의 언어도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빛나야 할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니까.’

결국 질문과 답을 정한다는 것은 지금 내 앞의 인간을 지우는 행위입니다. 마주하는 얼굴마저 지우려는 사람이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질문을 정하는 일은 인간을 지우는 일입니다. 자신의 우월함을 뼈속 깊이 체화한 사람만이 질문을 정할 수 있습니다. ‘짜고 치는 대화’를 그 어떤 상황보다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v.media.daum.net/v/20170121000301686

 

컨텍스트를 지배하는 자가 법을 지배한다

Posted by on Jan 20,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법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공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법도 하나의 언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흔히들 텍스트를 언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음성 텍스트) 혹은 책에 쓰여있는 바(문자 텍스트)를 언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는 언어의 물적 존재양식일 뿐 언어 자체는 아니다. 말글이 아니라면 무엇이 언어라는 말인가?

단순화를 무릅쓰고 이야기하자면 언어는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결합이다. 언어는 발화(utterance) 혹은 문장(sentence)이 아니라 이들이 특정 맥락에서 획득하는 의미, 나아가 이에 수반되는 효과다. 때로 권력은 텍스트 자체를 바꾸지 못할지언정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만나는 방식을 형성한다. 때로는 ‘진보적’ 텍스트를 만들어 내면서도 컨텍스트를 바꿔 말의 힘을 무력화한다. 말과 상황의 ‘관습적인’ 결합방식을 ‘자연스럽게’ 체화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실현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누구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하는지에 따라 텍스트의 내용과 효과가 달라진다. “늙었네”라는 똑같은 말을 내가 어머니께 할 때와 어머니가 나에게 할 때의 의미는 달라지듯 말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정치인의 입에서 나올 때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참전용사의 입에서 나올 때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가공할 힘을 만난다. 민주공화국에서 법은 단일한 텍스트다. 해석의 다툼이 있는 법조문이 분명 존재하지만 텍스트로서 법은 하나로 존재한다. 이 텍스트는 일련의 의도, 사건, 파장 등과 결합해 그 의미와 효력을 실현한다. 이 과정에 다양한 사람들이 개입하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법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때 컨텍스트를 지배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법효력의 힘과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시민들의 힘으로 바뀌어온 법이라는 언어. 하지만 이 언어의 힘을 결정하는 것은 텍스트가 해석되고 적용되는 컨텍스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들이다. 한국사회의 정점에는 삼성이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과신은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텍스트의 변화는 중요하지만, 최종심급은 텍스트와 만나는 컨텍스트의 성격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컨텍스트를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있다.

그래서 “법에 의한 지배”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다. 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권력이 법을 통해서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지배양식은 텍스트에서 오롯이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기록될 수 없는 맥락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이 법을 지배한다.

Irrationally yours

Posted by on Jan 20, 2017 in 단상, 링크,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기사 말미에 책의 원제인 “Irrationally yours”가 “‘비합리적인 당신에게”로 번역되어 있다. 완벽한 오역이다.

미국영어를 기준으로 서간문의 말미에 많이 나오는 표현으로 “Sincerely yours”가 있다. 이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I am sincerely yours.” 정도의 줄임말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직역하면 ‘나는 당신의 충실한 사람/하인/친구’ 정도의 의미인데, 진짜 소유의 뜻은 아니고 격식을 갖추어 공손함을 표하는 어구로 보면 된다.

이와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저자 Dan Ariely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책이 <Predictably Irrational>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상식 밖의 경제학>으로 번역됨.)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을 심리학/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풀었다. ‘사람이 합리적이라고? 절대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라고 말하는 듯한 책이랄까. 따라서 “Irrationally yours’에서 ‘비합리적인 것’은 ‘당신’이라기 보다는 저자 자신이라고 보는 게 맞다. 따라서 “당신의 ‘비합리적인’ 친구로부터”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참고로 <왜 양말은 항상…>은 그저 그랬다. 차라리 <상식 밖의 경제학>이나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을 추천한다.

덧댐: 실제로 찾아보니 저자 서문의 마지막 문단에 “Irrationally yours”로 서명을 했다.

http://hankookilbo.com/v/0e58b3f5e2214a2a8497618fac5c8da7

연애시대, 만약에

Posted by on Jan 20,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나중에라도 나한테 말해줬으면… 다 지난 일이다. 그치?”

럭비공 튀듯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오래 전 드라마를 다시 돌려본다. “만약에” 다음의 “우리”는 슬프다. 미래에 대한 기대라 하더라도 깨어질 수밖에 없는 “만약”. 모든 연애의 시작은 이별의 시작. 어떤 이별은 또다른 연애의 시작. 볼때마다 달라지는 내용. 세상에 ‘다 아는 이야기’ 따위는, 세상에 “다 지난 이야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은호가 <고마워>를 부른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Posted by on Jan 19,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한편으로는 “억울하면 출세하고, 그때 가서 마음대로 해”라고 강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출세’의 가능성을 철저히 막아놓은 사회. 그 와중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평등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하는 이들에 대한 친절을 내팽개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아침.

분노와 무력에서 벗어날 수도, 희망을 섯불리 말할 수도 없는 피곤한 육신. 눈물 흘리며 상처 싸매주며 함께 걷는 이들을 떠올릴 밖에.

당연히 이기는 싸움은 없지.
당연히 싸워야 할 싸움 밖에는.

피붙이

Posted by on Jan 18, 2017 in 단상, 링크,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온 거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 뿐이다.” (장그래)

어제 동료 선생님 한분과 저녁을 먹다가 <미생>의 이 대사가 떠올랐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기약할 것 하나 없는 시대. 그렇게 망가진, 슬픔과 분노의 한국사회.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말하는 순간 거짓말장이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

사람들은 <미생>에서 장그래의 고군분투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로기사의 꿈을 버린, ‘학벌 딸리는’, 빽도 없고 꼼수도 부릴지 모르는, 목욕탕 바닥이 닳도록 밀고 냉동고에서 냉동 직전까지 우직하게 일하던 ‘미생’. 그가 극의 중심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오래 남아있는 건 회사를 찾아와 끈질기게 돈을 요구하던 퇴역군인 아버지를 맞는 안영이의 모습이다. 열심히 사는 것과는 아무 관계 없는, 끊어내지도 멀리하지도 못할 인연. 세상에서 가장 붙어 있기 싫은 피붙이.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이 가장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애증(愛憎)이 아니라 애증(哀憎)의 관계. 그렇게 슬퍼하고 증오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를. 가리워진 길을 더듬으며 함께 걸을 수 있는 좋은 친구 하나쯤은 곁에 둘 수 있기를.

모둠활동 그리고 신체간 상호작용

Posted by on Jan 15, 2017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모둠활동을 하면 어떤 면이 좋은가/안좋은가?” 라는 질문에 대해 “강의식 수업에서는 질문을 하면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말씀하시거나 칠판에 써서 설명을 해주시는데요. 모둠활동에서는 질문을 하면 (제가 있는 쪽으로) 와서 답을 해주셔서 좋아요”라고 답하는 학생. 수업을 단순히 정보의 교환 구조로 파악하지 않고 신체간의 상호작용(embodied interaction)으로 바라볼 때 꽤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비고츠키 관련 수업을 하면서 ZPD(근접발달영역, Zone of Proximal Development)가 뭔지 아냐고 물었을 때 “학생과 교사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더 잘 배운다, 그러니까 맨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답했던 학생이 떠오른다.

Acknowledgements

Obviously I love the acknowledgement section of a book most. If a book is a tree, its acknowledgement is roots that have nourished and grown it all along, through the tough times of droughts and storms. Although one may pass for an author of a book, it is always made possible by numerous people behind them, who shared their lives seeking neither fame nor credits. In this sense the acknowledgment section may be called ‘the hidden co-authors section.’

보내는 마음

Posted by on Jan 14, 2017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여행 후 새벽에 시도 때도 없이 깬다. 무려 보름째. 잠돌이의 삶에 천재지변급 사건이다. 처음에는 시차겠거니 했는데, 갈수록 시간의 흐름 때문이라는 확신이 든다. (‘나’로 시작하는 단어 슬쩍 피하기!) 희미한 육신으로 아침을 챙기고 사발 커피까지 들이킨 후 일과를 시작하는 때. 우습게도 스쳐간 잠의 환영들을 복기한다. 리듬이 바뀐 곡을 같은 속도로 연주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할 때, 아다지오도 아름답다고, 다시는 비바체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고 나 자신을 다독여야 할 때. 그리고 떠오른 느릿한 비가(悲歌).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