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그리고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Posted by on Feb 27,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요즘 곱씹는 배움의 세 요소: 1. 존재하는 것 (what it is). 2. 가능한 것 (what it can be).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이어주는 3.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what to love)”. 하지만 현실에서의 배움은 대부분 이미 정해진 사랑의 대상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일 뿐. “너는 뭘 사랑하는데?”라는 질문은 어떻게 던져야 하는 걸까. D-3

“고스펙 여성 눈 낮춰 결혼”

Posted by on Feb 27,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대책없는 저출산 대책안 中, “고스펙 여성 눈 낮춰 결혼”.

사람을 ‘고/저스펙’으로 나누는 꼬라지도, ‘눈 낮춰’라는 표현도 사라져야 한다. 사실 두 개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등급을 위아래로 나누니 눈도 낮추거나 높일 수 있는 것이니까. 결혼으로 맺어질 단 두 사람의 관계를 위계화할 수 있다면 직업도, 교육도, 학교도, 취미도, 지역도 위계화할 수 있겠지. 그렇게 사회의 모든 영역을 한 줄로 세우는 걸 ‘과학적’이라 착각하겠지.

안타까운 것은 그런 ‘위아래’가 이 사회를 망치고 출산율을 떨어뜨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관련정책을 만든다는 거다. 저출산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결과다. 공략해야 할 원인은 다른 데 있는데 출산율 자체를 문제로 삼는 일 자체가 넌센스란 말이다. 철저하게 시스템적으로 접근해도 모자랄 판에 개개인에게 돌파를 요구하는 정책이야말로 저출산의 근본원인 중 하나다.

정책제안을 한답시고 “Yes you can!”을 외치는 일은 더이상 없었으면 한다. 할 수 없으니 안하는 것이고, 먹고 살기 힘드니까 못하는 것 아닌가.

교실연구와 페이스북

Posted by on Feb 24,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교실연구를 하다 보면 카메라에 급속히 적응하는 학생들을 관찰하게 된다. 하루 이틀 정도는 카메라를 의식하는 듯 하다가 이내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 마음껏 떠들고 행동하는 것이다.

페북에서의 내 행동에서 비슷한 패턴을 발견하곤 한다. 지인 혹은 학생들과 친구를 맺으면 반나절 정도(그렇다 딱 반나절이다) ‘이제 좀 진지한 내용만 올려야겠군’이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본래의 모드로 돌아가 온갖 잡글을 쏟아내는 것이다.

교실에서 학생들의 자연스런 행동은 연구자인 나에게 더할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페북에서 나의 ‘자연스런’ 행동이 지인들이나 학생들에게 반가운 일인지는 모르겠다.

어제 오늘 몇몇 지인 및 학생들과 친구를 맺어서 이런 포스트를 쓰는 것, 맞다. 영어교육-응용언어학 분야에 있다 보니 관련글을 타고 오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반가운 마음에 몇자 적었다. 나에 대한 ‘너무 많은 정보(too much information)’에 관해 걱정하는 마음은 반나절 정도 갈 예정이다.

개강 한주 전, 짧은 소회

Posted by on Feb 23, 2017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1. 어제 밤, 처음으로 학생과 함께 쓴 논문의 최종교정지를 받았다. 같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그에게 깊이 고맙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지난한 과정을 함께할 수 있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길 바란다.)

2. 국내 논문임에도 해외 논문 출판에 드는 공력의 세 배는 넘게 들어갔다. 국내 저널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쉽지 않더라. 어떤 저널인가보다 어떤 심사자인가가 더욱 중요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분의 리뷰어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코멘트를 갈음한다.

3.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가 한 번 남았다. 시간강사의 밥벌이로 시작한 면이 없진 않지만, 글쓰기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퍽 즐겁다. ‘방학 때 보자’며 공수표를 날렸던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번 강의가 맺어준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기로 한다.

4. 지난 학기에는 강의를 좀더 하고 싶었으나 못했고, 이번 학기는 적정수의 강의보다 더 많이 들어왔다. NO라고 하는 순간 더 이상의 제안이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의욕도 궁핍도 체력 혹은 노화를 이길 수는 없다. 먹고 사는 것도 살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5. 새로운 학기, 강사생활 이래 가장 바쁜 스케줄이다. 걷기와 심호흡의 생활화가 필요하다. 패닉금지!

6. 탄핵요구를 위한 집회는 속히 마무리되었으면 한다. 새로운, 좀더 근본적인 시작이 필요한 시점 아닌가. 땅을 갈아엎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데 쓰러져가는 건물 금에 청테이프 붙이는 소리 하는 사람들이 적잖아 보인다.

7. 이젠 교실 밖에서의 삶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2017년이 삶의 분수령이 될지도 모르겠다.

길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방학의 끝.
짧지만 선명하게 기억될 만남의 시작.

정확함과 적확함

Posted by on Feb 23,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정확함이 문법적인 개념이라면 적확함은 담화적 개념이다. 전자가 단어들의 연결과 관련되어 있다면, 후자는 말이 점하는 위치, 그에 따른 효과와 관련되어 있다. 정확함이 관습을 따르는 데에서 나온다면 적확함은 관습의 갭을 메우는 데서 나온다. 정확함이 텍스트적이고 공시적이라면 적확함은 컨텍스트적이며 통시적이다. 적확한 언어는 특정 시공간의 의미를 오롯이 드러내고, 대화의 주체들은 이전과 같을 수 없는 담화의 세계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말은 소통의 도구이자 갈등의 씨앗

‘쓰는 용어가 달라서’ 소통이 안되는 상황보다 ‘(같은) 용어를 다르게 써서’ 소통이 안되는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전자는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의 문제지만, 후자는 체화된 의미들이 충돌하는 문제랄까. 그런 의미에서 “그 동네는 그런 말들을 주로 쓴다더라”와 “도대체 이 말을 왜 그따위로 쓰는 거냐”의 차이는 사뭇 클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성경을 보면서 철저히 보수적인 기복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과 급진적 사회변혁을 추구하게 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같은 말로 소통하기’의 불가능성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ANOVA

“느낌적 느낌” 소고

Posted by on Feb 21,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20세기 후반 심리학사의 주요 개념 중 하나로 John H. Flavell 등에 의해 명명된 상위인지(metacognition)가 있는데, meta와 cognition이 합쳐진 말로 메타+사고로 분석된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단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듯이 ‘meta-‘는 ‘위에 존재한다’는 의미. 따라서 메타인지는 생각 위의 생각, 생각을 재료로 하는 생각, 생각을 하위요소로 거느리는 생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내용을 배우는 과정에서 한 생각을 복기하고, 이들 생각의 관계나 구조를 분석해 낸다면 일종의 메타인지 과업을 수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자주 보이는 “느낌적 느낌”이란 말도 있다. 말 그대로 풀어보자면 뭔가 느껴지는데, 이게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느낀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메타-인지가 아니라 메타-정서에 가깝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메타-정서의 대상이 되는 느낌이 상위의 정서에 의해 완벽히 포섭되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적(的)’이라는 접미사가 이와 같은 의미를 표현해 내고 있다. 논리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이 또한 생각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느낌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고, 그나마 딱 느낌이라고 부르긴 좀 그런, 느낌 비스무레한 거라는 말이다.

정리하면 ‘느낌적 느낌’은 (1) 뭔가 느껴지긴 하는데, (2) 느낌이 있다는 걸 안다기 보다는 느끼고 있으며, (3) 그 느낌 마저 ‘느낌的’이어서 손에서 스르르 흘러내리는 모래와도 같이 붙잡을 수 없다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별 쓰잘데기 없는 내용 같지만 살면서 타인에 대한 메타인지 혹은 메타정서가 강렬하고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가족간의 관계에서 상대의 기분이나 생각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살아야 하니 말이다. 실제 학술용어로 meta-emotion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감정을 의미하는데, 주로 부모들의 정서와 관련되어 논의되어 왔다고 한다. (아래 위키 문서 참고)

또한 이 둘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연애를 하다가 ‘차인’ 사람들이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자신의 감정, 상대방의 생각에 대한 자신의 생각, 그런 감정이나 생각에 휩싸인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과 감정 등으로 (생각+느낌)의 세제곱, 네제곱, 수십제곱, 수억제곱의 미궁에 빠져들어 폐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써놓고 보니 이 모든 이야기가 아무 영양가도 없을 거라는 느낌적 느낌이 강하게 든다. 느낌적 느낌이 ‘강하다’ 표현했으니 이는 메타정서 위에 존재하는 상위인지라고 할 수 있으려나?

https://en.wikipedia.org/wiki/Meta-emotion

 

3X3X3 공부모임

Posted by on Feb 20,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3X3X3
십 년 남짓 생각만 하다가 실행해 보지 못한 공부모임. 인접학문 분야의 연구자 3명이 3시간 동안 3편의 논문을 읽고 나눈다. (40분 각자 읽고 정리 + 5분 프리젠테이션 + 5분 휴식)*3 포맷. 가르치는 일 시작하고 가장 바쁠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학기에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나의 실행력은 제로로 수렴하고, 주변 사람들의 분주함은 무한대로 발산하는 상황에서 다시 방학을 바라보지만, 실상 방학이 더 바쁘다는 게 함정.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

Posted by on Feb 17,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 오토 크루제

영어로 논문쓰기 첫 번째 수업. “논문은 ‘짠’ 하고 독자를 놀래키기 위해 골방에서 완벽을 기하는 글이 아니라 다양한 소통을 통해 공개적으로 약점을 보완해 가는 글”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나의 글쓰기 여정에서 가장 뼈아픈 실수를 지적한 대목이기에 거듭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누군가 논문쓰기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논문을 혼자 쓴다고 생각하는 마인드에서 벗어나 대화로서의 글쓰기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해주겠다. 오토 크루제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텍스트를 제출하는 데 문제를 갖고 있기에 텍스트를 계속해서 완전하게 만들려고 한다.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약점을 은폐하는 대신에 (그것에 대해) 묻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에 따라 논리적으로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김기란. (2016). <논문의 힘> 현실문화, 35쪽. 오토 크루제, <공포를 날려버리는 학술적 글쓰기 방법> 김종영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9 18쪽에서 재인용)

나 또한 이번 강의를 통해서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의 약점을 공개적으로 생각해 보고 있는데, 세 가지 면에서 부족함을 느낀다. (1) 10주 내외의 분량을 4주에 다루는 게 쉽지 않고, (2) 충분한 실습을 할 수 없으며, (3) 다양한 전공영역의 필요를 채우기 어렵다. 어떻게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까? 남은 2주간 수강하는 분들의 이야기도 좀더 들어봐야겠다.

대화분석

Posted by on Feb 16,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대화분석(conversation analysis)의 등장은 담화연구에 있어 현미경의 발명과 비슷한 효과를 가져왔다. 말이 얹혀지는 시간을 아주 길~~~게 늘여보면 대화는 오고 가는 정보라기 보다는 함께 만들고 치고 빠지고 뒤틀고 넘어지고 허물고 다시 짓는 춤이다. 현미경 밑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세계처럼 전사를 통해 본 말들은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절묘하게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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