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육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쪽글 두 개

무식하면 용감하다. 12년 전 직장생활 중 석사과정을 돌아보며 쓴 아래 두 쪽글에도 그런 무모함이 배어나온다. 삐뚤빼뚤 어줍잖은 논리를 겨우 겨우 엮은 글. 하지만 여전히 쓰린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영어교육은 인간의 노력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힘으로 해체당할 운명을 맞을 지도 모른다. 이제 ‘세대’와 같은 커다란 말 보다는 옹기종기 모여 함께 일할 수 있는 작은 손들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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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학 4세대를 말한다.

더미 Inchull Jang 의 논의에 대한 답글

영어교육과에서 새로운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의제들이 가이아를 비롯한 이런 저런 사람들에 의해서 논의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1. 현장중심 리서치 – action research라고 불리는 연구방법론을 넘어서 교사집단과 연구자집단의 관계설정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 교육 전반에 있어서 현장과 학계가 유리되어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모색. 현장과 이론의 분리를 해소하기.

2. 사회과학적/인문학적 연구방법론 – 교육학, 심리학, 언어학의 세례를 받은 영어교육을 좀더 거시적인 방법에서 보려는 시도.

3. 영어교육학의 사회적 책무 – 연구와 집필 활동이 한국 영어교육에 실질적으로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가의 문제. 결국 사회적 효용성의 문제들. 이와 관련해서는 영어교육 전문가들이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고 포지셔닝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됨.

4. 서구 중심의 이론 경향 극복 – 한국에서, 한국인을 데이터로 한, 한국적 상황에 맞는 연구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서구중심의 언어교육 이론을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 질적 연구방법론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있는 부분.

5. 대중적 담론 공간 형성: 학계와 현장, 학부모들, 사교육계로 나누어져 있는 영어교육 담론 체계를 어떻게 통합해 나갈 것인가. 충돌과 화해의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런 것들이 주요한 고민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 분야에서 이런 논의들은 이루어져 왔지만 영어교육 분야에서 고유한 역학관계와 학문적 특성을 고려한 시도는 부족한 듯하다.

앞으로 더미와 함께 좀더 논의해 봐야 할 주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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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학 4세대를 말한다 (2)

더미의 글에 따르면 짧디 짧은 한국 영어교육은 다음 세 세대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흐름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1. 언어학적 기반에서 한국 영어교육의 기초를 정초한 1세대,
2. CLT의 세례를 받아 언어학과 심리학적인 기반 위에서 영어교육 만의 독자적인 흐름을 만들고자했던 2세대.
3. 다양한 영어교육의 성과를 이어받아 보다 세분화되고 비판적인 연구를 하는 3세대.

영어교육 4세대에 대한 논의는 암묵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필자와 같이 아직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거창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무식한 사람이 가끔 사회에 도움이 되는 법도 있지 않은가? ㅋㅋ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꾸준히 4세대 영어교육의 방향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볼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전글의 논의와 함께 4세대 영어교육의 특징을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해 보려고 한다.

하나. 데이터 중심 영어교육

영어교육에서의 논의와 연구들은 ‘서양적 틀’을 가지고 ‘한국적 상황’에 대입해 보는 쪽에 무게를 두어왔다. 예를 들어 CLT라는 트렌드가 생겼을 때 “CLT 모델에 대한 연구”라든지 “CLT에 대한 교사들의 태도”라든지 하는 식의 연구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 제시된 프레임웤을 한국적 상황에 맞춰보고자 하는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우리 한국의 학습자들이 과연 영어교육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영어를 왜 배워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지, 실제 영어교육 시장의 트렌드는 어떤지, 각 출판사와 학원, 교사들이 영어교육에 대해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언어의 4기능별로 어떤 학습법이 통용되고 있는지, 영어학습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들의 시장전략은 무엇인지, 영어교육은 어떤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고 있고 각각의 미디어는 어떤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지, 한국에서 영어교재를 개발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려운 점은 무엇인지, 영어교육 전문가 직업군 별로 어떤 관점에서 영어교육을 바라보고 있는지, 영어교육에 있어서 유의미한 데이터들은 어떻게 생성, 분배, 소비되고 있는지, 영어교육에 대한 비판적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또 어떻게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토익과 토플 중심의 평가가 한국 영어교육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영어마을과 어학연수는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한국의 ESL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영어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당사자들간에 정보의 갭은 없는지, 영어 교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학원과 학교, 공교육과 사교육의 양태는 어떠한지…

이 모든 것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한 관찰을 통해서 ‘이론 중심’이 아니라 ‘데이터 중심’의 영어교육으로 진화해야 할 것이다.

둘. 삶을 가로지르는 영어교육

(삶을 가로지르는 영어교육은 더미의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삶을 가로지르는 영어교육이 가지는 문제의식은 기존의 영어교육의 학문적 성격이 언어학, 교육학, 심리학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이제는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방법론과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언어철학, 비판이론, 미디어 연구, 영어교육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영화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교육공학 등의 성과들이 언어교육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선언적 의미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영어가 특권계층의 전유물로 인식되었을 때와 모두의 관심이 되었을 때, 영어가 텍스트 중심으로 ‘전달’되었을 때와 멀티미디어 중심으로 ‘학습’될 때, 오프라인에서의 언어교육이 대세였을 때와 웹을 통한 IT적 전달방식을 취하였을 때… 이 모든 변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연관 학문과의 소통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밖에 없다.

이들 논의는 ‘영어교육학자의 정체성’ 문제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기존의 영어교육학자들이 가진 정체성이 ‘심리학자’, ‘교육학자’, ‘(응용)언어학자’등으로 대변된다면 이제는 좀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오늘 아침 생각나는 영어교육학 4세대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늘어놓아 보았다.

(2005년 어느 날)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한 택시 기사와의 대화

Posted by on Feb 14, 2017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하루를 완벽하게 마무리해 준 건 손님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한 택시기사와의 대화였다.

종각에서 집까지 오는 길, 오랜만에 택시를 탔다.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택시기사는 30초 쯤 이메일을 읽고 고개를 든 내게 대뜸 질문을 던졌다.

“울랄라 세션 임윤택 씨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들으셨어요?”
“네. 들었어요. 안타깝죠.”
“네. 정말 슬프더라구요. 대단한 뮤지션이었는데. 사실 병세 악화 기사 같은 것도 안떠서 괜찮은가보다 했는데… 너무 아깝죠?”
“네. 음악 참 좋았었는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잠시 침묵.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수퍼스타 K 나왔을 때 정말 대단했었거든요. 아마추어라 믿을 수 없었죠.”
“네… 그런데 너무 쓸쓸히 갔네요. 그렇게 사랑받던 분이 가니 더 쓸쓸한 거 같아요. 무엇보다 너무 젊죠.”
“네. 유재하도 김광석도 그렇게 너무 일찍 갔죠. 휴우…”
“그렇죠.”

그의 한숨에선 진짜 “휴우” 소리가 났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 좋아하던 뮤지션의 죽음에 대해 깊이 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그래도 김광석씨는 돌아가시기 전에 한 20분 정도 일대 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운이 좋았죠. 그때 롯데월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거든요. 조인트 콘서트를 했는데 김광석, 장혜진, 이오공감이 같이 왔어요. 김광석씨 부인되시는 분이랑 같이 오셨는데… 준비 다 하시고 시간이 좀 남아서 무대 뒤에서 이십 분 쯤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돌아가셨죠. 도저히 믿기질 않았어요.”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땐 라디오를 끼고 살았어요. 좋아하던 가수가 많은데, 김광석 유재하는 당연히 좋아하고요. 동물원을 정말 좋아했어요. 1집과 5-1, 5-2를 특히 좋아했죠. <주말 보내기> 같은 노래 참 특이하고 좋았는데.”

나도 맞장구를 쳤다.

“동물원 좋죠. 저도 참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저랑 듣고 자란 음악이 비슷하네요. <잊혀지는 것> 너무 좋지 않나요?”

“아, 진짜 좋죠. (이 아저씨, 이제 아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랑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정말 좋아요. 다른 멤버들 노래도 좋지만 저는 김창기씨 노래가 제일 좋아요. 혹시 우리노래 전시회에 실렸던, (나와 거의 동시에!)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아, 아시네요? (함께) ㅎㅎㅎㅎㅎ”

이 분, 음악을 나보다 더 진지하게 좋아하신다. DJ를 하면서 노래까지 불러주시고! 예전 뮤지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듀스, 이소라, 조동익, 이소라… ‘모래시계’로 활동했던 천성일과 정연준이 노이즈와 업타운으로 활동했던 이야기. 김창기의 노래들에 나오는 ‘그녀’는 오로지 한 사람이라는 것. 김광진의 편지 뒷이야기. 내리기 바로 전 그가 내게 건넨 이야기는 김현철 1집 이야기였다.

“김현철 1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형>이예요. 그게 조동익을 생각하면서 썼다는 거 아세요?”

아쉽게도 목적지에 다 왔다. 택시 기사랑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내리길 주저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아, 저 메타기 끄고 저랑 음악 이야기 좀더 하시면 안될까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ㅠㅠ

“아 그랬군요. 그게 조동익이었군요. 근데 저 앞에서 세워주세요.”

“네. (차를 댄다.) 여기에서 세워드리면 되나요?”

“네네.” (사실 조금 더 왔다. ㅠㅠ)

내릴 때 택시 운전 기사 아저씨가 인사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도 밝게 인사한다. 생각 같아서는 하이파이브라도 하고 싶지만 그냥 인사로.
“이렇게 재미있게 택시타고 오긴 처음이네요. 기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네네. 안녕히 가세요.”

택시에서 내려 중얼거린다.

“<형>은 저도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제가 살면서 정말 힘들고 지쳤을 때 막내 동생의 피아노 반주에 둘째가 불러준 노래거든요. 들으며 눈물을 펑펑 흘렸죠.”

그와 내가 좋아하는 김창기의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와 김현철의 <형>을 듣는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김창기의 노래를 불러주던 또래 택시기사. 마음 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2013.2.14.

인간이 존엄하다 해서 생각이 다 존엄한 것은 아니다

Posted by on Feb 13,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슬프게도/열받게도/비극적이게도/짜증나게도/어이없게도 온라인에서 가장 널리 퍼지는 이야기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존엄하다 해서 생각이 다 존엄한 것은 아니다’란 말을 새삼 되뇌는 날들이네요.

한편으로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내지르는 성향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자신감을 훌쩍 넘어서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완벽히 몰입하는 성향 말입니다. 무서운 건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그들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은 꽤 큰 무리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네트워크는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LIKE의 경제학은 호/불호의 이분법으로 작동하지요.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다 보면 ‘불경어수 경어인(不鏡於水 鏡於人)’ 즉, 거울이 아닌 사람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는 묵자의 말도 쓸모가 없어집니다. 목소리를 왜 높여야 하는지 성찰하지 않는 이들에게 높은 목소리만 남은 건 아닐까, 하는 씁쓸함으로 한 주를 맞습니다.

노획물 같은 공부

교수들의 삶도 대학원생들의 삶도 너무 복잡해 보인다. 읽고 생각하고 실험하고 토론하고 논쟁하고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이런 삶을 그리기엔 ‘잡일’이 너무 많은 거다. 개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푸념일 뿐이라 생각하기엔 정말 일이 많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진짜 모르겠어’라는 말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 이 와중에서도 잘해내는 사람들 안보여?’라고 대답하는 듯한 시대가 참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고 있다. 스러지는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승리한 자들의 노획물 같은 공부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반성(reflection)을 통한 발달

Posted by on Feb 9, 2017 in 강의노트, 과학, 수업자료 | No Comments

예술 및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공은 타직군에서 일하는 것보다 오랜 기간 강도 높은 훈련을 요구한다. 재능의 비중도 더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천재들의 신화,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탄생한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거다.

하지만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들이 갖는 ‘무기’는 명확하다. 바로 자신의 수행(performance)을 끊임없이 모니터해야만 하며, 이러한 돌아봄(reflection)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동작을 살피지 않는 무용가, 연기를 복기하지 않는 배우, 자세를 교정하지 않는 역도 선수, 연주를 녹음해 보지 않은 피아니스트가 높은 수준에 이르긴 불가능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반성을 한다는 사실이라기 보다는 반성의 구체적인 방식이다. 잠자리에 들며 천장을 보고 중얼거리거나 꾸준히 일기를 쓰는 일과 같이 주관성이 높은 도구가 아니라, 자세, 동작, 표정, 움직임 및 소리를 정확히 재현하는 도구들이 동원된다는 점 말이다.

일기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감정을 추스리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실제 퍼포먼스를 되살리는 데 역부족이다. 오디오로 따지면 초저충실도(super low fidelity)라고 해야 할까. 이 점에서 현재로서는 비디오가 가장 좋은 미디어라 할 수 있다. 특정 각도에서 촬영한 비디오의 한계가 있지만, 실제 일어났던 일을 가장 풍부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기록방식을 압도하는 충실도를 보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전문가의 식견이다. 같은 비디오라 해서 모두에게 같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경험과 지식의 깊이만큼 더 풍부한 정보와 함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무용가가 보는 무용 비디오와 필자가 보는 무용 비디오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다. ‘이거 내 목소리 아닌 거 같아’라면서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필자도 가끔 강의를 녹음해서 듣곤 하는데 솔직히 들어주기 힘들다. 더 잘하기 위해서는 강의 전체를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디로 숨고 싶은 마음을 몇 시간 동안 견뎌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벌써 목요일이고 모레면 2강 수업이다. 준비를 하다 보면 온갖 잡생각이 떠오른다. 이 글도 참으로 두서없구나.

시의 정의: 응집과 결속의 관점에서

시를 언어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야콥슨 이후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려고 애썼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무소용 정의를 하나 더하자면 이렇다.

“시란 응집cohesion과 결속성cohesion의 비틀기, 혹은 새로운 창조다.”

증거 그리고 흔적

Posted by on Feb 9,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다 말할 수 없다는 제약에서 해야 할 말만 해야 한다는 필요가 생긴다. 해야 할 말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1) 말을 고르는 일 (2) 말을 버리는 일. 이 둘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데, 특정한 말을 고른다는 것은 다른 말을 버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텍스트는 쓰여진 증거임과 동시에 지워진 흔적이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인간은 삶의 증거이자 살 수 없었던 생의 흔적이다.

“공동체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재정립하는 글쓰기 교육

교육과정에서 쓰기는 말하기와 함께 “표현기능”으로 분류됩니다. 사고가 외부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밀어내기(ex-pression)’라고 보는 것이죠. 하지만 쓰기, 그 중에서도 학술적 글쓰기는 흔히 말하는 <경청의 기술>을 가르치는 데 매우 효율적인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글쓰기 전문가들은 학술적 글쓰기를 설명할 때 “대화에 참여하기”(join the conversation)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학술적 글쓰기가 대화를 새로 시작한다기 보다는 기존의 대화에 끼어드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잘 끼어들기 위한 지름길 같은 건 없습니다. 지식과 견문이 탁월하다 해도 일단 유심히 들어야만 대화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적재 적소에 필요한 말을 보태려면 대화의 소재, 길이, 흐름, 규칙, 전개방향, 형식, 대화자들의 성향, 유머 코드, 격식의 수준 등에 대해 민감해야 하죠. ‘있어보이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도 조심해야 하구요.

이런 면에서 글쓰기는 단지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공동체의 생각을 경청하고 종합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을 대치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대화의 흐름 속에 나의 자리를 잡는 과정, 담론과 논쟁에 내 작은 목소리 하나 더하는 행위인 것이죠. 사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영화배우들이 수상 소감에서 하는 말처럼 “저는 한 거 없습니다. 그냥 다 차려진 밥상에 밥숟가락 하나 놨을 뿐이죠. 여러 동료 연구자, 작가분들 참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구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다 보면 내 지식이 참 작고 보잘것 없다는 것을 금새 깨닫습니다. 글쓰기 공부를 통해 배운 건 글쓰기의 본령이 개인의 독창적 표현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각과 내 생각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재정립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글쓰기는 경청과 겸손을 가르치는 데 참 좋은 도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밀도 높은 말들

Posted by on Feb 9, 2017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이전에도 여러 사람들이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했지만) 우드로 윌슨은 “10분 연설이라면, 한 주의 준비해야 한다. 15분이라면 3일 쯤 필요하다. 1시간이 주어진다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요즘 이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묵직한 말’에 스며든 시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밀도 높은 말들은 중력이 세다.

똑똑한 아줌마

Posted by on Feb 8,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전화를 받자 마자 대뜸 날아온 질문.

“우야, 포켓몬이 뭐냐?”
“네? 왠일로 ㅎㅎㅎㅎㅎㅎㅎ”
“지난 번에 욱이 집에 갔을 때 본 거냐?”
“네. 애들이 카드 모으는 거, 그게 포켓몬이예요.”
“그니까 그 노란 색으로 된 거 병아린지 토낀지 그거 말하는 건가?”
“아 그건 피카츄구요. 그게 포켓몬이라는 데 나오는 엄청 많은 캐릭터 중에 하나예요. 원래 만화였어요.”
“아 엄청 많은 거야? 그게 속초에서만 되다가 이제 다 되는 거 그거지?”
“네네. 처음에는 속초에서만 게임이 되어서 사람들 엄청 갔었죠. 이젠 전국 다 돼요.”
“전에 그거 그린 사람 이야기 했잖아. 다시 한번 해봐. 뭐, 몸이 안좋았다고?”
“네네. 몸이 안좋았고, 되게 내성적인 사람이었는데, 자연하고 친했대요. 곤충같은 것도 많이 보러 다니고… 근데 곤충이나 동물하고 논 경험을 가지고 별별 특이한 애들을 그린 거죠. 신기한 것들.”
“혼자 놀다가 그런 데 빠진 건가?”
“그런 거 같아요. 근데 자기가 그렇게 살다 보니 다른 사람도 이런 걸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 같아요. 재밌으니까.”
“그러게 난리더라. 어젠 보니까 최순실 뉴스보다 더 많이 나와.”
“그렇게 많이 나왔어요?”
“채널 돌릴 때마다 나와서 놀랐네. 근데 사고 위험도 높다면서? 잘못하다 큰일나겠더라.”
“조심해야죠. 근데 저는 안해요. ㅎㅎ”
“그래? 하지 마라. 재미는 있나 모르겠는데… 운전하다가 그거 하는 사람들 너무 위험해 보이더라. 운전할 때는 못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게임만 콕 집어서 못하게 하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런가? 아무튼 운전할 땐 안해야지.”
“그래야죠.”
“이거 저거 너무 많이 물어봤나?”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포켓몬고가 유행은 유행인가 봐요. 어머니까지 질문을 다 하시고.”
“아 자식들하고 같이 살았을 때는 똑똑한 아줌마였는데, 따로 산 지 좀 됐더니 무식해졌네.”
“뭐 몰라도 되는 건데요…”
“그래도…”

 

===

전화를 끊었다.

“자식들하고 같이 살 땐 똑똑한 아줌마였는데”라는 말이 마음을 자꾸 찔러댔다. 어차피 같이 살 것도 아니면서 뭐가 그리 아프냐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뉴스에서 ‘보라매공원이 포켓몬고의 ‘성지’가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날이 따뜻해지면 어머니가 또 한 마디 하실 것 같다.

‘그게 뭐라고 공원에 사람이 미어 터지냐.’

20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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