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게 좋아 교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Posted by on Mar 30,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모둠활동과 또래교수(peer teaching)를 자주 경험하는 학생들에게서 “가르치는 게 재미있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방학이나 정년 보장 등의 외적 요인이 아니라 “실제로 친구들을 가르쳐보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게 즐거우면 교사를 하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사회는 불행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어디에나 일어난다. 망하지 않는 사회의 기본 조건이 시간과 장소에 관계 없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가르침/배움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교사”나 “학생”으로 불리지 않더라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사회라야 희망이 있다.

학교 담장 안에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으로서, 공교육체제 하에서의 선생과 학생의 중요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교육의 문제를 교육계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회는 기만적이며, 교육을 위해 오로지 교육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편협하다.

진짜 가르치는 게 재미있나? 그렇다면 배움도 재미있을 공산이 크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재미있나?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을 해도 잘 해낼 잠재력을 가진 것이다. ‘성공할 것’이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선생의 길 말고도 수많은 가르침의 길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편재[遍在]한다. 결코 교육계라는 곳에 편재[偏在]하지 않는다. 교사가 되어 가르치는 일은 멋지다. 하지만 교사보다 더 멋진 ‘교육자’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민주 Democracy – 피아노 연주

Posted by on Mar 30, 2017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한 친구의 기억이 예전 연주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각자의 기억이 소중한만큼 서로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가치있다는 믿음. 그것이 민주의 가치 아닐까.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 산다는 일 고달프고 답답해도
네가 있는 곳 찬란하게 빛나고 네가 가는 길 환하게 밝았다

너는 불꽃 불꽃이었다 갈수록 어두운 세-월
스러지는 불길에 새불 부르고 언덕에 온고을에 불을 질렀다.

너는 바람 바람이었다 거센 꽃바람이었다
꽃바람 타고오는 아우성이었다 아우성속에 햇살 불꽃이었다

너는 바람 불꽃 햇살 우리들 어둔삶에 빛던지고
스러지려는 불길에 새불 부르는
불꽃이다 바람이다 아우성이다
불꽃이다 바람이다 아우성이다”


대선 단상

Posted by on Mar 27,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누군가를 열렬히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에 관심없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만으로 정치적 공헌을 하는 것도 아니다.

2. 카리스마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차이는 단지 선거전략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권력 전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인한다.

3. 선거는 사람을 뽑는 과정이다. 당연히 특정 인물에 대한 지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인물이 만들어 낼 시스템에 대한 엄밀한 검토 위에서만 유효하다. 선거는 인물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 시스템을 위한 인물을 선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4. 서로 박터지게 싸우지 않는 것도 좋지만, 박터지게 싸우면서도 뭔가 근사한 걸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좋다. 유권자들은 허허실실 웃는 모습이 아니라 진짜 실력을 보여주는 세력을 신뢰하게 되어 있다.

5. 막말을 하지 말자며 막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 보인다. 때로는 어조(tone)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6. 이 정도 조건이면 좀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제안들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니 나와야만 하는 것 아닐까. 대한민국 시민들이 고작 이거 보자고 긴긴 겨울을 악물고 버텼나.

7. 5월 9일 이후의 정치에서 민주주의는 좀더 강해질 수 있을까? ‘좀더 기다려’라는 대답만을 들어왔던 이들이 웃으면서 뛰쳐나올 수 있을까?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까?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평등과 편견에 맞선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더 또렷한 목소리를 얻게 될까? 갈곳도 없이 망가지는 몸을 눈물 흘리며 볼 수 밖에 없는 노인들은 희미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을까?

우린 과연 다 가진자들의 놀이동산 같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억눌렸던 목소리들의 우렁찬 함성같은 민주주의를 만날 수 있을까?

8. 선거,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세계로의 관문일 뿐이다. 이 문이 180도 회전문이 되질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겠느냐만 함께 걷는 이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나날이다.

간단한 독서지도 팁

읽기 활동에서 널리 사용되는 <연결하기(making connections)> 전략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텍스트와 자기 연결하기: 텍스트에 나와 있는 요소들과 자신(친구, 가족, 학교)을 연결한다. (Text & Me)

텍스트의 인물, 소재, 단어, 내용, 삽화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의 수준에 따라 “뭐가 떠오르니?”라고 추상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고, 그래픽 오거나이저를 통해 특정 텍스트와 자기 자신을 비교/대조 하도록 할 수도 있다. 텍스트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다양한 시도는 텍스트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텍스트와 텍스트 연결하기: 텍스트 내/외의 요소간에 연결점 찾기 (Text & Text)

(1) 텍스트 내의 요소들을 연결하기: 텍스트 내의 어떤 요소들이건 연결해 본다. 단어와 단어, 단어와 그림, 글과 제목 등등을 연결할 수 있다. 문법적 요소를 가지고 대명사나 관사 등을 앞의 명사와 연결시키는 활동을 할 수도 있다. 특정 등장인물의 대사만을 모아서 볼 수도 있다. 인물간의 관계도를 그리거나, 인물들간의 관계를 페이스북 ‘좋아요/싫어요/화나요’로 표현할 수도 있다.

(2)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연결하기: 특정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들을 비교, 대조, 연결하는 작업이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여러 개 읽었다면 두세 작품을 놓고 ‘비교/대조형 독후감’을 쓰게 한다. 비슷한 소재의 글을 읽은 바가 있다면 두 글을 종합할 수도 있다. 자신이 썼던 일기 여러 개를 재료로 하여 자주 사용하는 단어, 기분을 나타내는 표현, 의성어와 의태어 등을 찾아보라고 할 수도 있다.

3. 텍스트와 세계 연결하기 (Text and the World)

(1) 세계에 비추어 텍스트 이해하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와 텍스트 내에서 그려진 세계를 비교해 본다. 특정 캐릭터나 사건의 개연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텍스트 내의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반응이나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다.

(2) 세계에 비추어 텍스트 비판하기: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텍스트를 비판해 본다. 텍스트가 왜곡하거나 숨기는 것은 없는가? 우리나라라면 어떨까? 우리 동네라면?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라면 비슷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이와 같이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 사회, 그리고 다른 텍스트들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나아가 이를 쓰기로 연결하는 활동을 고안해 보자.

#3년전오늘 #재방송

‘우리말’ 단상

Posted by on Mar 22,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우리말 진짜 잘하시네요.” vs. 언어의 소유권 (ownership of language)

한 영국인이 언급한 ‘우리’의 ‘기분나쁜’ 용례다. 오랜 한국 생활로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 영국인은 때때로 이 말을 듣는다. “어? 우리말 진짜 잘하시네요.”

저 말을 하는 입장에서 “우리말”은 “한국어”와 같다. 하지만 듣는이의 입장에서 “한국어”와 “우리말”이 같을 리 없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본다. 어쩌다가 영어가 술술 나왔을 때 영국인이 내게 “You speak our language very well.”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영어가 왜 니꺼야?’까지 미치진 않더라도, 썩 기분 좋은 칭찬은 아닐 듯하다.

중요한 건 저 영국인이 한국어의 ‘우리’ 사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말”이란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긴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어의 ‘우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우리”라고 말하는 순간 “너희”가 생기고, “우리말”이라고 하는 순간 “너희말은 아닌 말”이 ‘태어난다’. ‘우리’라는 표현에 대한 반응은 숙고를 거치지 않은 날것이다.

“우리말”이라는 표현에는 언어의 소유권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다. 말은 누구의 것인가? 한국어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의 것인가? 영어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의 국적을 가진 이들의 것인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소유권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셈이 된다. 네이티브 스피커가 그 언어의 주인이라는 관점은 과연 적법한가?

그 영국인은 우리은행에는 안간다고 했다. 이름을 My bank 정도로 고쳐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간강사

Posted by on Mar 22,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n. 아는 척 하느라 엄청 바쁘고, 바쁜 척 하다가 좀 알게 되는데, 그땐 또 잘 모르는 걸 가르쳐야 하는 사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한국식 억양의 좋은 점(?)

내 영어에는 한국어 악센트가 짙게 배어 있다. 중학교 입학 직전 영어를 처음 접했고 중고등학교 내내 영어를 글로 배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테이프 속 낯선 외국인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 대해 가졌던 반감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돌아보면 ‘열심히 따라했어도 한국 억양을 없애진 못했을텐데’라는 생각과 ‘내 일 할 만큼 하면 됐지’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소위 ‘국내파’였지만 영어에 상당한 소질을 보였던 학생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어에 재미를 붙여 꾸준히 공부했고, 영어로 된 책을 스스로 찾아가며 읽었다. 주변 사람들 눈에도 빼어난 언어습득 능력이었다. 그의 영어사랑은 부모님마저 감동시켰고, 중학교 어느 여름 방학에 한 미국 ‘명문대’의 영어캠프에 갈 기회까지 얻었다.

수업이 시작된 지 며칠, 한 교수가 영어공부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을 풀어주려 개별 면담을 진행하였다. 교수는 영어공부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을 물었고 학생은 주저없이 ‘한국식 억양이요!’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깜짝 놀라며 “너의 발음을 명료하고 알아듣기 쉬워. 한국어 억양이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미미할 뿐더러 소통에 전혀 지장이 되지 않아. 오히려 너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강점으로 생각될 정도인데?”라고 답했다.

아 어떤 게 맞는 길일까. 고민을 풀기 위해 상담을 신청했으나 학생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후 발음에 대한 고민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영어공부의 큰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의사소통의 민족지학 전문가인 사빌-트로이케에 따르면 비원어민 화자는 ‘너무 원어민같은’ 발음을 따라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기도 한다.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할 경우 원어민과 같은 언어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며, 맥락에 따라 적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화용(pragmatics)능력을 비롯하여 해당 언어/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높은 기준의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발음만 좋은’ 혹은 ‘발음은 좋은데’라며 타인의 외국어능력을 평가하는 장면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r/의 원활한(?) 발음을 위해 혀 밑둥을 절개하는 야만적 수술 행태는 사라진 듯하지만 여전히 ‘원어민 발음(native pronunciation)’의 신화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언어학습에서 좋은 발음을 위한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스스로 불가능한 기준을 만들고 괴로워하거나,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깔보거나, ‘좋은 발음’ 이면의 부담을 간과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내 영어에 배어든 한국어 억양은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그저 나라는 존재의 일부일 뿐이다. 태어나고 자란 삶의 터전, 나를 키워낸 이들과 소통하며 미세하게 조정된 안면 근육과 구강 구조, 한국어에 최적화된 뇌구조와 기능 등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수업스케치

<종이찢기>

“학원은 어때요?”
“그냥 똑같애요. 아 얼마 안 있다가 또 시험대비 한대요.”
“아 빠르네요. 시험 때 학원 가서 공부하는 거랑 집에서 하는 거랑 어떤 게 더 나은 거 같아요?”
“음… 집은 공부하는 데가 아니예요. 학원 안가면 카페같은 데 가서 있고 그래요.”
“ㅎㅎㅎ 그렇죠.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집에서 잘 노나 봐요.”
“특별히 할 거는 없는데 그냥 이것 저것 하고 놀아요.”
“시험 때는 더 놀고 싶죠? 저도 대학교 때 시험공부 하려고 하면 평소 관심도 없었던 책, 영화, 뭐든 다 눈이 가더라고요.”
“저는 시험 때는 종이만 찢어도 재미있어요.”
“ㅎㅎㅎㅎ (종이 찢는 제스처를 취하며) 종이만 찢어도 재미있구나.”

===

<웃긴 선생님>

“새로운 선생님들은 어때요?”
“OO 과목 선생님이 웃거요.”
“왜 뭐가 웃겨요?”
“자꾸 수업하다가 다른 선생님 뒷ㄷㅁ 까요.”
“정말요?”
“네네. XX과목 선생님하고 친하대요. 근대 맨날 그 선생님 가지고 뭐라 해요.”
“아 친하다고 막하시는 건가요? ㅎ”
“지난 번에는 XX 선생님이 머리스타일을 바꿨는데, 그거 가지고 엄청 뭐라 했어요. 그게 어울리냐고. 진짜 이상하지 않냐고.”
“ㅎㅎㅎ 재미난 선생님이네요.”

===

<멀뚱멀뚱, 하지만 성공!>

“자 Could를 쓰면 Can보다 좀 공손하게 들려요. 왜 그런지 설명해 볼게요. 이게 좀 어려운 이야긴데 들어봐요.”
“네.”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잖아요.”
“(멀뚱멀뚱)”
“그래서 오로지 현재에 있는데, 현재는 직접 볼 수 있죠?”
“네.”
“과거는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야 되잖아요. 옛날 생각 하려면. 눈 앞에 펼쳐지는 건 현재. 머리 속에 담긴 건 과거.”
“(당연하다는 듯 멀뚱멀뚱)”
“조동사도 그런 게 있거든요!”
“(계속 멀뚱멀뚱)”
“그래서 조동사도 Can이나 May같이 원래 형태로 쓰면 좀더 직접적이고 ‘들이대는’ 느낌이고요.”
“(포기한 듯 멀뚱멀뚱)”
“Could나 might를 쓰면 과거처럼 좀 거리가 느껴지는 거죠. 멀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그니까 정리하면, 지금 눈 앞에서 확 들이대면서 이야기하는 거랑 옛날 이야기하는 거랑, 어떤 게 더 강하게 느껴질까요?”
“들이대며 이야기하는 거요.”
“그쵸? 그건 알겠죠?”
“네.”
“그것처럼 조동사도 과거형을 사용하면 힘도 빠지고 들이대는 것도 덜한 거예요. 오케이?”
“네.”
“그래서 확 들이대는 Can you? 보다는 과거형을 사용한 Could you? 가 더 공손하게 느껴지는 거죠.”
“…”
“그럼 친한 친구한테는 Can you를 자주 쓰겠어요? Could you를 자주 쓰겠어요?”
“Can you요.”
“오케이 좋아요.”

(한주 후)

“자 지난 주에 Might랑 may랑 어떤 게 더 직접적이라고 했죠?”
“May요.”
“Can 이랑 could 중에서는?”
“Can이요.”
“(쾌재를 부르며) 정확히 기억하고 있네요!”

한 주에 한 시간이 뭐 대수냐 싶지만 또 이렇게 기억해 주는 친구들 덕에 기쁨으로 가르칩니다.

3월도 절반이 넘게 갔습니다.

‘멘탈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

Posted by on Mar 14,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몇 해를 찬찬히 돌아보니 망친 수업들을 관통하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은 긍정적 의미, 즉 학생들을 무섭게 생각하여 철저히 준비하고 겸손히 수업에 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무서웠다는 뜻이죠. 불만 섞인 듯한 질문, 까칠한 언행, 성적에 대한 과민반응, 앞뒤 안가리는 피드백, 과제에 대한 불만, 수업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무서웠다는 말입니다. 극소수 학생들 이야기지만 털어버리기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두려움이 스며든 수업은 삐걱거립니다. 큰 사고는 없지만 마음의 이물감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휘청거리듯 한 학기가 가면 대단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커다란 짐이 등에 떡하니 올라와 있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힘겹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데 족히 한 학기는 걸립니다. 몇몇 말들은 평생을 따라다닐 기세입니다.

가끔 ‘강한 멘탈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같은 기사 제목을 봅니다.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멘탈이 강하다는 건 뭘까. 멘탈이 제대로 박혀 있으면서 강할 수가 있는 건가, 싶습니다. 그냥 제 기준에서 말이죠.

선생이 강자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을 알지만 마음은 늘 전전긍긍. 여전히 초짜인가 봅니다.

피할 수 없는 일, 계속 그럴 수밖에 없겠습니다.
가끔 하소연 들어주시는 분들, 고맙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Posted by on Mar 13,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말 한 마디에서 많은 것들이 읽힌다.

그는 “‘지금 당장’ 검찰에 가서 진실을 ‘밝히겠다'”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라고 말했다. 법치에 대한 경멸, 행위의 시점에 대한 무감각, 정치적 주체로서의 무책임을 고스란히 드러냄과 동시에, 대놓고 자기편을 향해 불복을 선동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 때문에 탄핵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자신은 결코 파면당할 수 없는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반신반인의 자녀였으므로.

왕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민주주의는 이제 퇴장해야 한다. 비단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회도, 지방의회도 ‘왕족’으로 채워져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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