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appearing into the Character

Posted by on Mar 13,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조셉 고든-레빗은 <스노든>의 스노든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실제로 에드워드 스노든과 네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목소리나 억양 등에서 각고의 노력이 느껴진다. 한 인터뷰에서 고든-래빗은 “배우가 인물 속으로 사라지는” 연기가 좋다고 말했는데, “disappear into the character”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맡은 배역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배우. 그 사람이 되어버린 배우. 등장이 곧 퇴장인 배우.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은 풍경을 완성시킨다. 일부가 되길 거부하는 사람은 풍경을 오염시킨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사라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듯하다.

통합의 수사에 반대한다

Posted by on Mar 10,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러 들어선 화장실. 학생 하나가 침을 튀기며 이야기한다. 이런 탄핵 기준이라면 김대중도 노무현도 다 탄핵 되었어야 한다고. 지난 대통령들과의 형평성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듣고 있는 학생의 낯빛이 그닥 좋지 않다.

탄핵 직후 대학 캠퍼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큰 소리로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목소리를 높인 그 학생 또한 8:0이라는 압도적 판결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 속한 것 같지만 다른 우주를 유영하는 ‘우리’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가 과연 가능한가?

안다. 오래 전 절친한 벗이 과외교습을 하던 한 고등학생은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단연 전두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려서부터 군인 아버지로부터 ‘세뇌’받은 세계관이 곧 그의 우주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빗나간 존경심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극단적 성향을 갖게 되는 인지적, 사회문화적 메카니즘을 이해하는 일과, 극단적인 의견으로 무장한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논쟁하는 일은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함과 그런 생각을 존중함은 별개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내겐 모두에 대한 포용은 불가능하다.

이런 나의 한계 때문일까. ‘같은 국민’이나 ‘분열되었던 민심의 대통합’과 같은 수사가 불편하다. 상이한 여론의 분출을 분열로 이해한다면 통합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하나였던 적이 없었다. 누군가는 민주주의 실현을 외쳤고 또 누군가는 반민주가 정상이라 외쳤다. 이 둘은 분열한 것인가? 혹 개념적으로 양립불가능한 주장 아닌가?

대한민국은 한국정치의 썪어 문드러진 환부를 도려내고 기사회생했을 뿐 결코 분열하지 않았다. 생명을 살리는 대수술을 ‘분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장엄한 민주주의의 흐름에 겸허히 몸을 맡기는 자세이지 ‘모두가 하나되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넘어서야 할 것은 8:0 만장일치라는 판결의 외연과 판결문이 내포하는 구체제 사이의 균열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열망과 기존 체제의 수용한계 사이의 간극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분열에 대한 통합이 아니라 결코 좁혀진 적 없는 민의와 정치 사이의 균열. 이것이 지금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좌표가 되어야 한다.

“시내가 난리에요, 난리.”

Posted by on Mar 9, 2017 in 단상, 일상 | One Comment

순간의 선택이 앞으로 십오 분을 즐거운 대화로도, 생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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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택시 얘기다. 기사가 던지는 말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비싼 택시의 장점을 홀라당 날려버리고, 원투펀치까지 맞은 뒤 그로기상태로 내릴 수 있다.

보통은 나이대+인상+말투에서 기사분의 성향이 대번에 파악된다. 하지만 오늘은 참으로 아리까리하다. 일부러 한참 뜸을 들인 뒤 애매한 답을 슬쩍 던진다.

“뭐… 정치인들이 잘못해서 국민들이 고생하는 거죠.”

어찌 나오시느냐에 따라 침묵/대화모드를 결정한다. 이제 기사아저씨 차례.

“그쵸? 정치인들이 잘못하는 거죠?” (나: 어? 나름 대화 가능)
“네네. 그렇죠.”
“이게 탄핵이 통과되도 안통과되도 문제예요.” (아직 맘 못놓음. 정신 꽉붙들어야 함.)
“……”
“난 그 나이든 정치인들 싹다 쓸어버렸으면 좋겠어.” (오!)
“아 왜요?”
“그 왜 4선했다, 5선했다 자랑하는 국회의원들있잖아. 그 인간들이 4선 5선 할 동안 뭘 한거야? 부끄러워 해야 되는데, 부끄럽다 잘못했다 하는 놈이 하나도 없고.” (침튀기며 반말모드로!)
“그러네요.
“그렇게 오래 해먹고 나라가 이모양이면 ‘잘못했습니다. 이제 정치 그만하겠습니다’ 해야 되는 건데, 그런 놈이 하나라도 있냐고.”
“안타깝죠. 반성하는 사람은 없고 그냥 정치가 자기 밥벌이라고 생각하니.”
“국회의원도 30대 40대가 다 하면 좋겠어. 한 마흔 다섯 정도까지만 딱 잘라서.”
“ㅎㅎㅎ 기사님 생각이 젊으시네요.” (쓱 보기에 기사님 나이는 60 언저리)
“젊은 게 아니라 이거 나라가 너무 어지럽잖아. 나이든 사람이 수십 년 했는데 이 모양 이꼴이니. 확 바꿔야지. 투표권도 너무 나이 많으면 안주면 좋겠어.”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십여 분.

“저기 쓰레기통 옆에서 내려주세요.”
“어어 그래요.”
“대화 고맙습니다.”
“나도 고마워요.”

그렇게 해피엔딩.

국회의원 할 생각도 없었지만 (능력은 되나? 피식) 기사분 말대로라면 이제 할 수도 없다.

근데 나 왜 하필 쓰레기통 옆에서 내려달라고 한 거냐.

논문은 당신 자신의 글

Posted by on Mar 5,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학술적 글쓰기 첫 시간이 끝나고 한 학생이 다가왔다.

“이거 참 고민이네요.”
“아 어떤?”
“제가 영어로 논문을 쓸 일은 없는데요.”
“아… 수강할까 말까 고민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네. 저는 생각은 글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네.”
“그래서 매일 글을 쓰고 있어요. 글쓰기 강좌 등록해서 서평 쓰는 것도 배우고.”
“아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네. 그런데 우리말로 쓰는 건 제가 딱 제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드는데, 영어논문을 쓰는 건 다른 사람들 글을 모델로 삼는 글이라… 남의 글이잖아요.”
“아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는데, 결국 영어논문도 자기 글이예요.”
“그런가요?”
“그렇죠. 초반에는 다른 사람들 글에 영향을 많이 받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글입니다.”
“그렇군요.”
“사실 자기 글이라고 생각할 때 훨씬 더 좋은 논문이 나와요. 이건 영어든 한국어든 상관이 없고요. 수업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학기 지나면서 말씀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다음 주에 뵐 수 있으면 뵙죠.”
“예.”

다음 주에 그 학생을 만나게 될까? 설령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논문은 자기 자신의 글’이라는 말의 뜻을 서너 달 만에 온전히 이해시킬 수 있을까?

수강생이 너무 많아져 고민이 되다가도, 내 고민보다 더 큰 고민을 안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면 뭔가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은 게 사실이다. 수다쟁이 선생 같으니라고.

다음 시간, 다시 그 학생을 만났으면 좋겠다.

어머니께 드리는 글

Posted by on Mar 4,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어머니.

엊그제 지도교수와의 회의 탓에 전화를 부랴부랴 끊고 말았네요. 마음이 조금 무거웠습니다. 어둑해진 길을 따라 집에 돌아오며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면 깊은 외로움이 아니라 끊임없이 벅찼던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당신을 다시 만나면 지금 숨가쁜 하루 하루가 아니라, 희망을 키워온 다섯 해에 관해 이야기하겠다고.

하지만 만남의 기쁨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희생하진 않으려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순전한 기쁨으로 맞을 때 더 벅찬 가슴으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으니까요. 일 하나만 삐끗해도 오랜 시간 되씹곤 하는 못난 아들이지만 당신에게 배운 사랑과 인내로 그나마 버틸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_라고 묻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답 없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여전히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신을 거쳐 온 사랑이 제 안에 자리잡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 짧지도 길지도 않은 타지에서의 삶, 사랑의 결단보다 힘든 건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 멸시하지 않고, 올바른 사랑이라면 주저없이 그것을 끌어안는 일 말입니다. 아아. 어리석은 저는 온전히 사랑을 품지 못합니다. 여전히 대책없이 서툽니다.

새벽기도에서 돌아와 좀더 주무셔야 되는데 잠이 오지 않으신다 했지요.  집에 들어설 때 좁은 통로에 주욱 늘어선 세간살이가 비루함으로 느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혼자 잠드시는 시간이 아픔을 반추하는 시간이 되지 않길 소망합니다. TV를 켜놓고 잠든 밤, 치익거리는 노이즈가 잠을 깨운다 해도 서글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몸 누이기도 힘든 저의 작은 방에 뒹구는 졸업 앨범들이 당신의 마음을 회색빛으로 물들이지 않길 바랍니다. 당신은 그 곳에서, 저는 이 곳에서 이 비참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외면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조금 더 가지게 된다 해서 우쭐하지 않고, 조금 덜 가졌다고 해서 우울해하지 않기를. 우리 삶에서의 기적은 기업을 세우고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기업 없이 살고 권력을 놓는 것임을 깨달아 가길 원합니다.

주말입니다.
몸맘 모두 쉼을 얻는 토요일 오후 되시길요.

 

2012. 3. 3.
아들 드림.

교실 연구의 상반된 증거들 – 두서없는 메모

Posted by on Mar 2,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사례 1: 한 학생은 ‘난 많이 변했어’라고 하는데, 상호작용 데이터를 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사례2: 다른 학생 하나는 ‘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라고 하는데, 참여와 소통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사례1의 학생은 인터뷰 상황에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데 주력한 듯하다. 의도적 과장은 아니라 판단되지만 좋았던 순간들을 집중적으로 선택하여 기억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사례2의 학생은 인터뷰에서 ‘나는 그저 나일 뿐, 그닥 변할 게 없다’는 스탠스를 유지한다. 자기개념(self-concept)이 확고하며, 명백히 관찰되는 차이마저 ‘외부요인에 따른 일시적 변화’로 해석하는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타인이 생각하는 나와 다르다. 두개골 속의 나와 사회 속의 나의 차이는 내가 듣는 내 목소리와 네가 듣는 내 목소리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이 차이에 대한 감수성도, 해석해 내는 방식도 다르다.

고민이 되는 지점이 있다.

사례1에 등장하는 학생의 말은 행동에 대한 과장일 뿐인가? 아니면 또다른 행동인가? 사례2에 등장하는 학생은 변화했다고 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감지되지 못하고 때로는 부정당하기까지 하는 변화는 그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 사회적 존재로서 인식되는 자신과 정체성이 그려내는 자신이 충돌하는 상황은 언제나 묵직한 고민을 던진다.

허나,

학생들에게 내부와 외부의 갈등을 해결하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내부와 외부라는 이분법적 범주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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