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체험기

카투사로 한 군생활 말년이었으니 아마도 97년이었던 것 같다. 외근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 부대에서 제공하는 버스에 올랐다. 먼저 도착한 부대원들은 저만치 뒤에 겉멋든 고딩들마냥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군바리의 특성상 합류는 이미 정해진 일.

통로를 지나려는데 아기를 앞으로 안은 백인 여성 하나가 보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조심조심 지나간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등과 나의 등이 스친다. 한국의 대중교통 상황에 대입해 보면 정말 대수롭지 않은 마찰이다. 그런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Fxxx”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려 그 여자를 쳐다본다.

“What did you say?”
“You should have said ‘Excuse me’ when you passed by. You almost killed my baby.”
(“killed”라는 말이 몹시 거슬렸으나 꾹참고) “Okay, I’m sorry for not saying ‘Excuse me.’ But you should not use that kind of language to me. Watch your tongue.”

설교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피차 득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을 가라앚히고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이 뒤통수를 가격했다.

“Don’t yellow people know how to say, “excuse me”?”

“Yellow people”소리를 듣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다시 일어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격양된 목소리로 방금 한 말을 다시 해보라 다그쳤다. 내 격양된 어조때문이었을까. 그녀는 “‘Excuse me’라는 말을 썼으면 더 좋았을걸…”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태도가 역겨웠다. 사과를 받아내야 했다. 이 자리에서 정중하게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고성이 오가기를 수 차례.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사과해라. 늦지 않았다.”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녀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다. 사과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본 친구 중 하나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입술을 깨물며 괜찮다 했다. 같이 일하던 상병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사과를 해달라 정중히 말했다. 그녀는 사과할 것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부대로 돌아와서도 아까 상황에 대한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고민 고민 끝에 다음날 업무를 마치고 부대장(여자 대위)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주변에서 보고 들은 목격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 했다. 부대장은 “그점에 대해 유감이고, 네가 원하면 정식 절차를 밟아 군대 내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몇 번의 조사과정이 있을 것이고 조서를 작성해야 하며, 꽤나 성가신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넌지시 ‘그냥 참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 번거롭기도 하고, 그 여자와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정식 제재 요청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의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이를 악물고 제소를 했어야 했나 할 때가 있다. 나 편하자고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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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심각한 글을 써버렸구나.
(우습게도!) 이 사건을 끄집어낸 건 아래 동영상이었다.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y 14,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수업 시간. 언어와 세계에 관한 설명을 하다가 SLR 이야기가 나왔다.

나: 여러분들. 세상이 하나지만 사진기를 여러 모드로 놓고 찍으면 다르게 나오잖아요. 언어도 사실 그런 장치라고 볼 수 있거든요? 사진기 모드… 셀카모드 같은 거 말고 SLR 카메라에서 말하는 모드 아시는 분?
학생 2명: DSLR!
나: 네?
학생 1: SLR 아니고 DSLR이요. SLR이라고 말씀하셔서요.
나: 원래 SLR이 있고 그걸 디지털로 만든 게 DSLR이거든요. 그래서 D가 붙는 거죠. 디지털.
학생 1: 아…

디지털을 통해 아날로그를 보는 학생들. 단순히 카메라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2. 연휴같지 않았던 연휴. 할 일은 줄지 않아 스트레스는 쌓여가는데 실망스런 일까지 발생. 투덜투덜. 쫑알쫑알. 그 가운데에서도 명랑하게 나의 짜증을 받아준 짝에게 아부 모드로 멘트를 날리는데…

나: 자기 원래 그렇게 성격이 좋았어?
짝: 응. (지체없이) 자긴 원래 그렇게 성격이 나빴어?
나: ………….

아부 안통함. 역풍까지 맞음. 안좋던 성격 더 안좋아짐.

3. ‘내용이 제일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도 무시할 수 없다’ vs. ‘내용과 형식은 씨줄과 날줄처럼 텍스트를 만들어간다’

온라인에서의 논쟁이 나름 괜찮은 결과로 이어지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면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듯하다. .

4. 인천공항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정책이 발표된 다음 날.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천공항 뉴스 봤다. 우한테는 좋은 소식 없을까?”
“없을 거 같은데요.”
“그렇구나.”

아마 없을 것이다.

5. 방학과 다음 학기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한다. 형편이 나름 좋은(=강의가 꽤 들어오는) 강사임에도 몇 주 후 어찌 될지 모른다.

그 와중에 감사+씁쓸하게도 학생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가장 실망했던 과목을 다시 맡게 되었다. 트라우마를 넘어설 수 있을까. 별것 아닌 일들이 왜 몸에 딱 붙어 떨어지질 않는가.

6. 학기가 5주 남았다. 끝나고 안아팠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일상스케치>라는 제목 참 오랜만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논의에 대한 질문 몇 가지

Posted by on May 14,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1) ‘자유의지’ 논의에서 ‘인간’은 늘 개인이다. 왜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 촌각을 다투는 게임의 팀플레이에서, 밴드의 합주에서, 랩 배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 창발하는 질서는 ‘자유의지’와 연관지어 논의될 수 없는가?

(2) ‘자유의지’ 논의에서 ‘인간’은 왜 늘 ‘인지’하는 인간으로 정의되는가? 그렇다. 이 지적은 자유의지 관련 논의에서 늘상 등장하는 ‘개인이 결정을 의식하기 한참 전, 뇌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실험 결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뇌의 패턴이 드러내는 인식’과 ‘자신의 결정을 인지하는 자아의 인식’을 분리시킨 후,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을 담지하는 몸의 존재에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식과 무의식의 갭은 ‘자유의지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숨어있는 공간’ 아닌가?

(3) ‘자유의지’ 논의에서 자유는 왜 늘 ‘맨몸’의 결정인가?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와 상호작용하며 사고와 감정을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베이트슨(Bateson)이나 바살로우(Barsalou) 및 비고츠키의 후세 학자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이 아닌 “인간+도구+환경”을 주체 혹은 자유의지의 분석단위(unit of analysis)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4) 근본적으로 ‘자유의지’를 논의함에 있어 상호작용의 지위는 무엇인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개인과 도구, 개인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자유’와 ‘의지’를 정의하는 데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개임해야 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개개인의 독립적 행위 보다는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상호작용에 자신을 던지는 용기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는가? 계획하고 실행하고 모니터하는 존재가 아닌 만나고 섞이고 놓아버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유의지’ 논의에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자유의지’ 자체가 규명 가능한 개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자유’와 ‘의지’를 개인의 뇌 안에 가두어 놓으려는 경향을 띄는 데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나의 자유의지’나 ‘너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존재가 세월을 업고 공간을 가로질러 얽히는 세상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일까?

‘영어학습법’에서 ‘내 삶의 언어와 관계맺기’로

“영어를 배운다”는 추상성이 높은 명제다. 일단 ‘영어’라는 단어가 담는 내용과 행위가 광범위하다. ‘배운다’는 동사 또한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방학이 되면 으레 “영어 공부 좀 해야 되는데”라는 말을 듣는다. “뭐 하실 건데요”라고 물으면 “뭐 이것 저것”이라고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이것 저것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 저것 하다 보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학습 대상의 추상성이 높다는 것은 그 대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는 거대한 만큼 멀리 있고, ‘배운다’는 애매한 만큼 스르륵 빠져나간다.

학습은 추상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구체화하는 과정 즉, 구체적인 활동과 구체적인 내용과 구체적인 학습법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시간과 장소, 필기 스타일, 제스처와 발음, 혀의 움직임까지.

여전히 많은 학습법들은 ‘거대 전략(grand strategy)’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면 된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 등등.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일종의 수집(collection)을 시도할
만하다. 오바마가 좋다면 오바마의 연설들을 모으고, 멋진 표현을 모으고, 발음을 따라해 보는것이다. 스타워즈의 팬이라면 요다와 다스베이더가 한 말을 모조리 모아서 외워 보는 식이다. 주변에 널린 영어 간판들을 사진으로 찍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거나, 영어로 된 백화점에 들어가서 상품들의 이름을 익히고, 어떻게 분류되고 있는지를 한국 백화점 웹사이트와 비교해 볼 수도 있다. 크리스 앤더슨이 제안하듯 TED 강연을 보며 청자와의 유대를 높이는 표현, 설득을 위해 초석을 까는(priming) 과정, 발성이 달라지는 순간들 등에 집중할 수도 있다. 요리가 좋다면 자막이 제공되는 푸드 채널을 꾸준히 보면서 관련 표현을 익힐 수 있다. 요리쇼는 음식의 이름이나 계량과 관련된 어휘들 뿐 아니라 다양한 동작을 나타내는 구어 동사 표현의 보고다. (이와 관련하여 제이미 올리버의 Food Tube 채널을 추천한다.) 핀터레스트에서 명언을 모으거나, 유명 인사들의 유언을 모을 수도 있다. 잘 정리된 유머나 말장난 사이트를 독파할 수도 있겠다. 수준이 높은 학습자라면 기존의 수퍼볼 광고에 담긴 미국 대중문화의 단면을 분석해 볼 만하다.

결론적으로 저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영어가 아니라 내 손 안에, 혀 끝에, 수집 목록에, 유튜브 채널에, 노트 필기에, 다양한 간판들 속에 있는 구체적인 영어를 찾아야 한다. 영어공부의 핵심은 한국인 모두를 위한 영어학습법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영어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나만의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An interesting take on flow

Posted by on May 9, 2017 in 과학, 링크 | No Comments

The same argument applies to many other areas including teaching and writing, the performance of which requires an extended amount of time, I believe. Although some moments might flow smoothly and almost effortlessly, the overall performance is under constant monitoring, recalibrating, retrying, and restarting. For professionals, of course, the state of ‘flow’ appears more often and lasts longer. However it does not characterize the entire process. It is all about achieving ‘a shorter struggle and a quicker rebound, and a more effective orchestration of competing factors,’ rather than ‘sliding into the state of flow and staying there.’

“In other words, the idea that expert actions are in a placid state of flow – a state in which things seem to fall into place on their own – is a myth.”

https://aeon.co/essays/the-true-expert-does-not-perform-in-a-state-of-effortless-flow

내가 맞아 아니면 내가 맞아?

Posted by on May 8, 2017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영어 | No Comments

1. 영어 클리셰(닳고 닳은 표현) 중에 “Am I right or am I right?”이 있다. 결국 “I am right.”이라는 뜻이다. 보통 ‘내가 맞아 니가 맞아?’라고 해야 할텐데 ‘내가 맞아 아니면 내가 맞아?’라고 묻는 것이다. 선거 막판 이런 글과 종종 조우한다. 나도 가끔 이런 글을 쓰지 않는지 반성한다.

2. 언제였던가. 우리 나라에도 ‘빅텐트론’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먼산) 영어에도 같은 표현(Big tent: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선거캠프/조직 하에 모임)이 있는데, 정치권이 이를 차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캠핑문화의 확산 정도에 비추어 보면 ‘빅텐트론’은 미국 문화에 좀더 밀착된 느낌이다. (빅텐트론 주장하셨던 분들 중에 제대로 캠핑 해보신 분 몇 안될 듯.)

3. 영어에서 analyze는 본래 생물체나 무생물을 쪼개어 보는 일을 의미했다. 생물이나 물체에 대한 해부/분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analyze는 대개 추상적인 영역(지식, 정보, 개념 등)에서 쓰인다. 이 시대 analysis의 과제는 이러한 추상성을 넘어 몸과 물성의 영역을 회복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빈곤에 대한 담론적 통계적 분석과 빈곤한 하루를 사는 몸(들)의 고통에 대한 기술의 결합 말이다.

수수께끼 하나

수수께끼 하나 풀어보시죠. A woman gave birth to two sons who were born in the same hour of the same day of the same year. But they were not twins. How could this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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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twins가 아니고 triplet이었어’라고 합니다. 허무한가요? ^^

영어 모국어 화자와 한국어 모국어 화자가 풀 때 정답률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로 보입니다. 영어에서는 twins, triplet, quadruplet 이 각기 다른 단어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들은 쌍둥이, 세쌍둥이, 네쌍둥이죠.

한국어 화자들은 ‘Twins’라는 말에 보통 ‘쌍둥이’를 떠올리고, 이 문제의 맥락에서는 ‘쌍둥이가 아니라구?’라고 묻게 됩니다. 한국어에서 ‘쌍둥이’라는 개념이 세쌍둥이, 네쌍둥이 등을 포함하고 있어 문제를 맞추기가 더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PISA 등의 국제적인 평가에서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 국가들의 수학성적이 높은 여러 요인 중 하나가 숫자의 일관성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1-20의 수를 한국어와 영어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면 차이가 큽니다. 어렸을 때 영어로 11,12,13 외우다가 짜증났던 기억도 있습니다. 한국어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의 구조와 직접 대응되는데 영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지요.

숫자 발음의 일관성은 작업기억(working memory)의 효율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하네요. 아주 작은 차이지만 머리 속에서 계산을 할 때는 적지 도움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저와 같은 한국어 모국어 화자라면 “십일 더하기 십이”랑 “Eleven plus twelve”를 비교해 보시면 감이 확 오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중국어와 일본어 또한 한국어와 같은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11 eleven 열+하나
12 twelve 열+둘
13 thirteen 열+셋
14 fourteen 열+넷
15 fifteen 열+다섯
16 sixteen 열+여섯
17 seventeen 열+일곱
18 eighteen 열+여덟
19 nineteen 열+아홉
20 twenty 열
21 twenty-one 스물+하나

 

http://www.npr.org/sections/krulwich/2011/07/01/137527742/china-s-unnatural-math-advantage-their-words

이름 붙이기 vs. 마주보기

흔히 “명사”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들 하지만, 옳지 않은 설명이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봐도 “나무”는 세상의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나무”라고 불리는 개념(concept)에 조응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명사는 일종의 ‘집합명사’다. “나무”는 내 집앞 화단의 아담한 사과나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를 가리킨다. 참나무, 뽕나무, 자작나무 등에 속하는 모든 개체를 통틀어 ‘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나무’는 세계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체계 속에 개념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언어의 유용함과 위험이 동시에 드러난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는 단지 세상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분류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를 배울 때 ‘나무’라는 개념을 형성하게 되듯, /자유/를 배울 때 ‘자유’에 속하는 것을 분류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말은 우리의 세계를, 감정을, 의견을, 고통을 갈라친다. 세계의 어떤 부분을 떼어내어 자기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다.

갈수록 개념만 계속 집어삼키는 공부가 두렵다. 더 자세히 분류하고 갈라치는 법을 배우다가 세계와 대면하는 법을 잃어버릴까 무섭다. 구획하는 법을 배운답시고 마주보는 법을 잃어/잊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세계와 대면할 수 없다. 단지 한 인간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을 뿐. 그래서 대면(對面) 아닌가. 명명(命名)이 아닌 마주봄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욱 절실한 시절이다.

Manchester by the Sea (2016)

Posted by on May 6,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어떤 삶은 교훈이나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저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렇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교훈’이나 ‘감동’ 같은 말로는 어떤 진실도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할 뿐. 너무 많은 존재들을 말에 가두어 온 내 가련한 인생.

바다를 보고 싶어졌다.

 

전쟁터가 된 삶

Posted by on May 3, 2017 in 단상,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대부분의 언어는 군대 관련 표현을 담고 있고, 영어 또한 예외가 아니다. engineer는 원래 군 엔진(military engines)을 만드는 사람을, ‘dress(ed)’는 병사들이 전투에 나갈 준비가 된(prepared) 상태를 뜻했다. 그래서 특별한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차려 입고 ‘출격 준비 끝’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중세의 병사가 된 것이다. 온갖 표현과 어울려 쓰이는 strategy 또한 기원은 전쟁이었다. 그래서 ‘휴가 전략’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가 안맞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외국어 교수법도 군대 및 안보상황과의 긴밀한 관계 하에 변화한다. 교실에서 자주 쓰이는 “따라 읽기(oral repetition)” “단어 바꾸어서 반복하기(substitution drill)” 등은 2차대전에 참전할 미군 병사들의 외국어 실력을 단기간에 증진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군대식 교수법(Army Method)의 주요 학습법이었다. 911 이후 미국의 외국어 관련 예산에서 아랍어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서의 한국어 강좌 개설 또한 안보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정치의 영역에서 군사 메타포는 자주 사용된다. 선거의 ‘주요 격전지(key battleground)’나 ‘전면전(full-scale war)’ 등은 대표적인 예다. “military campaign”과 “election campaign” 모두 “캠페인”으로 불린다는 게 우연만은 아니다. 논쟁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오죽하면 “I demolished his argument.(그의 주장을 박살내 버렸지)”라는 표현이 있겠는가?

사회언어학자 데보라 태넌(Deborah Tannen)은 그의 저서 <Argument Culture>에서 언론, 정치, 교육 등의 분야에 만연한 대결적 문화에 대해 논의한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대화의 상대를 적(adversary)으로 간주하고 이를 기본적인 사고의 틀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도, 교육도, 문화도 ‘전쟁중’이다. 삶을 표현하는 기본 메타포가 ‘전쟁터’인 사회는 불행하다. 그래서 종종 묻는다. 이 전쟁은 정말 필요한 것이냐고. 누가 이 전쟁을 부추기고 유지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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