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글 정리중

Posted by on Jun 30,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이리 저리 널려있는 지난 5년 여의 쪽글을 정리하고 있다. 좌절과 부끄러움의 화수분. 파도 파도 성긴 개념들을 늘어놓은 글이나 어설프게 멋부린 단상 뿐이다. 소셜미디어에서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되는 멋진 글들을 보며 옅은 자괴감마저 든다.

그 와중에 지도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계속 읽고 쓰는 삶을 산다면 박사논문이 앞으로의 네 생애에서 가장 못쓴 글이 될 거야.”

못난 글을 알아보는 눈이라도 서서히 생기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온전히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또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어리고 어둔 마음, 빛을 받아안는 데에는 일생도 부족할지 모른다.

사회문화적 인프라스트럭처로서의 문해력과 교사 공동체

Posted by on Jun 29, 2017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생각의 흐름을 제멋대로 따라간 글로 전개가 매우 울퉁불퉁합니다.)

1. 깊은 이해를 좇는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설명은 부족하고, 앎의 환상을 좇는 사람들에게 대개의 설명은 과하다.

그렇다면 ‘깊이있는 대중서’는 언제나 모순형용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독자의 교양수준이 높다면 다양다종한 개념을 세세히 논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면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문해력은 지식의 효율적인 생산과 분배, 혁신을 가능케 하는 인프라스트럭쳐다.

여기에 딜레마에 봉착한다. 어떻게, 누가, ‘인프라스트럭처’를 깔 것인가? (나도 공범들 중 하나지만) ‘문해력 타령’으로 해결될 수 있는 건 없다.

2. 이와 관련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육개혁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입시제도 개혁에 대한 논쟁 속에서 수업 자체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다른 과목은 모르겠고, 영어를 보자. 영어수업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없다면 결국 영어수업 특히 고교 영어수업은 ‘입시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3. 얼마 전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매우 소박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대략 이런 제안이었다.

“애들하고 영어로 된 짧은 책 한권 읽으면서 토론하고 관련된 거 공부하고 하는 게 지금 교과서 배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금은 지문 읽고 문제 풀고의 연속인데 그게 진짜 영어를 공부하는 건 아니지 않나.”

4. 다시 처음 문제로 돌아가 보자.

문해력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에 대한 손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교육개혁에 대한 논의 속에서 문해력을 모든 과목의 중심에 놓는 것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룰 수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과목을 해당 지식과 개념에 대한 읽기, 쓰기, 토론하기 등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있었다.

“근데 문제는 선생님들도 대부분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거…”

고개가 끄덕여졌다.

5. 며칠간 이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끝없이 돌고 돌아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답 없는 문제의 전형. 그러다가 아침에 커피를 내리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떠올랐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이분법 속에서 우리 교육은 해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선생 대 학생”이 아니라 “조금 앞서 배우는 자와 새로이 배우는 자”를 상정해야만 객관적 평가라는 신화를 깨뜨릴 수 있다.

선생-학생의 관계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아니라 무지에 좀더 민감한 자와 무지에 둔감한 자들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교사와 학생이라는 전통적인 권력관계를 무너뜨리는 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5. 이런 맥락에서 교사1인당 학생수와 주당 수업시수, 과도한 행정업무를 줄이고, 그만큼의 시간과 자원을 교사들이 함께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교사는 가르치는 기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고, 그 열매는 자연스럽게 수업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교사들이 역동적인 학습조직을 꾸려 나갈 때 교사의 전문성이 확보될 수 있다.

결국 문해력이라는 사회문화적 인프라스트럭처 건설과 교사들의 삶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학교교육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어린 시민들이 십수 년 시간을 보내는 교실을 무시하고 문해력을 신장시킬 방법은 없다.

진정성, 그리고 사기꾼 신드롬

Posted by on Jun 29, 2017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 No Comments

[진정성, 그리고 사기꾼 신드롬]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젊음을 탕진해 버린다고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나이든 이들이 지혜를 쓸 줄 모르지. (“People say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I disagree. I believe wisdom is wasted on the old.” – Ray Reddington, <Blacklist> 中)

진정함(authenticity)이 특정한 경험의 속성이라 믿는 이들에게 지혜란 ‘진정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따르는 일’로 귀착된다. 물론 자신은 진정한 경험을 누구보다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이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다름 아닌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판단을 내릴 때 구체적인 예를 얼마나 쉽게 마음에 떠올릴 수 있는가)이니 말이다.

이 ‘진정함의 화신’ 반대편에 자리잡는 것이 대학원생 등을 비롯한 지식노동자들이 종종 겪는 사기꾼 신드롬(imposter syndrome)이다. 다들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뭘 해도 부족한 듯한, 어쩌다 운이 좋아 자신이 속해서는 안될 집단에 속해 있는 듯한, 힘들여 이룬 성과도 ‘사기친 결과’로 해석하게 되는, 자신의 ‘무능’이 언제 탄로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일련의 ‘증상들’ 말이다.

오만한 진정성과 과장된 무능은 별개가 아니다. 모범 사례(best practice)는 대개 예외(exceptional case)이고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사례(worst practice)이기도 하다. ‘무능無能’은 순수히 개인적일 수 없다. ‘능能의 시스템이 의도적/비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사각지대일 뿐.

미디어와 기억

Posted by on Jun 29,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기억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간다’는 말이 있다. 더이상 주마등을 보긴 힘들지만 종종 접하게 되는 표현이다.

영상매체의 발달로 이 표현은 곧 수명을 다하지 싶다. ‘옛 기억들의 몽타주’나 ‘그 여름의 기억이 롱테이크로 남아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누군가는 웹툰같은 기억을 ‘스크롤 다운’하다가 씰룩이는 엄지손가락을 만날 지도 모른다.

영화 이전 세대와 영화를 좀 보면서 자란 세대, 태어나서부터 영상매체와 함께 살아온 세대가 추억을 떠올리는 방식은 꽤나 다르지 않을까? 예를 들어 할아버지와 손녀가 놀이공원에 갔다면 할아버지가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과 손녀가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편집이 영화를 만든다. 똑같은 원본 필름에서 완벽히 다른 영화가 탄생한다. 연령별로 ‘주마등 같은 기억들’의 사용빈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이는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modality)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요즘 자기 전에 머릿속으로 롱테이크를 찍곤 한다. 어디까지가 정확한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지금의 내가 채워넣은 장면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 자신의 뒷모습을 따라 학교에 가는 기억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에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학기말 단상

Posted by on Jun 28,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기가 끝났다.

길고도 힘든 학기였다. 가장 많은 강의를 했고, 새로운 과목도 셋이나 되었다. 몇 차례의 외부강연은 즐거웠으나 무리였다. 크게 아프지 않고 잔병으로 때운 게 기적만 같다. 능력이 되지 않는 일을 하려니 힘들 수밖에.

<언어와 사고> 절반을 강독으로 진행했다. 사실상 처음 해보는 강독 수업인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학생들에게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인데, 잘 모르겠다. 시험 결과의 표준편차가 꽤 큰 편이라, 강의평가에서 충격이 예상된다.

<학술적 글쓰기의 실제>는 대학원에서 가르쳐 본 수업중 가장 많은 수강생이 모였다. 내가 잘해서 그런 건 아니고 주말반이어서였는데 생각 외로 열심인 분들이 많았다. 20대 중반에서 60대 정도의 학생들이 골고루 모인 교실에서 배우는 게 참 많다.

사실 전공(응용언어학)에서 가장 먼 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이 또한 나의 강의가 특출나서라기 보다는 ‘다른 데서 들을 수 없는 수업’이라는 점 때문임을 잘 안다.

<논문 읽고 쓰기>을 필수 강의로 지정하면 좋겠다는 의견에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일하면서 대학원 수업을 듣는 이들의 좌절감은 생각보다 깊었다.

“다음 학기에도 강의 하세요?”라는 말에 “강사라 아직 잘 모르겠네요”라는 답이 튀어나왔다. “강사라”라는 말은 붙이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도한 자의식이 스물스물 마음에 퍼짐을 느끼지만 저항할 수록 더 커질 것 같아 턱을 괴고 지켜보고 있다.

이번 방학에도 흔들리며 공부를 해봐야겠다. 이룬 것은 없지만 욕심을 버려야 할 시기다. 아니, 욕심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이룸 아니던가.

고마운 얼굴들이 떠오르는 밤이다.

짝이 책을 읽는 법

Posted by on Jun 27,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짝의 책읽기] 짝은 영화를 보듯 책을 읽습니다. 진짜 보고 싶을 때 구입해서 뚝딱 읽어버리고 며칠 안에 중고로 팔아버리거든요. 업무 관련 도서들은 회사에 머뭅니다. 업이 업인지라 ‘일감’을 집에 두고 싶지 않은 듯하네요. 이러니 꾸준히 읽어내는데도 집에서 그의 책을 찾아보기 힘듭니다.책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맘에 듭니다. 여러 면에서 존경스럽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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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도 않을 저의 책들을 더 많이 쟁여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책 중에 왜 이리 안읽은 게 많을까요?

그나마 도서구입이 확 줄어 같은 책을 두 권 사는 일은 사라졌다는 게 작은 위로입니다. (먼산)

apart의 의미

Signature > sign / ball point pen > ball pen 등 소위 ‘콩글리시’에서 단어가 축약되는 경향에 대해 읽다가 옛 일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나: “They lived apart.” 이게 무슨 뜻이죠?
학생: 음… “그들은 아파트에 살았다?”
나: 아… 여기에서 “apart”는 부사예요. 부사.
학생: (자신있게) 그쵸. 그러니까 아파트’에’ 아닌가요?
나: &%#$#^&!@

이 학생에 의하면 명사 ‘apartment’는 부사 ‘apart’가 되어 ‘아파트에’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YOTO

Posted by on Jun 27, 2017 in 단상 | No Comments

시간강사에겐 YOLO가 아니라 YOTO다. You Only Teach Once. 필요 없는 것 잔뜩 끼워넣지 말고 내 맘대로 가르쳐야지.

기계학습 함부로 차지 마라

Posted by on Jun 16, 2017 in 과학, 단상 | No Comments

인공지능과 또 다른 인공지능을 ‘가르치고’, ‘자발적으로’ 새로운 소통 체계를 창조해 내는 시대. 많은 이들은 “AI의 승리”를 선언한다. 기계의 승리, 좌절하는 인간, 암울한 미래, 아니 이미 와버린 파국.

교육노동자로서 나는 사뭇 다른 문제의식을 갖는다. 특정 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앞설 것이라는, 아니 그저 ‘앞설 것’는 표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의 우월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기계가 학습하는 방식이다.

데이터를 거부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이전 예시와 비슷하다고 해서 토해내지 않는, ‘자기보다 못한’ 상대라고 해서 얕보지 않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학습. 혹은 머신 러닝.

기계학습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알고리즘이었느냐.

어쩌면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지점은 ‘연산능력’이 아니라 ‘포용력’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거대한 세계에 얼마나 열려 있는가.

* 고린도전서 13장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Jun 12,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한국교육의 혁명적 변화”

당장 교육이 뒤집어지진 않겠죠. 하지만 이번 정부 하에서 근본적 변화를 위한 사회적 대토론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혁명을 이야기하는 데서 혁명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2. “영어교육은 어떻게 되나요?”
– “뭐 미래가 불투명하죠.”

영어. 한 번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지 못하고 미궁에 빠져버릴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드는 요즘입니다.

3. ‘영어’가 아니라 ‘다양한 리터러시들이 어울리는 생태계’의 관점에서 고민해야만 하는 시점입니다.

4. “이런 표현 몰랐지? 너 무려 십수 년이나 공부했으면서 이런 표현도 몰라?”라는 광고를 보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알아서 퍽이나 좋겠구려.”

5. 오늘 한 친구가 대략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진짜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려면 다른 일로 돈을 벌면서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진짜 좋아하는 일’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일’을 통해 더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동력을 얻어야 한다는 데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6.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즐겁고 함께하는 공부에서 기쁨을 얻지만, 정처없이 흘러가도 차오르는 대화를 해본 지 참 오래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책무가 아니라 서로를 응시하는 시간에 대한 목마름.

7. 보름 후면 돌아올 오랜 벗, 그와 함께할 공부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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