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풋 패러다임과 모국어 지식

한국 영어교육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단연 ‘인풋(input)’이다. 영어는 영어로 배워야 하고, 영어에 많이 노출(exposure)될 수록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요지다.

외국어 학습에서 언어입력(input)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타를 직접 경험하지 않고 기타를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외국어 이해에 있어 한국어 배경지식이 갖는 중요성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 것 같다. 외국어를 읽고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어에 대한 지식과 세계에 대한 지식 모두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한국어 자막의 효용일 것이다. 특정 외국어에 익숙한 학습자들의 경우에 잘 들리지 않던 뉴스 혹은 드라마도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면 들리는 경우가 많다. (진짜 들리는지 확인하려면 랜덤 샘플링을 통해 받아쓰기를 해보면 될 터이다.) 이는 외국어의 단어나 소리 자체가 청자에게 전달된다기 보다는 (한국어로 된) 배경지식과 상호작용하며 뇌에서 처리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종종 털어놓는 걸 보면 필자만의 경험은 아닌 듯하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상호작용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짐을 시사한다. 신경언어학의 연구는 사춘기 이후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경우 모국어(L1)와 외국어(L2)가 사뭇 다른 ‘회로’와 활성화 패턴을 통해 처리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자막이 외국어 이해에 실시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다수의 경험은 L1과 L2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자막을 켜고 영상을 볼 때 ‘들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실질적 이해이고 어디까지가 ‘이해했다는 착각’혹은 사후적 합리화인지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능숙한 학습자가 영미권 드라마를 볼 때엔 다음과 같은 점을 가정할 수 있다.

1. 영어 구어체에서 사용되는 어휘적, 문법적 패턴에 익숙한 편이다. (해당 언어의 일상어(colloquial language) 전반에 대한 지식)

2. 드라마의 전개상 해당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대략적인 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스토리라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추측(inference) 메커니즘 작동중)

3. 드라마의 소재가 특이하지 않다면 해당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대략적인 어휘셋(lexical sets)에 대해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된 어휘지식)

4. 드라마의 시즌이 6-7 정도 된다면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주요 인물들을 대화 패턴을 암묵적으로 익혔다고 볼 수 있다. (개별 인물에 대한 암묵적 지식)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자막을 켜고 볼 때 나의 뇌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언어 능숙도에 따라 어떤 변화 패턴을 보이는가?

이런 주제로 깊이있는 연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용적인 면에서도 “자막은 금기입니다”나 “무조건 자막 끄고 10번 이상 보세요”보다 나은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순화 시도에 대한 단상

소위 ‘언어순화’ 시도가 별 의미가 없지 않나 하는 주장에 대해 달았던 답글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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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보면 말씀하신 의견이 일리가 있습니다. “창녀” 혹은 “성노동자”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말이죠.

하지만 세 가지 점에서 이와 같은 의견이 어느 정도 조정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각각의 단어들이 어떤 담론장에서 사용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위에서 다른 분이 말씀하셨듯이 ‘근로자’와 ‘노동자’는 같은 대상을 가리킬지는 모르나, 둘 중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는 단순히 단어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담론장의 권력을 언어에 주류로 편입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근로자’대신 ‘노동자’를 쓸 경우 이는 단어 대 단어의 관계가 아니라 담론장과 담론장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신경언어학적 고려입니다. 과연 사람들은 ‘창녀’와 ‘성노동자’를 들었을 대 똑같은 생리적 반응을 보일까요? 욕설이나 금기어의 존재를 보면 분명 특정한 단어들은 다른 단어들에 비해 격한 정서적/생리적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이런 면에서 특정한 단어가 다수의 언중에게서 보다 격한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이것이 사회변화의 걸림돌이 된다면 다른 단어의 활용을 검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기표의 교체가 갖는 중재(mediation)의 효과입니다. 최근에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하여 ‘편견 최소화 채용’을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이 둘이 가리키는 것은 동일합니다만, 채용과정의 어떤 면을 프레이밍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나아가 이런 프레이밍은 정책결정자들이나 실무담당자들이 채용과정을 재설계할 때 일종의 중재적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보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줄이는 게 중심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즉, 언어의 변화는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른 심리적 요인들을 추동하는 매개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거에서 말씀하신 바를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무의미한 노력이 될 때도 있지만,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단초가 될 수도 있죠.

그렇기에 ‘언어순화’ 자체로 효용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고, 그에 수반되는 사회문화적, 제도적, 정치적 변화를 면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신 원리를 적용하려 하기 보다는 담론장과 권력의 문제를 심도있게 고려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 답글 —

말씀하신 대로 언어의 의미장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수반해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창녀’ vs ‘성노동자’의 경우 어떤 호칭이 긍정적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데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이안님께서는 계속해서 ‘창녀’를 쓰면서 다른 활동을 전개하는 것 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고, 저는 ‘성노동자’라는 말을 쓰면서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논쟁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런 명칭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많은 상황에서 사회변화의 가장 큰 동력은 그 명칭으로 호명되는 이들이었습니다.

참고
http://pjos.org/index.php/pjos/article/download/15179/13734

 

[의사소통행위의 언어학 a linguistics of communicative activity (LCA)] 어떤 글은 곱씹을수록 진가가 나온다. 별것 아닌 선언인 것 같지만 언어를 자기충족적이고 완결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활동으로 보게 된 것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고전적인 경제이론이 나름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인지와 정서라는 요인을 간과해 왔듯이 구조주의 언어학은 형식적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오용하고 배반하고 변화시키는 언어사용자의 사고와 감정 나아가 언어가 정체성과 권력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간파하지 못했다.

새벽에 간만에 온라인에서 이런 저런 논의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찾아본 챕터. 논문이 실린 책의 제목은 <Disinventing and Reconstituting Languages>이다.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37201231_Thorne_S_L_Lantolf_J_2007_A_Linguistics_of_Communicative_Activity_In_S_Makoni_A_Pennycook_eds_Disinventing_and_Reconstituting_Languages_pp_170-195_Clevedon_Multilingual_Matters

블라인드 채용 vs. 편견 최소화 채용

Posted by on Nov 25, 2017 in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블라인드 채용’ 말고 ‘편견 최소화 채용’으로 쓰면 어떨까? 말은 말뿐이라고 하지만 일단 말부터 바꾸고, ‘편견 최소화 채용’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 제안에 누군가는 ‘묻지마 채용’ 아니냐고 답하겠지만, 채용과정상의 편견을 최소화하고 보다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자는 대의에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미약하게나마 ‘블라인드’에 남아있는 차별의 흔적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운칠기삼(運七技三)’ 단상

Posted by on Nov 24,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운과 기를 나누는 것이 마치 본성과 양육을 나누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네가 지금 쓰는 글은 너의 유전자 45, 사회문화적 요인 55로 설명 가능해’라고 하면 그저 우습지 않겠는가? 하지만 운과 기의 비율을 굳이 나누어 보라 한다면 ‘운9999에 기1 정도 아닐까’,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룬 이들의 노고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운의 작용이 아무리 크다 해도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인 1을 이루기 위해 쏟는 피땀은 소중하고 본질적이며 당사자에겐 그 무엇보다 거대하고 뜨겁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약하고 미약할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일만 분의 일에 불과하다 하여 가벼이 여기지 않고 싶다.

나아가 나에게 허락된 9999의 좋은 운들을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되길, 누군가에게 허락된 9999의 운이 나에게도 허락될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9999에 대한 불만과 좌절, 걱정과 비난으로 삶을 소진하지 않고,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만 충실히 갈고 닦아도 살만한 사회가 되기를 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구글 번역 관련 수업 단상

1. AI의 시대 ‘영어교육이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리터러시 교육에 있어 모국어, 외국어, 정보기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유효하다.

2.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AI’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어교육만 위기는 아니다. 가르칠 영역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채널과 효율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3. 따라서 ‘영어교육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의사소통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온라인 커뮤니케이션과 소셜 네트워크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었듯이 통번역 기술의 발달은 문화간 소통의 지형을 빠르게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

4. 통번역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데이터 과학의 성과를 모두에게 손쉽게 제공하는 인터페이스의 고도화가 더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스와힐리어 문헌을 해독하고 아프리카 문화권의 정보를 손쉽게 가공할 수 있다면?

5. 그런 의미에서 중장기적인 통번역 기술의 발달을 영어교육 전공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문화간 소통의 획기적 증가라는 전지구적 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실과 위안

Posted by on Nov 17,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 바닥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황당한 일을 이틀 연속 접하고 당했다. 애시당초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존엄을 잃지 않으며 자리를 지켜내고 계신 분들에 대해 더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함께 돈을 아주 많이 벌면 배움도 뜻도 깊은 시간강사들,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른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를 하나 해보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만,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학교일 필요는 없다, 마음이 모인다면. 그렇게 되도 않는 이야기로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다. 그걸로 족하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 – 몇 가지 단상

Posted by on Nov 13, 2017 in 강의노트, 과학, 링크,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1. 사하라 이남 지역의 청각장애인들은 평생 수어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간단한 제스처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래 영상의 패트릭도 15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수어 수업을 듣게 된다.

2. 한편 이 영상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갖고 있는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워프가설에서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기본적으로 언어와 사고를 독립적인 변수로 취급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즉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가? 사고가 언어를 결정하는가?”라고 묻는 방식이다.

3. 하지만 패트릭의 예에서 보듯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단지 사고를 밖으로 표출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사고의 변화과정과 유기적이고 동적으로 맞물린다. 즉 언어가 발달하면서 삶이 변화한다. 패트릭과 그의 급우들은 이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4. 언어를 기술(technology)로 생각하면 필자가 언어와 사고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갖고 있는 의구심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해보자.

“소셜 네트워크는 사고를 형성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사고가 먼저 있고 소셜네트워크가 그에 따라 구현되는가?”

이 질문의 조악함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유독 언어와 사고의 논쟁에 대해서만은 ‘사고가 먼저다’, ‘언어가 영향을 미친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5. ‘사고’를 말 그대로 사고 전반으로 정의해 보자. 패트릭이 수어를 다 배우고 나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 그의 생각의 세계는 이전과 같을 수 있을까?

6.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는 20세기 초반의 비고츠키의 견해가 21세기의 그 어떤 인지과학자보다도 옳다고 생각한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인간의 발달 초기, 언어와 사고는 서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고 이를 소통과 사고에 있어 제1의 중재방식(mediation means)으로 계속 사용하면 언어와 사고는 사실상 구분이 어려워진다. 성인으로 갈수록, 리터러시가 발달할 수록 언어를 사고에서 떼어내기란 쉽지 않다. 변증적 관계(dialectic relationship)를 이루는 것이다.

7.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예로 언어권에 따른 색상 구분 능력 실험이 있다. A언어에 색상을 구별하는 어휘가 풍부하고 B언어에는 한정된 어휘만 있다면 A언어 화자가 색상을 더 잘 구분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제기다. 이에 대해서는 ‘색상 지각 및 구별은 무슨 언어를 사용하든 비슷하게 하지만, 세밀한 차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정도가 현재까지의 인지과학이 내린 결론이다. (이 ‘세밀한 차이’를 차이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쩝.)

8. 이같은 연구는 언어와 비교적 독립적인 시지각 능력을 다룬다. 그런데 이것을 ‘사고’의 대표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그런 의미에서 관련 분야에서 논쟁이 되는 연구들은 ‘언어와 사고’를 다룬다기 보다는 ‘언어와 (언어와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지각’을 다루거나 ‘사고기능 중 극히 일부분’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 옳다.

9. 결론: 언어와 사고는 각각을 독립변수로 놓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언어를 독립된 시스템으로, 사고의 패턴과 사고능력을 각각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언어와 사고가 배태되고 성장하고 교섭하고 통합되고 변증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개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개인의 뇌에서 사고를 위한 신경세포들과 언어를 위한 신경세포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언어일반과 사고 일반을 독립적인 시스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적 논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련된 연구 패러다임을 ‘언어와 사고의 관계’라고 애매하게 부르기 보다는 좀더 엄밀한 정의를 동원한 논의가 필요하다.

 

 

국가에 대한 예의

Posted by on Nov 12, 2017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죽인 사람들 편을 들죠?”

강기훈씨의 <카바티나>를 배경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말이 흐른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다 자신을 던진 이들의 얼굴들과 만난다. 그의 연주는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몸부림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제스처도 아니다. 바흐의 음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한 청년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여정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아름다움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증거일 뿐.

그의 삶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기타는 고요히 운다. 관객들도 따라서 숨죽여 운다. 이해할 수 없어, 가 닿을 길 없어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는 삶이, 죽음이 있다.

강기훈씨의 연주가 뒤로 숨는 동안 사라진 이들이 하나 둘 걸어나와 살아남은 이들과 만난다. 권력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은 앞으로 나서려 다른 목숨을 짓밟았다. 대법원 무죄판결 이후에도 여전히 강기훈의 유죄를 확신한다는 이들은 시대를 이해하고 자신을 높이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삶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강기훈씨가 말하는 ‘시시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일의 아름다움을 알 턱 없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고, 권력을 잡는다.

사운드트랙을 들을 수 없어 대신 Kindgren을 찾는다. 강기훈씨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예의>는 서울 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 부분에 출품되었으며, 자세한 사항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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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한 예의 | 감독 권경원 | 2017 | Documentary | Color+B&W | DCP | 90min 54sec

시놉시스
1991년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던 11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모든 죽음의 책임을 스물일곱의 강기훈에게 전가했다.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을 방조했다는 사법사상 유일무이한 혐의였다. 최종 무죄가 선고된 것은 24년이 흘러서였다. 진범은 국가였음이 밝혀지던 순간 그는 간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스무 해를 넘도록 되풀이해야 했던 말들을 멈추고, 기타를 들었다. 그리고 1991..

출연 강기훈, 강은옥, 고상만, 권혜진, 김구일, 김선택, 김진숙, 박홍순, 송상교, 송소연, 염규홍, 이보은, 이부영, 이석태, 이옥자, 정현아, 채수진, 최은희, 최재인

영화 홈페이지: http://www.siff.or.kr/siff/program/mov_view.php?mov_idx=1859&fes_idx=36&cate_idx=34087&gubun_idx=&sec_idx=&sch_word=&size=10&page=3

집필, 공부, 그리고 즐거운 딴짓

Posted by on Nov 11, 2017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1. 바빠지면 딴짓을 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오늘은 예전에 집필을 고민했던 <삶을 위한 영어공부 (가제)> 목차안을 다시 들여다 보고 있다. ‘삶’과 ‘영어공부’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나온 기획인데, 대중서로서의 방향을 잡기도 어려웠고 필자로서의 내공 또한 형편없었다. 몇 해가 지난 지금, 분명 할 말은 많아졌건만 ‘내 말들이 가 닿을 수 있는 독자들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 ‘수많은 ‘전문가’들의 사회에서 또 하나의 소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감 또한 커졌다. 어떻게 써도 숭숭 뚫린 구멍이 보이는 증상은 도무지 치료하기 힘든데, 도대체 부끄럽지 않은 글이란 무엇일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책을 쓰는 일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단절을 받아들이는 행위라 느낀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타인을 염두에 두고 베어내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얽히고 섥힌 수십 년 길이의 등나무같은 생각들을 네모 반듯하게 깎아내는 일 말이다.

2. 해커톤처럼 리서치톤이나 라이팅톤, 리딩톤 같은 거 해도 재미있겠다, 라고 쓰려니 이제 그것도 피곤해서 못하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예전에 학술캠프 비슷한 데 가서 2-3일 줄창 책읽고 밤낮없이 세미나만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사람들이라면 단기간 집중 공부로 특정 주제를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게 가능하려면 비슷한 내공과 연구주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시공간을 공유해야 하는데 공부를 업으로 삼은 이들의 경제적 상황이나 일상생활의 패턴을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 음… 현실은 슬프지만 딴 생각은 재미있구나.

“해커톤”은 “hack(‘만들다, 파고들다’라는 뜻)”과 “marathon(장시간의 달리기)”의 합성어로, 혁신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기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직한 행사를 말한다. 해커톤은 보통 하루에서 일주일까지 지속된다.” 출처: http://theconnect.or.kr/wp/archives/914

 

 

어휘의 주관성 – ‘맵다’의 경우

Posted by on Nov 11,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연애 시절,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양파와 고추 몇 개가 찬으로 나왔다. 매운 걸 잘 못먹는 나는 짝에게 물었다.

“이거 매울까요? 겉으로 봐선 잘 모르겠네요. 드셔 보시고 괜찮은지 말씀해 주세요.”
“네네. (잠시 후) 아주 살짝 맵네요. 아주 맵진 않고요.”
“아 그 정도면 저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삭 소리와 함께 매운 맛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입안에 불이 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쌀밥과 물로는 해결이 안되어서 결국 식당을 나와 우유까지 사 마셨다.

언어가 주관적 경험의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함을 보여주었던 에피소드. “자유”나 “사랑”과 같은 추상적 어휘 뿐 아니라 “맵다”나 “짜다” 등의 감각 어휘도 개인차가 지대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 (나중에 보니 짝은 청양고추를 치토스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르르…) 그러고 보면 색상을 표현하는 어휘보다 맛을 묘사하는 어휘에 있어서 개인간 차이가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암튼, 매운 것 잘 드시는 분들. 청양고추 추가해서 드시는 분들. 여러분들은 세계의 표준이 아닙니다. (먼산)

덧: 참고로 생애 최강의 청양고추맛을 능가했던 건 라일락 이파리를 씹었을 때의 충격과 공포다. 궁금해도 참으시기를.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라일락 이파리를 대차게 씹었다가 실제로 죽는 거 아닌가 싶었던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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