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겨울방학 단상

Posted by on Jan 30,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번 방학은 인생까지는 아니어도 강사생활의 터닝포인트로 기억될 것 같다.

생각지 못했던 출판제의를 받아 <어머니와 나>를 마무리하고 있고, 여러 분들의 추천과 응원으로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록을 책으로 내보려고 궁리중이다. 그간의 강의 내용을 대중적인 톤으로 써보기 위해 <브런치> 운영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방학인데 방학이 아니다. 뭔가 많이 하고는 있으나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듯하다.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는 일들은 한가득인데 공부를 통해 지평을 넓히는 일에는 거의 손을 못대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제 오늘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로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서 발딛고 있는 땅을 굳건히 해야 한다. 가르치는 일도, 공부하는 일도, 먹고 사는 일도 흔들리기만 해서는 오래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은 그런 시기일지도 모른다. 제자리 걸음처럼 보이지만 땅을 고르고 숨을 고르고 마음을 기르는 시간.

합리화하지 않고, 선언하지 않고, 호들갑 떨지 않고 살아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권력은 잡는 것이 아니다

Posted by on Jan 30,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권력을 잡다 v.

1.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 (X)
2. 그 어떤 일도 사사로이 해서는 안된다. (O)

그러고 보니 1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술취한 사람과 비슷하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해대니 말이다. 그래서 ‘권력에 취하다’라는 말이 나온 걸까.

‘(자기) 권력을 잡다’가 아니라 ‘(시민의) 권력에 잡히다’를 써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쓰기의 본령

Posted by on Jan 27, 2018 in 과학, 단상, 영어로 글쓰기 | No Comments

(모두 다 연결되어 있지만)’논문쓰기’ 보다는 ‘지식생산’이, ‘지식생산’ 보다는 ‘저자되기’가 좀더 쓰기의 본령에 가까운 개념이다. 써내는 것 보다 만들어 내는 것,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되어가는 것. 논문을 ‘찍어내는’ ‘공장’ 이야기에서 쓰되 만들지 못하는 모습을, 자녀를 공저자로 올리는 약삭빠름 속에서 만들되 되지 못한 사람들을 본다.

논문쓰기 3주차 단상

Posted by on Jan 20, 2018 in 단상,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내가 언제 스무 개 가까이 되는 분야의 진지하고도 열정적인 연구자들 앞에서 강의라는 걸 하겠나’ 싶었다. 별것 아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닌, 몇년 후 각자의 삶이 되고 나면 너무 평범한 것들이라고 회상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 그래도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고민하는 연구자들의 공부에 작은 자양분이 되기를, 내 공부의 우둔하고 우울했던 나날들이 다른 삶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간절하다. 모여주신 분들이 그냥, 많이, 고맙다.

오묘한 메타포의 세계

1. 국물도 없는 집은 진짜 국물도 없다. 다신 안가.

2. ‘넌 이제 아웃(out)이야’라고 말하며 점퍼를 옷장 안(in)에 던져넣었다.

3. 처음부터 답이 다 정해져 있는 사람은 정말 답이 없지.

4. 완전 차갑게 얼린 맥주가 요즘 핫해요.

#오묘한메타포의세계
#오늘의두포스트종합

세상 참 각박해졌네

Posted by on Jan 19,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허기를 급히 달래려 동네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여기 김밥 한 줄만 주세요.”
“네네.”
 
자리에 앉았다.
 
“근데 김밥에는 국물 안나오는 거 괜찮으세요?”
“네 국물을 안주신다고요?”
“네네. 국물 대신 물 드시면 되구요. 다른 메뉴 드셔도 되고요.”
 
메뉴판을 보니 다른 메뉴는 최소 두 배 가격이다.
 
“그럼 다음에 올게요.”
“네네.”
 
순간 허기가 싹 달아났다.
 
세상 참 각박해졌다는 생각.
다음엔 절대 안 갈 거라는 확신.
 
‘국물과 물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구요.’

승패사회

Posted by on Jan 19,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인지언어학, 일상 | No Comments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1980년 그들의 기념비적 저서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서 인간 언어가 기본적으로 메타포적이라 말한다. 메타포가 언어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사고 자체가 메타포적이고 이것이 언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예는 아마도 “ARGUMENT IS WAR(논쟁은 전쟁이다)”일 것이다.

참고로 영단어 argument에는 전쟁을 직접 가리키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으나 한자어 ‘논쟁(論爭)’에는 ‘다툴 쟁(爭)’이 들어가 있으므로 학술적으로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argument의 뜻을 나타내는 데에는 가장 적합한 단어이기에 그대로 둔다.

다음 예들을 생각해 보자. 논쟁에 있어 strong/weak point가 존재하고, 이걸 attack하거나 defense한다.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strategy(전략)를 잘 세워야 하고, 때로는 상대방의 주장을 완전히 뭉개(demolish) 버리기도 한다. 상대의 논지를 하나 하나 깨뜨리는 행위는 shoot down으로 종종 표현되며, 적확하고도 효과적인 비판을 묘사하기 위해 ‘right on targe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알아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위의 표현 모두는 전쟁 상황에 그대로 쓰일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표현이 argument와 war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즉 논쟁을 묘사하는 표현 중 압도적 다수는 전쟁을 묘사할 때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argument는 춤(dance)이나 정원 가꾸기(gardening) 혹은 건물 짓기(building)가 아니라 전쟁에 가깝다. 개념적으로든, 언어적으로든.

레이코프와 존슨의 논리는 간명하다. 전쟁을 나타내는 표현과 논쟁을 나타내는 표현을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라면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으로서의 은유> 전반부는 다양한 예시들을 동원하여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다.

어제 가상화폐 관련 논쟁을 1분 쯤 보다가 껐다. 이후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글을 보니 2/3 이상이 ‘~가 이겼다’, ‘압승’, ‘제압’ 등의 단어를 내세운다. 내가 보기엔 별 의미 없는 평가이지만 실제 투자를 하고 있거나 관련 이슈들을 따라가는 분들은 나름 무게를 두는 듯하다.

토론이 전쟁이라면 승패가 전부일지 모른다. 하지만 토론이 무지를 밝히는 작업이라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가끔 모든 걸 승패로 환원하려는 세계가 두렵다.

교육, 일상을 디자인할 권리

Posted by on Jan 18, 2018 in 단상, 수업자료 | No Comments

국가의 교육을 개혁하려 하기 보다는 학생과 교사들이 그들의 삶을 원하는 방식으로 바꿀 권한을 주자. 백년지대계나 경쟁력 제고가 아닌 배우고 가르치는 주체들이 일상을 디자인할 권리로서의 교육을 상상하자.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Block Chain vs. LinkedIn 그리고 1/N

Posted by on Jan 15,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이제 1/n에서 n이 무한대로 가는 것이구나’와 ‘이거 LinkedIn에서 제공하는 “업무능력(skills)과 이에 대한 보증(endorsements) 기능의 끝판왕인가?”였다. 각각에 대해 부연해 보려 한다.

1. 국가와 기간은행이 쥐고 있던 1/n의 권력을 이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에게 부여하여 1/n의 값을 0에 수렴하게 하는 것. 블록체인의 다양한 측면 중 내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이다.

몇몇 덩치들이, 그것도 엄청난 덩치들이 모여 신뢰를 보장하느냐, 아니면 그 누구도 힘을 쓸 수 없게 만들되 모든 것을 투명하게 관리하여 신뢰를 보장하느냐의 문제이다.

즉, 블록체인의 핵심은 권력과 신뢰의 문제를 수학적으로 풀어내고, 기술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게 돈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아니라 화폐가 작동하는 기반을 바꾸어 낼 가능성이 있느냐가 핵심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화폐경제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라고 쓰고 이걸 SteemIt에 올려야 하나 순간 고민했다.)

2. LinkedIn은 세련된 인맥관리 시스템 정도라고 보면 될 듯하다. 나도 뭔가 싶어서 만들어놓고 잘 들어가지 않는데, 가끔 알림 메일이 뜬다. 누군가가 나의 능력(skill)에 대한 보증을 했다는 알림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필자가 “Academic Writing”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해 30여 명이 보증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링크트인의 찌름(nudge)을 당해) ‘자발적으로’ 보증한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방식의 보증, 즉 특정대학이나 교육프로그램의 보증 방식과는 다르다. 몇몇 ‘덩치들’이 발급하는 졸업장과 수료증으로 대표되는 인증방식에서 벗어나 주변인들과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확인해 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능력을 부풀리기로 작심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서로 인증을 해준다면? 자화자찬 난리법석 속에서 모두가 멋진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일종의 집단사기극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숫자를 거의 무한으로 늘린다면 어떨까?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작당할 이유도, 공모할 방법도 없게 만들어 버린다면?

최근의 블록체인 광풍과 관련해서는 네 가지 정도의 생각이 든다.

1. 최근의 투기열풍을 보면서 떠오른 건 우습게도 인터넷의 대중화 초기 ‘.com’ 도메인 구입 경쟁이었다. 별것도 아닌 도메인의 가격이 치솟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도메인을 사모았다. 그걸로 돈을 꽤 번 사람도 있지만 쌓아놓은 도메인이 처치곤란해진 사례가 훨씬 많았다. 이 시기와 이후 닷컴버블 붕괴의 경험을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닷컴비즈니스의 어두운 면만은 아니다. 서울비Lee Jun Seop가 말했듯 닷컴은 붕괴했지만 인터넷이라는 기술은 살아남았고, 이 기반 위에서 세계가 돌아가고 있다.

버블을 제거하고 땅을 다지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2. 현재의 투기열풍은 분명 문제다. 정부가 그냥 손놓고 있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합법/비합법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이 사태에 대응하는 것은 실로 나이브하고 무책임한 것도 사실이다.

열풍의 밑바닥에는 특히 젊은 세대의 사회경제적 박탈감이 자리잡고 있고, 이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탈법적’ 투자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법 내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시스템이 지탱하지 못하는 생존에의 욕구는 어디론가 터져나가게 되어 있다.

3. 정부 정책기조 중 하나가 4차산업혁명 아닌가? 소위 ‘4차산업혁명’의 외연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라도 블록체인 기술을 투기의 관점으로만 파악하기 보다는 새로운 플랫폼이 권력과 신뢰 시스템에 미칠 영향을 신중히 검토하며 그 순기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하지 않을까?

4.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인터넷 초기의 흥분이 그랬던 것처럼 블록체인은 우리가 거대한 세계의 일원이 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나는 동네 주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블록체인은 기존의 중앙집권적 경제시스템과 비교할 때 분명 아나키적 요소가 다분하다. 하지만 이는 다시 공동체의 작동방식으로서의 아나키를 배반하는 듯하다.

덧.
얼마 전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낸 소결론은 이거였다.

“결국 기본소득이 중요하다.”

글쓰기 고수

만약 “글쓰기 고수”라는 게 있다면 최고의 비법은 아마도 서두르지 않는 힘일 것이다. 글은 표현(ex-pression)이지만 표현의 힘은 오랜 시간 자신의 내부를 압박(in-pression)하는 데서 나온다. 차오를 때까지 응시하는 일. 내보내기 위해 쓰지만, 내보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한 글쓰기 하수다. 온전한 글로도 모자랄 이야기를 몇 줄에 담아 내보내려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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