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 vs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Posted by on Jan 10,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술리터러시 발달과 관련된 논문을 썼지만 주 관심사는 메타포였다. 처음에는 인지메타포 이론을 깊이 가르치지 못해 아쉬웠다. 최근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에겐 중요할지 모르지만 학계에서 읽기쓰기를 배워야 하는 이들에게 메타포는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시험에 안나온다. 나에겐 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사소한 것이다.

개념을 이야기하는 글과 소소한 표현 정리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고 모두에게 가 닿는 것은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왜 그리 섭섭하던지.

교육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를 중심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구축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집착이었을까? 혹시 오만함은 아니었을까?

소소한 영어공부, 천천히 읽기, 뒤집어 보기, 삶을 녹여낸 이야기 만들기… 이런 것들을 고민하게 된다. 힘껏 가르치고 나서도 가슴이 뻥 뚫린 듯 허한 수업은 점차 줄여가련다. 그래도 먹고 살 수 있다면 말이다.

방학하고 나서 뭘 그리 계속하느냐고, 제발 좀 놀라고 했는데. (주어 없음) 오늘 도대체 쪽글을 몇 개나 쓴 거냐.

자기계발의 속도와 삶의 속도

Posted by on Jan 10, 2018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죽도록 자기계발하기”
제목이 선정적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저녁과 주말 내내 아르바이트를 한다. 야근이 일상인 사람들도 많다. 그 와중에 끊임없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달린다. 잠깐 숨을 고를라 치면 앞서가는 사람들이 이만큼이다. 자신이 한심하다. 쉼은 도태다. 도태되면 혼자이고, 혼자는 외롭다. 빈곤과 외로움은 더이상 인생 말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멈추지 않는 트레드밀의 뒤는 낭떠러지다.

하지만 Alexandra Schwartz의 말처럼 “세상 따라가지 말고 너 자신이 되어라” 같은 조언은 불편하다. 우리를 몰아가는 것은 환경이고, 이를 그대로 놔두고 개인만 변하라는 것은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라는 요구 만큼이나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냐는 질문에 답할만한 지혜도 자격도 없다. 다만 속도의 문제에 대해서는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

정보는 엄청나게 증가한다. 기술은 숨가쁘게 발전한다. 지식의 양은 증가하고 전문성의 영역은 좁고 깊어진다. 휘몰아치는 변화다.

하지만 인간의 심장이 뛰는 속도는 일정하다. 인간이 감정을 처리하고 반응하는 속도도 일정하다. 의미있는 사회적 관계를 영위할 수 있는 지력과 사회적 능력 또한 폭발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요약하면 인간의 몸과 그에 의존하는 다양한 능력들은 진화의 속도를 따른다.

사회는 변화의 속도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속도에 대해 침묵한다. 호흡하고 소화하는 속도에 대해, 심장이 뛰고 걷는 속도에 대해, 세상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속도에 대해 모른척한다.

‘자기계발의 요구를 모두 거부할 수는 없겠지. 다만 그 가운데 더 근본적인 리듬을 잊지 말자.’고 읊조린다.

진짜 중요한 속도에 대한 감각이 절실하다. 성공이 아닌 삶에 대한 감각, 기술이 아닌 몸에 대한 감각 말이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8/01/15/improving-ourselves-to-death

감수성교육 단상

Posted by on Jan 10,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명사에 한정하여 볼 때) 생각은 ‘들기’도 하지만 ‘할’ 수도 있다. 느낌은 ‘들’ 수는 있으나 ‘할’ 수는 없다. 소위 감수성 교육은 이 둘 간의 비대칭에 주목하고 이를 넘어서야 한다.

이를 위해 (1) ‘드는’ 느낌을 비판적으로 사고하여 ‘하는’ 느낌으로 변화시키고, (2) 내 안에 파고드는 느낌의 근원을 파헤치고 맞서는 작업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눈빛이 흔들린 건 단지 그가 슬퍼서만은 아니다. 별것 아닌 것에 눈물 흘리는 것 또한 그저 호르몬 불균형 탓이 아니다. 시대의 잔혹함과 비참이 작디 작은 단어 하나와 만나 인간의 얼굴로 터져나온 것이다.

느낌 이면의 거대한 권력과 마주할 때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감수성교육은 세밀한 떨림을 통해 권력의 역사를 보게 한다.

그런 감수성 교육이 절실하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2018년 영어논문쓰기 1강을 마치고

1. 언젠가 영어논문쓰기 강좌 수강생들께 질문을 했다. 논문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분이 있는지. 대부분 대학원생이었고, 전공은 다양했다. 예상대로(!) 단 한 사람도 논문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분명 이 샘플링에는 큰 문제가 있다. 영어논문쓰기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니 안배운 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이 대답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1) 한국어 논문쓰기도 배워본 적이 없고,
(2) 논문쓰기 강의를 안들었다기 보다는 그런 수업이 없어 못들었다는 취지였기 때문이었다.

2.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리터러시 연구자/교육자들이 종종 던지는데 사실 내겐 참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다. 가르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 데까지 가르치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각자의 길을 가도록 하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모든 면에서 존경스러운 지도교수와 함께 공부했음에도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었다. 텍스트에 대한 피드백은 종종 받았지만 연구, 논문, 학계, 논쟁, 소통 등에 대한 큰 그림을 배우진 못했다.

4. ‘아니 그런 걸 누가 가르쳐 주느냐, 네가 알아서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답답해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썼고, 직접 강의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별것 아닌 강의이지만 ‘대학원생 모두가 들어야 하는 강의’라는 찬사도 적잖이 들었다. 이런 응원의 목소리 덕에 지금도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5. 3년 째 영어논문쓰기를 가르치면서 대략 200여 명의 대학원생과 연구자들을 만났다. 그중 한 사람도 대학원생으로서 논문읽기와 쓰기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 담장 밖 논문 관련 사교육의 발흥은 참으로 개탄할만한 일이지만 리터러시교육이라는 대학교육의 핵심목표를 대학 스스로 외면한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6. 법률가는 법률가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행정가는 행정가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연구자는 연구자처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결국 다양한 영역에서의 전문성은 그 분야의 지식을 소화하여 말하고 쓸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한다.

7. 지금의 대학이 학생들이 지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꼭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8. 이런 단상을 남긴 게 여러 번이다. 적어도 지난 5년 여 대학의 학술리터러시 관련 강의와 정책에서 이렇다할 변화를 목격하지 못했다. 매학기 강의에 깊이를 더하는 일부 교수자들의 개인적 시도 외에는 말이다. 그저 내가 과문한 탓에, 활동영역이 좁디 좁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뉴욕타임즈-PBS NewsHour 북클럽

Posted by on Jan 4, 2018 in 링크, 삶을위한영어공부 | No Comments

뉴욕타임즈와 PBS NewsHour의 공동 북클럽 프로젝트 Now Read This. 아래 링크한 Now Read This 커뮤니티에 가입한 후 책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저자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고 한다.

북클럽의 첫 책은 Jesmyn Ward의 소설 <“Sing, Unburied, Sing>. 보통 언론의 서평 대상이 될 책을 고르는 기준과는 조금 다르게 현재 미국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를 다룬 책을 선정한다고. 참고로 Jesmyn Ward는 두 차례에 걸쳐 National Book Award 소설부문 당선작을 낸 최초의 여성작가다. (2011, 2017)

https://www.facebook.com/groups/NowReadThisBookClub/about/

삶을 위한 영어공부 브런치

2018년 한해, 영어교육에 관한 그간의 고민과 강의자료를 정리하여 컬럼 형식으로 써낼 예정입니다. 여러 분들께서 추천해 주신 브런치를 택했고, 발행시마다 페이스북에 소개드리려 합니다. (페이스북이 여러 분들을 뵙기에는 좋은데 글을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닌 것 같아서요. ^^)

제 브런치 주소는
https://brunch.co.kr/@literacy 이고,
(브런치를 하시는 분들은 그곳에서 또 뵙겠네요. ^^)

아래는 여는 글입니다.
https://brunch.co.kr/@literacy/1

고맙습니다.

그날이 오면

Posted by on Jan 1,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그날’은 오지도 안오지도 않아.

지금 살아있는 그리고 기억되는 우리 모두가

그날의 ‘1/n’일 뿐.

순간 순간 우리의 선택이

그날을 불러내기도, 거둬들이기도,

욕되게도 하지. — <1987>을 보고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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