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논쟁 단상

Posted by on Feb 26,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단상 (대부분 저를 위한 리마인더입니다.)

하나. 말의 무게를 모르는 언론, 삶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하는 정치. 그들은 ‘소통’하고 ‘상생’합니다.

둘. 삶이 아무리 무거워도 말을 정성스레 고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말이 타인의 삶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 속에서 체화했기 때문입니다.

셋. 가끔은 “정말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가 가장 적절한 말입니다. 슬픔과 고통에 반응하기 위해 강력한 수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곁에 서는 것으로 족하지요.

넷. 진영권력을 전복하려는 결단을 다시 진영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여야 합니다. 진영을 해체하여 모두의 일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다섯. 여전히 타임라인의 ‘논쟁’에는 남성의 목소리가 압도적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여섯. 누군가의 의견을 ‘몇 살 짜리의 능력’으로 폄하하는 것은 자신의 미숙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세상을 훌륭하게 읽어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은 많습니다.

일곱. 수천 년 스케일의 싸움과 수십 년 스케일의 싸움이 겹쳐 보입니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의 틀 안에 수천 년을 가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 ‘잘 읽어낸다’는 건 무슨 의미일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Good+bye vs. Fare+well: 유의어는 유의어가 아니다

Goodbye와 Farewell은 유의어다. 물론 평소에 “Farewell!”로 친구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없으니 Goodbye의 쓰임이 훨씬 광범위하고 구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의 의미차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우주여행을 떠나는 배우자에게 하는 인사라면 어떨까? 아래 방송의 문맥에서 Goodbye와 Farewell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PETTIT: And I assured Don that I believed in what he was doing and I would be OK. And we held each other and you know, it was kind of like, this could be a goodbye.
PETTIT: Goodbye but not farewell.
 
“Farewell”은 Fare+well의 결합이다. Fare에는 ‘여행하다’, ‘여정을 떠나다’라는 뜻이 있고, well은 ‘잘’이라는 의미다. 여정에 어려움이 없길 바란다는 뜻이 담긴다.
 
이에 비해 (위 문맥에서) “Goodbye”는 말 그대로 작별인사다. 더 이상 서로를 볼 수 없는 상황, 영원한 이별 말이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비슷한 말의 거리가 벌어질 수 있다. 맥락에 따라 사전에 등재된 반의어(antonym)들의 거리가 재조정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

[잡생각] “시간이 흐른다”를 대치할 메타포에는 무엇이 있을까?

1.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끊기지 않는 흐름임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2. 흐르는 것의 대표로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강이 아닐까?

3. 시간에 대한 표현을 생각하니 ‘Time flies.’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외에도 시간은 come, go, pass, approach, leave, run, elapse, remain, walk, crawl 등을 할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많겠지만.)

4. Time을 주어로 생각하면 시간이 흘러가고, 날아가고, 오고 가며, 지나고, 다가오고, 떠나고, 달려가고, 지나가고, 남아있고, 걸어가고, 기어가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를 듯하다.

5. 개인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간이 가는 일은 인생의 수많은 요소들이 다시 구획되고(rearticulated), 재영토화되며(reterritorialized), 재개념화되는(reconceptualized) 일이다.

6. 다양한 재구획화, 재영토화, 재개념화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과 정확히 맞물리지 않는다.

7. 먼 과거가 미래가 되기도 하고, 현재의 시간이 철저히 과거로 느껴지기도 한다. 물리적, 심리적, 개념적 시간들이 중첩되고 간섭하면서 인간의 시간을 엮어간다.

8. 실타래처럼 엮인 개인의 시간들이 일정한 질서를 형성할 때 역사적 시간을 빚어낸다. 하지만 역사의 공간성은 또다른 시간을 빚어낸다.

9. 산책 길에 만난 스팸 선물 박스. 나는 스팸문자와 메일을 떠올렸다. 잠시 후 또다른 스팸 포장지가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후자의 스팸 포장지는 처음 발견한 스팸 박스와 겹쳐졌다. 아니 처음 것이 후자에 겹쳐진 걸까.

10. 물리적 시간은 우주와 함께 흘러가지만 경험의 시간은 뇌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엮인다.

11. 우리는 우리 몸 안팎의 네트워크의 연결/위상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감지한다.

12. 오늘이라는 시간은 내/네 인생과 어떻게 엮였을까? 해가 기울어지는데 오늘이 외톨이 노드로 남을/잊혀질/버려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론: 오늘이라는 시간이 영원히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을 엮어보자.

유사공정(類似公正, pseudo-fairness)

Posted by on Feb 12,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공정’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많다. 공정을 따옴표 안에 넣은 것은 단어를 인용한다는 뜻과 함께 공정이 아닌 것이 공정이라 불린다는 뜻도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정’이 가장 언급되는 경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의에서인 듯하다. 비정규직 공무원, 인천공항 노동자, 비정규직 교사 등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질문이다.

(최근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글이 다루려는 주제는 아니다. 언급한 ‘공정’의 대표적 용례는 아래 기사 참조.)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려다 취준생 기회 박탈… 이게 공정한 나라냐” (한국경제)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21118271

난 이 기사의 제목이 우리사회의 ‘유사공정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다소 이상적이라고 불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공정’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개념이다. 노동자 전체, 나아가 모든 시민을 포괄하는 공정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의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는 공정은 필연적으로 ‘강요하는 자’와 ‘강요받는 자’라는 불공정한 위계구조를 생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논의는 공정의 적용 대상을 취준생과 비정규직으로 손쉽게 규정한다. “비정규직 눈물 닦아주려다 취준생 기회 박탈… 이게 공정한 나라냐”에서 공정의 잣대 아래 놓이는 집단은 취업준비생과 비정규직 뿐이다. 정규직은 어디 있는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이들은 어디 있는가?

특정한 집단–위의 경우에는 노동(가능)계층에서 약자 집단–만을 문제삼는 ‘공정성’ 논의는 공정의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정규직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공정함이 과연 ‘공정함’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정규직이 공정 논의에서 열외일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정규직 공채(시험) 통과 여부’이다. 이 외엔 그 어떤 기준도 없다. 과거에는 소위 ‘좋은 대학’에 가서 한 평생 덕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이젠 ‘시험에 통과했으니’ 공정함의 기준을 모두 만족시켰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가 이들과 같이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다수가 ‘공정 열외 패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공정은 유사공정(類似公正, pseudo-fairness)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묻고 싶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공정함은 얼마나 공정한가?
그것을 ‘공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언어 정보의 잉여도(redundancy)와 스포츠 중계

얼마 전 밥을 먹으며 올림픽 중계를 흘려 듣는데 해설자의 다음 말이 엄청 크게 들리더군요.

“이 기술은 마스터하면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음……..

특정 기술을 마스터(master)한다 함은 그것을 수행할 때 신체의 모든 영역이 특별한 어려움 없이 완벽한 협응(coordination)을 이룬다는 의미이니 당연히 쉽겠죠. 비슷한 표현으로 “완치되면 안아픕니다.” “다 쓰면 세제가 없을 거예요.” 같은 게 있으려나요.

스포츠 경기 해설에서 유독 이런 문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뻔한 이야기 말이죠.

“이 기술은 마스터하면 쉽습니다” 같은 문장에는 새로운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언어신호의 양에 비해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겁니다.*

이게 스포츠 해설만의 문제는 아니고, 언어체계의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대충 이야기하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같아도 이를 전달하는 언어는 구정보(old information)와 신정보(new information)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정보로만 된 언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수식으로만 되어 있는 이론물리학 페이퍼를 읽는 상황은 거의

신정보만 접하는 예입니다. 신정보의 바다에 빠지면 ‘한 개도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죠.

때로는 동일한 정보를 살짝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이해를 돕기도 합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위 별표(*)한 문단의 두 문장은 이 방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신호량에 비해서 새로운 정보의 양이 적을 때 잉여도(剩餘度, redundancy)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언어 외에 ‘남아도는’ 언어신호가 많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잉여도가 높으면 나쁜 걸까요? ‘용건만 간단히’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통용되는 금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보의 정확한 전달이 중요한 경우 잉여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항공관제탑과 파일럿 간의 소통입니다. 주요 정보를 몇 번이고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지요. ‘잉여’ 언어신호가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집중력, 정보 저장 능력, 인출 능력 등에 한계가 있기에 잉여 정보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정보의 입장에서 보면 잉여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주도면밀함’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스포츠의 경우로 다시 돌아오면 언어의 정보량이 떨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 반드시 성공해야 역전이 가능하죠.”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데 지고 있으니 당연합니다.) 같은 해설이 적지 않다는 겁니다. (이 문단 전체가 잉여…)

하지만 스포츠 해설에 있어서 전달되는 정보의 상당 부분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에서 골이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골을 넣는 장면과 거의 동시에) 골이예요. 골! 골! 골! 골~~~~~ 아 아 골~~~ 골! 골! 드디어 첫 번째 골이 들어갔습니다!!!”

시청자들은 소리와 화면으로 골이 들어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골이라는 것도 모르기 힘들고요. 이 상황에서 저 말의 정보량은 제로에 가깝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해설자의 흥분과 기쁨, 놀라움을 전달합니다.억양이나 고저, 장단과 같은 자질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요. (예: 골!이 아니라 고~~~~~~~~~~~~ㄹ)

이는 ‘경기 해설’이라고 불리지만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서적 반응만으로 훌륭한 ‘해설’이 되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골이 들어가는 순간 해설자는 해설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 같네요. ^^

이번에는 간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받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성우: “어, 철수야. 오랜만이네. 왠일루?”

철수: “그냥.”

여기에서 “그냥”이 자체로 담고 있는 인지적 정보는 작습니다. 하지만 간만에 전화를 한 상황에서 ‘그냥’은 상당히 높은 정서적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냥 전화해 주는 친구가 최고라고 느껴질 때도 있죠.

결국 언어는 구정보와 신정보를 적절히 담고 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상황에 따라서 구정보가 의도적으로 반복되기도, 정서적 정보가 증폭되어 전달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구정보와 신정보, 인지적인 정보와 정서적인 정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입니다.

이 상황에는 매체적 특성도 포함되는데, 글과 면대면 강의, 동영상 강의 등에서 단위 시간당 효율적 정보량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쓰다 보니 글의 잉여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만 쓰고 잉여의 삶으로 재진입해야 하겠습니다. 모두 조금은 잉여스러운 오후 시간 되시길 빕니다. :)

 

영어로 논문쓰기, 한 해를 되돌아보다

한해 동안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영어로 논문쓰기> 대중강의가 시작된지 만 1년이 지났습니다. 10주간의 커리큘럼을 4주(12시간) 분량의 강의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완료되었고, 네 번째 기수의 수업이 진행중입니다. 요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게 됩니다. 크게 세 가지 일을 구상/진행중입니다.

(1) 강의록을 보강하여 책으로 발간

(2) 압축버전을 동영상 강의로 제작

(3) 인문사회분야라는 다소 넓은 영역에서 개별 학문 영역으로 세분화 (e.g. 응용언어학, 영어교육, 보건학, 경영학 등)

학술리터러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들과 만나면서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여러 대학원생들과의 이야기 가운데 연구자들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이 충분히 가치있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하나하나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지만, 생각을 놓지 않는다면 함께할 인연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리 대단할 것도 없지만 업신여겨서도 안되는, 따로 또 같이, 부드럽고 또 날카롭게, 세상을, 관점을, 마음을, 진실을, 비참과 희망을 담아내는 글. 딱 삶만큼 무겁고 그만큼 시시한 글을 꿈꾸어 봅니다.

 

영어, 쉽게 쓰면 장땡인가?

쓸데없이 어려운 수능지문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영어는 간단히 말하면 장땡’이라는 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뭐 간단하게 말하며 장땡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다음 표현 중에서 맨 위의 것들만 골라서 쓰시면 되겠지요.
 
Shut (the xxxx) up!
 
Be qutet.
 
Can you be qutet?
 
Please be quiet.
 
Could you please be quiet?
 
Your quietness/silence is requested.
 
We would like to request your silence.
 
Your silence is cordially requested.
 
We would appreciate it if you could temporarily keep your urge to talk.
 
I am not sure whether you would agree with me. But as far as I know it is usually the case that people keep quiet while the speaker gives their speech.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같지는 않죠. 아니 꽤나 다릅니다.
 
저 또한 되도록 적은 단어로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확함(accuracy)’이라는 게 의미의 뼈대만 전달하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면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어 신호의 전달자(message deliverer)이기도 하지만 관계와 맥락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니까요.
덧.
 
특정한 표현이 반드시 특정수준의 공손함에 대응하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Quiet please”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으므로 대인관계에서 피하는 것이 안전하지만 테니스 구장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적 인식의 변화(테니스장에서 좀 떠들면 어때?)가 수반되면서 그 쓰임의 적절성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아래 기사는 이 점을 보여준다.
 
http://www.espn.com/tennis/story/_/id/17479201/us-open-quiet-please-silence-becoming-thing-in-tennis

공부, 앎, 무지, 그리고 감(感)

Posted by on Feb 6, 2018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공부를 할수록 앎은 커진다. 이것은 지식의 양, 개별 지식간의 관계, 지식과 세계의 사태와의 조응 등의 영역에 적용된다.

앎은 채운다. 마음이 차오른다.

2. 하지만 동시에 무지 또한 커진다. 앎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은 무지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커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밤하늘의 별, 그 너머를 보는 자신은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3. 역설적이게도 무지에 대한 자각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앎은 자유를 배반한다.

4. 알 수 없는 것들은 많아지지만, ‘아닐 것 같은 것’들에 감각은 자라난다.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미심쩍은 것들, 그럴듯해 보이지만 치렁치렁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것들을 감지하는 능력 말이다.

5. 아는 것은 산술적으로, 모르는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 가운데서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갖는 능(能)은 조금씩 성장한다.

6. 의심의 틈이 생긴다는 건 빛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부터는 그 빛이 우리를 이끈다.

7. 이 과정에는 근본적 역설이 있다. 빛을 보고 틈이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틈을 감지할 때 빛이 들어온다는 것.

일상 스케치

Posted by on Feb 5,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추위를 헤치고 2014년 영어지도법 수업을 들었던 친구가 찾아왔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몇년 간의 서로의 삶에 대해, 메모와 쓰기 습관에 대해, 선생으로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어려움에 대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2. 그가 임용고사에 대해 던진 다음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요즘도 임용고사 수업 실연에서 백묵 들고 필기하면서 수업을 합니다. 딱 그 포맷으로만 해야 되는데요. 판서를 잘 하는 게 상당히 중요하더라구요. 판서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게 영어수업 실연에서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겠어요. (영어과의 경우) 오히려 파워포인트라든지 다양한 동영상이라든지 그런 걸 잘 활용하는 게 훨씬 중요할텐데 말이죠.”

3. 몇 가지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1) 새로운 교육과정은 미래학습자 역량을 중시하며 그 중에서도 공동체 역량, 협력 역량을 강조한다. 그런데 협력이나 공동체 역량은 객관적 평가가 힘들고, 평가를 한다 해도 ‘무임승차자’가 있어 학생들이 기피한다.

협력이 중요하다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을, 구조를 디자인해야 한다. 구호를 외친다고 사람이 바뀌진 않는다.

2) 영어 말하기 수행평가 중 널리 활용되는 포맷으로 대화(dialogue)나 본문 일부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기가 있다. 음성으로 나오는 것이기에 ‘말하기’ 혹은 ‘의사소통’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평가의 타당도를 희생시키는 객관성은 어떤 의미가 있나?

3) 외국어로 영어를 배운 성인들이 글쓰기를 할 때 사실상 100% 인터넷 검색이나 참고도서, 혹은 사전을 활용한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 또한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며, 이런 능력이 쓰기 능력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쓰기 평가의 경우 백지에 연필로 작성하거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한 포맷이 자주 사용된다.

다양한 중재도구(mediational tools) 없이 쓰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그렇다면 안경을 벗고 시험 문제를 풀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4. 그땐 선생과 학생이었지만 이젠 그도 교사로 살아가기에 내가 도리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마음이 닿아 만나고 또 고마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고마왔다. 마음 가는 것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

그래서 만남은 언제나 기적이 아닐까.

논문지도(?) 업체 단상

몇주 간 논문쓰기 강의 이야기를 해댔더니 타임라인에 논문지도(?)나 논문컨설팅(?) 업체 광고가 여럿, 그것도 꽤 자주 뜹니다. 페북 알고리즘 지능의 한계에 대해 알 수 있는 대목이죠. :)

이전에 들어본 업체는 ‘OO펜’ 하나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시장인가 봅니다. 그런데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제가 하는 건 특정 논문에 대한 지도도 컨설팅도 아닙니다. 제가 (응용언어학의 일부 분야 외에) 그런 걸 할 수 있을리가요. 논문지도나 컨설팅은 지도교수 및 심사위원들께 받는 게 맞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