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좁은 사람의 잡담 몇 개

Posted by on Mar 26, 2018 in 말에 관하여, 일상 | One Comment

1. 종종 타임라인에 공유되는 ‘명언’ 중에 “Great minds discuss ideas;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small minds discuss people. (위대한 사람들은 사상을 논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이야기하며, 작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라는 Eleanor Roosevelt의 말이 있다. 원문을 확인해 보지 않아 이 문장이 나온 정확한 맥락은 모르지만, 날이 갈수록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이야말로 사람들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려는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없는 사상’ 보다는,’사상 없는 사람’의 편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런 양극단이 존재할리 없겠지만, 굳이 고르라면 말이다.)

2. <위플래시>의 플레처 교수의 훈육법에 대해 ‘저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술가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해’라며 동의하는 분들이 있다. 플레처 같은 선생이 없으면 한계를 뛰어넘는 예술가가 어찌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앤드류의 신들린 연주 장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플레쳐의 옛 제자 케이시를 보았다. 통쾌하지만 슬펐고, 아름답지만 무서웠다. 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을 보고 싶어 하는가? 그렇게 태어나는 ‘천재’의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나? 한계를 뛰어넘은 예술은 한계를 넘지 못한 이들의 아픔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3. 돌아보면 남에게 모질지 못했던 만큼, 목숨걸고 어떤 대상에 진력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배움은 언제나 애매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영어도, 사진도, 음악도, 글씨도, 심지어는 전공이랍시고 한 응용언어학까지 말이다. 이런 얄팍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계에 도전하지 못했던 나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4.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살아온 나를 지탱해 준 것은 늘 사람, 사람이었다. (남들에겐 별것 아닐지 몰라도) 두어 차례 큰 고비가 있었고, 그때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도움의 손길들이 큰 사상에 기대있었는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날 버티게 한 힘은 약속도 댓가도 없는 함께함의 가치를 알았고, 무엇이든 쪼개어 주길 좋아했으며, 사소한 다침으로 마음을 닫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거창한 아이디어(ideas)를 좇았다기 보다는 못나디 못난 인간(people)을 받아주고 견뎌낸 친구들이었다.

5. 적어도 내게 위대한 영혼은 사람들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속좁은 나에게 위대함은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있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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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오늘 쓴 글을 다시 읽는다. 사상과 이론을 공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닮으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속은 좁은 것 같다.

생활의 지혜: Reaction Paper 편

Posted by on Mar 25, 2018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 No Comments

Reaction paper를 낼 때 유의할 점:

1. 논문을 안읽고도 쓸 수 있는 글을 내지 않습니다. (Re-action은 무엇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냥 혼자 action을 취하지 말아 주세요.)
2. 단순 요약문을 내지 않습니다. (초록보다 나을 게 없는 글을 왜 굳이 내려고 하시나요?)
3. “흥미로왔습니다”, “좋았습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별로였습니다” 따위의 반응은 마움 속에 고이 간직합니다. (“할 말이 없을 때 ‘That’s interesting.’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죠.)

저도 오래 전에 이럴 때가 있었겠지만…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줄탁동시

Posted by on Mar 24, 2018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교육에서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와 협업에 기반한 배움을 이를 때 종종 쓰이는 사자성어다. 하지만 나는 문구를 볼 때마다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는 변증적 세계관을 떠올린다. “세상이 바뀌려면 내가 변해야 하는가? 사회야 변해야 하는가?” 정답은 “동시에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아닐까? 나의 몸과 마음은 철저히 사회적이고, 사회는 수많은 몸과 마음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영어-학습-자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 영어학습자를 대함에 있어서 ‘영어’에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영어’ 보다는 ‘학습’ 전반이, ‘학습’ 보다는 ‘자者’ 즉 사람의 문제가 더욱 근본적이다. 이런 면에서 영어교육전문가의 전문성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면 사람보다 공부를, 공부보다는 영어를 중심에 놓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수포자’, ‘영포자’, ‘과포자’ 등의 명명은 현상의 근원에 닿지 못하고 개별 과목 중심의 사고를 강화한다.

총체적 관점을 이야기하면 개별 교과의 문제도 풀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별 교과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총체적 관점 즉, ‘인간으로서의 발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with 철

미디어 활용 교육

미디어 활용이 리터러시 교육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기술을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컨텐츠를 만들고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 활용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특별한 이견은 없다.

하지만 종종 ‘활용’에만 골몰하는 교육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교육은 미디어를 활용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류 메신저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메신저를 활용한 소통도 중요하지만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중요하다.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술 바깥의 삶에 대해 상상해 보는 일 또한 소중하다.

언젠가 ‘~할 수 있다’는 진술로 구성된 교육목표(Can-do statements)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교육의 목표가 일련의 ”Can-do statements’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진술들 행간에 존재하는 ‘Can’t-do statements’를 이해하는 것이라 믿는다. 할 수 없음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목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 글을 쓰고 나니 갑자기 고정희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별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내 맘 속에서는 분명 통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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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탄핵 1주년

Posted by on Mar 10, 2018 in Uncategorized, 단상, 일상 | No Comments

새벽까지 일하다가 천근만근 몸을 뉘였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꿈속에서도 전에 일했던 직장들을 전전하며 또 일했다. 퇴근 후 광장에 나가 “이제 다시 시작이다!”를 외쳤다. 잠에서 깨어나 어제 보내기로 해놓고 까맣게 잊은 자잘한 서류들이 생각났다. 딱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몸상태로 너무 오래 달려왔다. 쉬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내일 오전에 있다.

나는 수업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힐끔거리며 핸드폰을 본다. 한 학생과 눈이 마주친다. “그냥 궁금해서요.”라며 씨익 웃는다. 삽시간에 교실 전체가 들썩거린다.

“잠깐 쉬었다가 하죠.”

복도로 나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눈물을 흘린다.

수업 후반부가 시작된다. 나는 힘주어 말한다.

“오늘 수업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2017.3.9.

탄핵심판 하루 전 썼던 글. 한 해가 지났고, 그간 큰 변화가 있었지만 하루하루의 일상은 여전하다.

누가 누구를 높이거나 숭앙崇仰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에게 박수쳐 줄 수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몇몇 사람들이 삶을 통째로 갈아넣어야만,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써야만 가능한 변화 따위는 없는 세상이 오길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언제나 그랬다.

상호복수, 그리고 “우리가 친구가?”

 

예전에 “상호복수”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여러 표현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shake hands with someone’에서 hands가 복수인 이유는 손이 두 개라서라고 하죠. (물론 두 사람 모두 양손으로 악수를 하는 경우 네 개가 되겠죠.) 다른 예로 take turns / change seats 등이 있습니다. be on good/friendly terms with someone도 있군요.

페이스북에서 이미 친구가 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친구 수락을 누르니 이렇게 나오네요. You are friends with this person. – 상호복수 문법에 따르면 상대와 나를 포함하기에 ‘friends’라는 복수형을 쓰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문법적으로는 이런데 페이스북의 “unfollow’ 기능을 생각해 보면 개념적으로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분명 친구 사이이지만 unfollow를 할 경우 상대방의 소식이 사라지기 때문이죠.

즉, A는 B의 소식을 보지만, B는 A의 소식을 보지 않게 되는 ‘정보 비대칭 (실은 정서 비대칭)’의 상황이 되는 겁니다. 상호친구 사이에서 일방적인 친구 사이가 된달까요?

이 상황에서 ‘상호복수’ 개념은 그야말로 껍데기 느낌입니다. 정리하면 이런 거죠.

You are friends with this person. However, the person is not friends with you.”

저 unfollow 하신 분들은 이거 안보이실 듯. :)

변증적 성격을 지닌 부정관사

영어 부정관사 a(n)은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층위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어떤 개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He has a cat. It is very cute.”

여기에서 ‘a cat’은 고양이 한 마리라는 뜻입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양이 중 하나인 것이죠.

2. 이에 비해 “a + 명사”가 한 개체가 속한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은 경우입니다.

“A dog is a great partner in your life.”

이 경우에 “A dog”은 ‘개 한 마리”라기 보다는 “개” 즉, 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과 2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닙니다. 개별 안에 일반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특수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요소 즉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죠.

이런 면에서 “a(n)”의 의미는 변증적(dialectic)입니다. 집단에 속해 있는 하나의 멤버 (one member) 이지만, 때로는 그 집단 전체를 가리킬 수 있으니까요.

#관사공부중

A second thought

Let me give it a second thought.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보태어 봅니다.

“The only”도 그랬지만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와 같은 표현들도 깨져서는 안되는 법칙으로 배웠습니다. 이는 “서수 앞에는 the를 붙여라!”는 구호(?)로 정리되었죠. 하지만 이 공식에는 헛점이 있습니다.

제가 첫 문장에서 쓴 “a second thought”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는 “~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다” 정도의 뜻으로 “a second thought”와 같이 부정관사를 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차이 또한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Give something a second thought”에서 “second”는 ‘다시 한 번’ 한번 더’ 정도의 의미입니다. 서수적인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미상 차이가 있는 것이죠. “take a second look(다시 보다)”과 같은 용법도 비슷합니다. 만약 우주선을 만드는 팀의 디렉터가 “Nobody deserves a second chance here.”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두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정도가 되겠죠. 우주선이 폭파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니 한번 실수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학술논문에서 생각나는 예는 “a second limitation”과 같은 표현있습니다. 연구의 한계를 논의하며 “두 번째 한계로는…”과 같이 이야기할 때 쓸 수 있는 어구죠. 이 경우에는 한계점이 몇 있는지 언급하지 않고 “첫 번째 한계는…이다. 두 번째 한계는…이다.”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특정 대상의 수가 N으로 한정되어 있고, 이에 대해서 “첫째, 둘째, 셋째… N번째”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면 서수 앞에 모두 the를 붙이는 것이 맞습니다. “There are three problems with this method. The first… the second… the third…”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언어는 꽤나 말랑말랑합니다. ‘법칙과 예외로 구분되는 세계’라기 보다는 ‘개념화와 맥락으로 창조되는 세계’에 가깝습니다.

#관사공부중

the only child vs. an only child

 

오래 전 ‘the only child’를 ‘외동’으로 배웠습니다. 형제가 없는 경우 반드시 ‘the only child’로 써야 한다는 것이죠. 이 설명에 따르면 ‘an only child’는 틀린 표현이었고요.

그런데 “He is an only child.”라는 문장을 꽤 자주 만나게 됩니다. 구글은 578만 건의 “an only child” 검색 결과를 보여주는데요. 결코 적지 않은 수죠. (“the only child”는 약 800만 건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른 것은 저에게 ‘the only child’만이 옳다고 말씀해 주신 분의 설명이었죠!)

위에서 나온 “He is an only child”는 “그는 외동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an only child”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동들 중 하나’라는 개념을 갖고 있죠. 부정관사 “a(n)”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다수 중 하나’라는 뜻이 됩니다. 한국사회에서 외동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니 저런 문장을 쓸 일도 많아질 듯합니다.

이에 비해 “the only child”는 “단 한 명의 자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너 형제나 자매가 있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하면 “나는 외동이야.”라는 뜻이 됩니다. 형제나 자매가 없다는 뜻이죠.

이 외에 상황에 따라 “Jane was the only child in this class.” (Jane은 이 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일한 아동이야.) 라는 식의 활용도 가능합니다.

위의 두 예문에서 “the only”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유일한~’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the only child in my family”에서는 가족 내에서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고, “the only child in this classroom”은 교실에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한 아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를 ‘다수 중의 하나’라는 개념을 지닌 “an only child”와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the only child in my family”가 일반적으로 ‘외동’임을 의미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두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화제작인 A를 보지 못하고 B를 관람했다고 합시다. 왜 그랬을까요? 형 누나는 성인이어서 어떤 영화나 볼 수 있지만 자기는 미성년이어서 A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I am the only child in my famil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 등 다른 가족은 모두 성인(adult)인데, 자기만 유일하게 성인이 아닌 아동(child)인 상황이죠.

덧.
어제 SteemIt 가입 승인을 받았는데, 뭘 써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새롭게 뭔가 써낸다는 건 현재 역량으로 불가능할 것 같고요. 기존에 썼던 관사 공부 포스트를 잘 엮어서 연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연재할만큼 원고가 정리되면 차곡차곡 올려보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SteemIt이 살아남아 있다면 말이죠. ^^

 

#관사공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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