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으로서의 초고

한해 평균 여덟 번 전국영어교사모임 회보인 <함께하는 영어교육>에 글을 싣고 있는데, 이제 마흔 개 남짓의 원고가 쌓였다. 6년 째 쓰고 있는 <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얘기다.

영어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익숙한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컬럼인데, 인지언어학의 세계관, 언어관을 지지하고 공부해 온 사람의 입장에서 교사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학술논문이 아닌 대중적인 글 두세 쪽 분량으로 언어학 논의와 언어교육을 함께 다루는 일이 쉽진 않지만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쓴다.

요 며칠 초창기에 쓴 글을 흝어보는데 아쉬운 점이 적잖다. ‘왜 이렇게 밖에 설명하지 못했을까?’, ‘여기에서는 왜 그 학자를 언급하지 않았을까?’같은 자책에서부터, 예시나 예문이 별로라는 생각까지 하다 보면 이걸 다듬어 출판할 수 있을지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편 이런 반성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전 프로젝트 매니저 시절의 제품개발 경험에서 얻은 교훈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폰을 만든 사람들이 기술과 디자인을 꼭꼭 숨겨놨다가 올해 아이폰 첫 번째 모델을 내놓았다면 아이폰 X의 기능과 디자인, 사용성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제품이든 세상에 내놓아야 다음 방향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듯이, 그 어떤 글도 처음부터 온전할 수는 없다.

글의 완성(perfection)은 없다. 완료(completion)가 있을 뿐. 허나 완료된 원고는 완성으로 향하는 나침반이 된다. 방향이 잡히면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영어수업

동사 “love의 과거는 loved”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I love you.”와 “I loved you”사이의 심연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는 수업이기를.

“개”는 “dog”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넘어, 모든 개를 dog으로 부를 수 있는 인간의 개념화 능력과, 모든 개를 dog이라 부르는 데서 발생하는 상징적 폭력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수업이기를.

“If I were my brother, I would be miserable.”에서 “가정법에서 동사의 형태”를 말하는 것을 넘어, 앞의 “I”와 뒤의 “I”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I임을 이야기하는 수업이기를.

형태와 의미를 함께 가르친다는 것은 단지 해석을 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언어 시스템의 작은 변화가 삶의 경험들과 어떻게 만나고 충돌하는지 보여주는 일임을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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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BE동사

위키피디아 인물 페이지의 첫 문장은 사람이름 + BE 동사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Matthew Paige “Matt” Damon (/ˈdeɪmən/; born October 8, 1970) is an American actor, film producer and screenwriter.” 같은 식이다. 맷 데이먼은 아직 생존해 있기에 be동사의 시제가 현재(is)다.

하지만 고인이 된 경우 시제가 달라진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George Michael의 페이지는 “Georgios Kyriacos Panayiotou (25 June 1963 – 25 December 2016), known professionally as George Michael, was an English singer, songwriter, and record producer who rose to fame as a member of the music duo Wham!”로, John Berger는 “John Peter Berger (5 November 1926 – 2 January 2017) was an English art critic, novelist, painter and poet.”로 소개된다.

위키피디아 인물 페이지의 과거형 WAS.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BE 동사가 아닐까.

하지만 우리들의 맘 속에서 그들은 언제까지나 현재형이다. “George Michael IS an English singer, songwriter, and record producer.”이고, “John Peter Berger IS an English art critic, novelist, painter and poet.”인 것이다.

존재’했던’ 것들은 언제까지나 존재’한다’.
죽음과 삶은 그렇게 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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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댐: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것은 기억. 기억과 기억을 연결해 주는 것은 만남. 죽음과 죽음을 연결해 주는 것은 기록. 삶과 삶을 연결해 주는 것은 죽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 (2017.1)

인간, 능력에 대해 모순된 존재

Posted by on May 2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모순적인, 너무나 모순적인.

인간은 비할 수 없이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해내는 기계에 대해서는 “우리만의 창의성을 개발하자”고 말하면서,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자신들에겐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믿게 만든다. 소위 ‘4차산업혁명’의 핵심은 더 우수한 기계의 발명 자체가 아니라,그를 통하여 인간의 능력을, 나아가 인간 존재를 재정의하는 데 있을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어머니와 나, 한겨레 인터뷰

Posted by on May 24, 2018 in 링크,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한겨레의 강성만 선임기자님과 나눈 대화가 <짬> 코너의 도서 관련 인터뷰 기사로 실렸습니다. 교보의 5월의 책 선정도 그랬지만 이번 인터뷰도 책의 내용을 보시고 연락을 주셔서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한 시간 반을 쉼없이 떠들었는데, 강성만 기자님께서 차분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생각보다 큰 지면을 허락해 주셔서 적잖이 놀랐네요.

기사 중에서 저는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

“올해 6년차 비정규직인 아들에게 건네는 따스한 충고는 비슷한 온기의 답과 만난다. “지금 먹고사는 것만도 감사하지. 물론 네가 정규직이 되면 좋겠지만, 지금 고생하는 거 잊지 말아라. 잊으면 고생한 게 의미가 없잖아.”(어머니) “고마워요. 고생이랄 것도 없지만 잊지 않겠습니다.”(아들)”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요. ‘소통’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습니다. 어머니와 자식, 대화, 소통, 이해, 세대간의 관계 등등이 키워드였죠.

강기자님: 그래서 어떻게 해야 소통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나: 음…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잘 모르겠구요. 제가 관심을 갖는 말의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말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의 말도 상대의 말도 무겁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이 대화는 서로의 삶의 역사 속에서 빙산의 일각처럼 작디 작은 것이라는 것, 말을 통해 상대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충되는 듯하지만 두 가지 모두를 염두에 두고 대화하는 사람들이어야 소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음…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잘라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

#어머니와나 #인터뷰 #한겨레 #짬

http://v.media.daum.net/v/20180522183616705?f=m&rcmd=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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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과 인생

Posted by on May 22,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어쩌다 짬이 난다. 음악을 고른다. 이어폰을 꺼낸다. 풀 수 없을 만큼 엉켜 있다. 낑낑대며 푸는데 반격이 만만찮다. 그렇게 쉽개 풀리면 내가 이어폰이 아니지, 하는 것만 같다. 줄은 유연한 무생물이지만 이어폰은 굽힐 줄 모르는 짐승이다. 허나 시간은 나의 편이지. 후훗. 마지막 매듭이 풀린다. 아뿔싸 또 다른 일이 터진다. 이어폰은 다시 주머니 속 깊고 어두운 곳으로 유배된다. 일에 열중한다. 이어폰은 다시 광속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일이 끝나고 다시 이어폰을 꺼낼 때 쯤이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문제를 푸는 동안 줄은 꼬인다. 줄을 푸는 동안 문제는 다가온다. 음악은 결코 전화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삶의 작동방식일지도 모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문법번역식 교육

현재 국가 교육과정의 이론적 뿌리가 되는 의사소통적 교수법(Communicative Language Teaching)의 지속적 영향 속에서 적어도 이론의 영역에서는 문법번역식 교육이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문법 공부와 번역 연습이 외어학습의 주요 전략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법학습이냐, 어떤 번역 과제냐이지 문법과 번역 그 자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 문법과 번역은 재창조(reinvention)의 대상이지 버려야 할 구습이 아니다.

흔히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악마가 디테일에 있다고 떠들면서 ‘도매금’ 천사를 동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생각만 할 수 있는 능력

Posted by on May 19,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생각만 한다”는 실행력 부족을 나무라는 말이지만, 한편으로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을 담고 있기도 하다. 뭐든 다 직접 해보지 않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고 지금 여기 눈 앞의 공간과 지각할 수 없는 공간을 연결한다. 생각만 하는 능력이야말로 현실을 뛰어넘는 능력인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인공지능 시대의 능력주의

Posted by on May 15, 2018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이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주장에는 “이미/언제나 있었던 인간의 시대, AI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빠져있다.AI의 고도화에 따라 ‘능력주의 (meritocracy)’는 또다른 옷을 입고 인간을 옥죄게 될 것이다. “AI 대 인간”의 구도는 언제나 “인간 대 인간”의 구도로 바꾸어 이해해야만 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클리셰

Posted by on May 14, 2018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강의 10년차, 이제 ‘초짜’라고 부를 수는 없게 되었건만, 처음보다 더 나은 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시간강사를 “(명사) 아는 척 하느라 엄청 바쁘고, 바쁜 척 하다가 좀 알게 되는데, 그땐 또 잘 모르는 걸 가르쳐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의 근원에는 이런 상황이 있다. 돌파하자고 결심을 하지만 매번 다시 쳇바퀴 도는 삶으로 던져진다. (이 상황의 근원에 나약함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괄호 안에 넣어두기로 한다. 이게 본문이 되면 삶이 너무나도 괴로울 터이니.)

한편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해도 ‘클리셰’로 느껴지곤 한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일텐데도, 내 머리 속에서는 진부한 것 투성이다. 전에 했던 이야기,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지 않은 지식, 더이상 영감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가르침 따위 말이다.

지식이 전달(deliver)될 수 없고 구성(construct)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인식론적 지위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 누군가에게 체화되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구성주의는 관계를 맺는 데 요구되는 시간에 대한 담론이다.

교사는 배움의 시간과 조응하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응시를 통해 성장한다. 가르침은 특정한 세계에 천착하며 긴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커 파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르칩니다. (We teach who we are.)”라고 말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의 말을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풀면 이렇다.

“우리는 특정한 주제에 관해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 주제와 함께 살아온 시간을 학생들 앞에서 풀어내는 것이지요. 꼬여있는 시간을, 툭툭 끊어진 시간을 풀어낼 순 없어요.”

단단한 실타래가 되지 못한 지식으로, 자신을 감화시키지 못하는 지식으로 상대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는 시도는 얼마나 얄팍한가. 나는 얼마나 얄팍한가. 이런 생각이 자주 찾아오는 요즘이다.

저녁 수업 준비를 해야겠다.

On native-speakerism

Native-speakerism is a powerful ideology machine that mass-produces unfairness, contempt, inferiority, and frustration. It ruthlessly divides native and nonnative speakers, veils the hard fact that we are all legitimate users of a certain language, and naturalizes sociocultural, economic biases against second and foreign language learners. Through this seldom-challenged mechanism, it effectively molds discrimination out of differences, It mimics racism in placing the categorical value on a birth-based capacity, and colludes with the ‘sacred’ meritocracy by establishing native speaker-favored standards, qualifications, and market environments. Where native-speakerism prevails, foreign language learning functions as a viable tool for the old ruling strategy: divide and conquer. So I remind myself that I do not need to say, “I perfect understand what you mean by that. However, it is wrong: native speakers would not speak like that.” No, they’re not wrong. I am wrong. There utterances communicate: my judgement bl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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