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과 생산성,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정치

Posted by on Jul 31, 2018 in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조직내 구성원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하는 주요 근거로 생산성 증대를 드는 경우가 많다. 몇몇 연구들은 팀이 보유한 능력이 다양해질 때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구성원의 인적 다양성만 확보될 경우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팀내 여성의 비율이 높을수록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연구도 접한 적이 있다.

연구의 목적에 따라 성별, 연령, 인종, 전문지식, 커뮤니케이션 스타일 등 여러 요인으로 다양성을 정의할 수 있을텐데,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맥락에 따라서 조직의 다양성과 생산성의 관계는 역동적으로 나타나리라 생각된다. ‘다양성’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다양한 맥락과 만나면 실로 다양한 결과가 산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련의 연구들을 접하며 의구심 또한 생긴다. 생산성이 떨어지면 다양성은 보장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다양성은 생산성에 복무해야 하는 하위 개념인가? 다양성을 독립변수로, 생산성을 종속변수로 놓는 틀이야말로 사고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지 않은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를 반듯하게 가르는 주장을 접할 때마다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누가, 왜,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변수를 정의하는가?”

변수를 정의하는 일은 가치와 무관한가? 변수들간의 무게는 같은가? 그들은 같은 층위에 놓여질 수 있는/놓여져야 하는 관계에 있나?

사회문화적 영역에서 독립과 종속의 관계는 언제나 의심과 성찰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로 본 언어의 한계

Posted by on Jul 31,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언어의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효과와 인상입니다. 오늘은 성경구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글로 써 놓아도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가 동시에 포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진리’ 다음에 ‘자유’가 오는 언어 구조가 저 말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생각해 볼 지점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네게 진리가 있어?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모른다고?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언어표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점진적 과정은 조금씩 자유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와 ‘자유’라는 명사가 개별적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언제나 언어와 삶을 엮어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우리 이야기잖아,” 혹은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말’

Posted by on Jul 29,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몇주 전 월간 <좋은생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작은 원고를 싣고 싶은데 기억에 남는 어머니의 말씀을 소재로 써달라는 초대의 말씀을 전해 주셨죠. 흔쾌히 그러겠다 승낙을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짧지 않은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모아 <어머니와 나>를 내고 지금도 종종 기록하고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좋은생각>의 방향에 맞는 어머니의 말씀이 무얼까 계속 생각하게 되더군요. 저 혹은 어머니에게만 좋은 생각이 아닌 잡지의 모든 독자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그런 좋은 생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책 속에 다 담아내지 못한 문제의식과 다시 만났습니다. 바로 문해력과 글, 그리고 삶의 관계였지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독서 패턴도 점점 말랑말랑한 자기위안이나 가벼운 일상을 다루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분석도 있고요. 표면적으로 볼 때 한국인의 읽기 능력은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파보면 정작 길고 깊은 글을 읽어내는 능력은 상당히 부족한 실정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 문제를 짧은 원고에 오롯이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욕심인 줄 알지만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습니다. 마지막에 출판사 쇤하이트의 대표이신 Kyungsoo Sohn님께서 소중한 피드백을 주셔서 아래 글이 나왔네요. 역시 짧은 글이 더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더 많은 ‘우리 이야기’가 세상을 감싸안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에서 함께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저의 일상을 포근히 안아 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

우리 이야기: 잊지 못할 어머니의 말

봄을 선언하듯 벚꽃이 도시를 뒤덮기 시작하던 날, 한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을 안겨 드렸다. 표지를 쓰다듬으시며 언제 이럴 시간이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당신의 얼굴이 수줍게 빛났다. 기쁨에 달뜬 어머니를 보며 내 가슴도 함께 뛰었다. 세상도 마음도 제대로 봄날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과 나눈 이야기를 복기하곤 했었다. 열차가 도착하고 승객이 쏟아져 나오길 몇 차례 반복하면 일상의 기억은 글이 되어 있었다. 때로는 눈보라가 치고 무더위가 심술을 부렸지만 기록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다섯 해를 훌쩍 지나 소소하고 따뜻했던 추억은 책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네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우야, 책 다 읽었다.”
“아니, 벌써요?”
“응, 승강장에 앉아서 단숨에 읽었지.”
“집에도 안 가시고요? 어찌 그렇게 빨리 읽으셨대요?”
“엄마가 한 말이 그대로 들어 있으니 술술 읽히더라. 다 우리가 한 이야기잖아.”
“아… 그렇죠. 우리 이야기.”

읽기는 단어와의 만남을 넘어선다. 글쓴이의 말을 통해 삶을, 나아가 세상사의 이치를 엮어 내는 일이다. 이같은 능력을 ‘문해력’이라 한다. 독서가 힘겨운 까닭은 문해력을 갖추지 못해서다. 언어뿐 아니라 문화와 사회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만 한 권의 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의 말’을 ‘그대로’ 담은 ‘우리의 이야기’였기에 책을 한달음에 읽을 수 있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이런 나의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간 책을 쉬이 읽지 못하셨던 건 그저 문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삶과 언어를 담은 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책이 많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개개인의 지혜가 되지는 못한다. 살던 대로 살겠다는 아집이, 독서를 성적의 도구로 삼는 교육이, 잠깐의 여유마저 허락지 않는 무한경쟁이 책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다. 어머니의 말씀은 여기에 한 가지 숙제를 더한다. 삶을 오롯이 담아낼, 누군가의 가슴을 단숨에 적실 언어를 어떻게 빚을 수 있을까?

단 한 명의 독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좋은생각> 2018년 8월호. 60쪽

교사들의 방학을 없애달라?

Posted by on Jul 27,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개인경험의 절대시, 그리고 잘못된 인과관계 추론

교사의 방학을 없애달라는 청원이 나름의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추측컨대 청원자나 찬성한 이들 모두 부적절한 언행과 ‘거저먹기’ 수업을 일삼는 교사들을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하긴 대한민국에서 그런 교사를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생각이 갈린다. 그런 교사들을 줄이고 교육이 더 교육다와지기 위해서 교사들에게서 방학을 뺏는 것이 옳은 방향인가? 오히려 방학을 방학답게 만들어 주면서 학기 중에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교사들의 재충전과 자기계발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 더 나은 접근 아닌가?

나는 이번 일이 (1) 자기자신의 경험을 절대시하는 풍토 그리고 (2) 인과관계에 대한 철저한 오해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판단이 ‘자수성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해서 그 판단을 모두에게 강요할 수 없듯이, 영어에 자신감을 심어준 A라는 방법이 모든 이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듯이,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모두에게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것이 어느 정도 다수의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종종 쓰는 표현으로는 Best practice는 “BEST” practice다. 특정한 맥락과 주체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사례가 모두에게 가능할 것이라 믿는 것은 순진하다 못해 해롭다. 이 논리는 Worst practice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시쳇말로 당신이 만난 수많은 꼴통 선생들의 대충대충 수업은 방학 기간 팽팽 놀아서 그 꼴이 된 것이 아니다. (물론 방학 때 ‘논다’는 인식 또한 상당한 왜곡에 기반해 있음은 따로 논의하진 않겠다.)

세계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해서 구조적인 측면이 강하게 개입된 부정적 교육경험이 교사들의 방학 때문일 거라 믿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가. 개인의 경험은 소중하지만 그것이 구조를 바꾸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진 못한다. 조금만 더 생각하자. 당신을 화나게 했던 교사들이 그 모양 그꼴이 된 원인은 아마도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언어가 사라질 때 새로운 소통이 시작된다

Posted by on Jul 27,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사람들은 같아 보이지만 다른 언어를 쓴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다르고, 그의 ‘편두통’과 너의 ‘편두통’이 다르다. 하지만 미묘한 감정이나 뉘앙스를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별탈없이 소통을 하고 협업하며 살아간다. 모순과 헛점 투성이 언어이지만 사람들을 느슨하게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그럭저럭 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코드로서의 언어가 없으면 관계의 끈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친하게 지내려 노력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길냥이들에 대한 애정을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언어 소통의 부재가 한몫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언어가 아닌 만남이 소통의 주요한 매개가 된다. 내가 고양이들과 특정한 언어로 소통을 했다면 그들의 마음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 걸음걸이에, 발짓에, 앉고 일어서는 자세에, 혀놀림에, 움직이는 속도에, 꼬리의 움직임에, 울음소리에, 경계태세에, 몸의 떨림에, 그리고 순식간에 변하는 눈빛에 지금처럼 몸과 마음을 기울이진 않았을 것 같다.

코드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역설적이게도 코드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몸짓들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서로 얼마나 알아들었느냐, 즉 언어 교환의 효율성(efficiency)이 아니라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함(co-presence)이 더욱 중요하고 또 절실할 수밖에 없다. 언어코드의 힘이 줄어드는 지점에서 현상학적 실존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언어 코드의 부재는 길냥이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가 아니라 탐구를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냥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질문을 할 수 없으니 과학적으로 검증된 지식, 큰 고양이 관련 커뮤니티에서 ‘사실’로 통용되는 상식을 찾아보게 되는데, 이를 통해 고양이의 종적 특징에 대해 좀더 이해함과 동시에, 그런 특성이 일반화될 수 없음 또한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소통의 모순이 있다. 소통할 수 있음은 소통의 힘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수반한다. 경청은 소통에 필수이지만 경청이 소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하다. 소통가능성은 소통불가능성을 포함한다.

이렇게 보면 언어의 교환은 소통의 아주 작은 부분인지도 모른다. 때론 말 몇 마디를 주워 담고는 ‘이 사람을 이해했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사람의 사고, 기호, 성향, 인생사 등에 대한 진지한 공부없이 글 한두 편으로 그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교훈들. 누군가를 만났다면 몸도 마음도 함께 있을 것, 이해하고 싶다면 깊은 관심을 갖고 오래 지켜볼 것, 몇 마디 말에 그 사람의 모든 걸 담아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냐옹냐옹냐냐옹.

덧.
시인들은 언어라는 매개로 언어를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하지만 그렇기에 시인들에 의해 언어의 외연은 확장되고 심연은 더욱 깊어진다. 그리하여 나에게 시는 ‘언어 바깥의 언어를 꿈꾸는 언어’에 다름 아니다.

#강의준비중

노회찬 의원을 추모하며

Posted by on Jul 24, 2018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그의 별명 중 하나는 “비유의 달인”이었다.

비유는 그저 또 하나의 수사가 아니다.

비유는 두 세계를 잇는다.

“내 마음은 호수요”는

심리적 차원과 대자연을 연결하고,

“삶이라는 무대”는

살아가는 일과 연극의 세계를 엮는다.

이렇게 두 개의 세계를 엮을 때

단지 두 개의 대상만 엮이는 건 아니다.

두 개의 세계 속 자리를 잡은

두 대상이 엮이는 것인지라

이들 대상이 맺고 있는 관계까지 따라온다.

삶이 무대가 되면

우리는 배우가 되고

누군가는 주연이, 누군가는 조연이,

또 누군가는 악역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비유(메타포)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들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실제 비유는 훨씬 더 복잡하다.

남북간의 대화와 정상회담 제의를

소개팅과 만남에 대한 관계로 풀었을 때

남북과 소개팅이라는 두 영역만 묶인 게 아니라,

남북간의 대화의 양상, 반응의 속도, 심리적 역동 등이

서로 만남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간의 관계에

매핑(사상; mapping)되는 것이다.

즉, 훨씬 복잡한 요소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엮이게 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정치에서의 비유는

필연적으로 윤리적인 측면들을 상정한다.

어떤 대상을 어떻게 엮느냐는

단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두 세계가 엮일 때 발생하는 ‘마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모 정치인이 한 흑인 유학생에게

“연탄색이랑 얼굴색이랑 똑같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연결시킨 것은 단지 색의 유사성 즉,

피부색과 화석연료 중 하나의 색이 아니었다.

그가 이 두 가지를 엮었을 때

흑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누군가를 ‘검다’고 불렀을 때의 상징적 폭력과

그 말을 듣는 이의 심리적 상처를

동시에 격발시킨 것이다.

노회찬 의원이 ‘비유의 달인’으로 불린 것은

그가 두 개의 적절한 세계를 상정하고

이를 순식간에 연결시켜

현실에 대해 묵직한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편견을 조장하지 않으며

세계를 날카롭고도 따스하게 볼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현실적으로

누구보다 더 깊이 고민하는 정치인이었다.

동시에 언어 그 중에서도

메타포를 공부하는 나에게는

서로 다른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꿰뚫어 보며

그 혜안을 웃음으로 바꿀 수 있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타락한 싸구려 메타포들의 시궁창 같은

모 당의 ‘레토릭’과는

절대 비교되지 않을

빛나는 유머의 일침들.

나도 그를 한 가지 메타포로 표현하고 싶다.

“노회찬 의원님,

의원님은 저에게

세상 가장 푸근한 웃음을 지녔지만

그 무엇보다 험한 지형을 헤쳐온

노련한 셰르파였습니다.

당신의 경험은

베이스 캠프와 정상을,

대지와 하늘을 동시에 조망하는

혜안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유쾌했던 당신의 유머는

폭풍 속 절벽에서도

여정을 포기하지 않을

힘이자 희망이 되었습니다.

함께 싸울 수 밖에 없어 슬펐지만

함께 웃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긴 말에서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이라고 말했다.

언어학에서 ‘여기에서(here)’는

직시표현(deictic expressions) 중 하나다.

직시표현이란 화자와 청자가 처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말이다.

“지금”은 고정된 시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2018년 7월 24일 밤 11시 30분과는

성격이 다른 표현이라는 이야기다.

“여기, 거기, 그때, 지금” 등이 대표적인 직시표현이다.

그는 ‘여기서’라고 말했지만,

그 글을 읽고 있는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우리가 그의 글을 언제까지나

바로 지금, 여기에서 현재형으로 읽어 낸다면

그는 “여기서 멈추”었을지라도,

결코 정지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움직이면

그가 명시한 시간의 축도

함께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아직도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개인적 인연은 없지만

정당운동의 변방에서

선거때마다 작게나마 무언가를 하면서

고비고비마다 그를 바라보고 또 따라왔다.

그가 마음으로,

뛰어난 지력과 언어로

무엇보다 불의한 세계에 대한 분노와

평범한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엮었냈던 세계를

오래오래 곁에 두려고 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여기”는

우리가 걷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언제나 우리의 발걸음보다

한발짝 더 앞에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의 “여기”는

나의 “거기”가 될 것이다.

믿고 따를 수 있는

그의 자취가 될 것이다.

편히 쉬시길,

그간 만나지 못했던 동지들과

회포를 푸시길 빈다.

당신을 기억하고

계속 걸어가려 한다.

당신이 생전 엮어냈던

수많은 세상의 관계처럼

당신이 꿈꾸었던 세상과 우리가 발딛고 있는 세상을

엮어가면서 말이다.

2018. 7. 24.

그를 보내며

Posted by on Jul 23, 2018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죄 없는 자가 치라”는 말에 선한 이들이 돌아섰다. 빈자리에는 자기 죄를 모르는, 죄의 개념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돌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의 후안무치만큼 어둡고 무거워진 시대를 짊어진 이들이 하나씩 떠나간다. 참담한 날이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 앞에는 the?

The에 관해 배울 때 ‘명사 뒤에서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면 the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을 배운 적이 있다.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 보니 엉터리 규칙이었다. 처음 나오는 명사 앞에는 반드시 a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처럼 말이다.

명사에 정관사가 붙느냐 부정관사가 붙느냐와 관계대명사의 수식 여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라 하더라도 특정되지 않을(not specified) 수도 특정(specified)될 수도 있고, 전자의 경우에는 a+명사가, 후자의 경우에는 the+명사 형태를 써야 한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a. We are hiring a data scientist who specializes in data visualization.

b. The man who stole the wallet was his uncle.

위의 문장 중 a의 경우 “우리는 데이터 시각화를 전문으로 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구인하고 있다.”의 의미고 b는 “지갑을 훔친 사람은 그의 삼촌이었다”라는 뜻이다.

두 문장의 의미를 살피면 a의 “data scientist”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는 특정되지 않는다. 고로 a를 붙이는 것이 적절하다.

이에 비해 b의 경우 “지갑을 훔친”이라는 관계사절은 특정인을 꾸미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절도범 말이다. 따라서 ‘a’가 아니라 “the’를 붙이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관계대명사가 꾸민다 하더라도 수식을 받는 명사는 특정될 수도, 특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관사의 선택은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명사는 정관사 the를 붙여야 한다”는 규칙은 맞지 않는다.

#관사공부중

영어논문쓰기의 정석 강의 촬영을 마치고

Posted by on Jul 22, 2018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일상 | No Comments

35강 동영상 강의를 촬영하고 리뷰하며 느낀 것

여행에서 돌아와 봄에 찍은 <영어로 논문쓰기> 동영상 강의 리뷰를 마쳤다. 집중리뷰를 하며 느낀 것 몇 가지를 두서없이 적어본다.

1. 학생들을 앞에 놓고 하는 강의하는 것과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강의를 촬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우선 후자의 내용 밀도가 상당히 높고 자연스러움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혼자 떠드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2. 나는 또박또박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말이 살짝 느린 것 같다. 근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말이 느려지는 것 같기도 하고.

3. 적절한 그래픽은 힘이 세다.

4. 그나마 맨 처음 찍었던 것보다는 후반부 강의가 좀 낫다. 카메라에 아주 조금씩은 익숙해지나 보다.

5. 생각보다 웃지 않는다. 절대진지 모드의 강의자.

“논문은 중요해요. 인생도 중요해요. 정체성도 중요해요. 여러분들은 그저 대학원생 조교가 아니라 작가이며 연구자입니다.”

6. 일부 강사들의 막던지는 자신감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특정한 내용에 대한 확신이 화면 밖으로 터져나올 것 같은 건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7. 논문 이야기 하다가 인생 이야기도 하는구나. 난 이게 좋은데 수강생들은 어찌 느끼려나.

8. 편집해서 세 시간 분량의 강의를 하루에 찍는 건 무리다. 이전에 여러 번 해본 강의 내용이라도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촬영/편집 스탭들 덕분에 나쁘지 않게 나오긴 했다.

9. 논문강의의 성격상 텍스트를 함께 봐가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은데 상호작용이 없는 상황에서 하려니힘겨웠다. 소통의 부재를 그나마 자막과 그래픽이 살려준 듯.

10. 저기 틀린 부분은 아무도 모르겠지.음… 모를거야. 몰라야 돼.

11. 친구에게 ‘한번 하고 나니 더이상 못하겠어’라고 말하니, ‘한번 찍고 말면 거기서 끝이지만 다시 찍으면 분명 더 잘찍는다’고 말하며, ‘동영상 강의 잘하는 사람들, 처음부터 잘한 사람 없어’라고 말해준다. 끄덕끄덕. 수긍은 가는데 조만간 다시는 못할 듯하다. 무서운 카메라.

12. 내 강의지만 같은 코스를 3년째 조금씩 수정, 보완해 오고 있는 터라 내용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들으시는 분들도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다.

13. 강의 촬영할 때 아래에서 공사를 한 적이 있다. 흐름이 끊겨서 여러 번 촬영했는데, 촬영이 끊기면 반복의 효과가 없어진다. 똑같은 걸 여러 번 한다고 더 잘하게 되는 게 아니라 이전 흐름에서 단절되어 내 마음 속 싱크가 맞지 않게 되는 듯.

14. 목이 약한 편이라는 게 표가 좀 난다.

15. 처음에 앉아서 할까 잠시 논의가 있었는데 서서 하길 잘했다. 서 있을 때 움직임이 훨씬 자연스럽다.

16. 영상 속 나 자신을 보는 건 아무리 해도 괴롭구나.

17. 하루 종일 촬영은 체력전이다.

18. 곧 대대적으로 홍보를 할 예정이다. 그래봐야 관심있어할만한 지인 연락과 페이스북 포스팅 정도겠지만.

19. 이렇게 인생의 한 페이지가 또 만들어졌다. 바라건대 영어로 논문을 쓰고 싶어하는 많은 초보 연구자들에게, 또 학생지도를 위해 영어논문의 개념적, 언어적 구조를 정리하고 싶은 연구자들 및 교수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20. 함께 고생한 백미인 스탭 분들과 대표님께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전한다. 부족한 강사의 작품을 최고로 만들어주시기 위해 오랜 기간 애쓰셨다.

To be continued! :)

There is a man vs There is some man

There is a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 vs. There is some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

위의 두 문장 모두 “서점 앞에 사람이 하나 있다”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러 교과서에서 말하듯 특정되지 않은(indefinite) 개체는 a나 some 모두로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완벽히 같은 문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이 둘 모두가 맞는 표현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There is a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를 봅시다. “서점 앞에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상황인데요. 이 경우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인데 일부러 ‘a’를 써서 표현할 수 있지요. 즉 발화자는 서점 앞의 사람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청자는 모른다는 가정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There is some man in front of the bookstore.라는 문장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가정이 담겨 있습니다. 적어도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발화자는 청자 또한 서점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문장은 “서점 앞에 왠 사람이 하나 있다”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There is 다음에 나오는 a와 some의 미묘한 차이를 간략히 논의해 보았습니다. 전에 이런 용법의 예문을 두고 “a=some”이라고 설명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이런 차이를 간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관사공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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