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부는 한국어로! – 영문독해에서 배경지식의 중요성, 그리고 영어 읽기와 한국어 읽기의 ‘콜라보’에 관하여

 

다음은 무엇에 관한 글일까요?

A newspaper is better than a magazine. A seashore is a better place than the street. At first it is better to run than to walk. You may have to try several times. It takes some skill but it’s easy to learn. Even young children can enjoy it. Once successful, complications are minimal. Birds seldom get too close. Rain, however, soaks in very fast. Too many people doing the same thing can also cause problems. One needs lots of room. If there are no complications, it can be very peaceful. A rock will serve as an anchor. If things break loose from it, however, you will not get a second chance. (Nishibayashi, 2006, p.45, from Bransford & Johnson,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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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거다’라고 답한 분이 많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단어가 어렵진 않은데 말이지요.

정답은 “연(kite)” 입니다. 처음부터 연날리기 관련 글이라고 했다면 글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을 것입니다. “연”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연과 관련된 경험과 지식이 우리 뇌에서 작동(activate)되기 때문입니다. 신문지나 잡지, 걷기와 뛰기, 걸림(complications)과 비에 젖기 등이 모두 연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지요. 소위 “스키마 이론(Schema Theory)”이 이런 현상을 잘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핵심 주제나 배경지식을 갖고 읽기에 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이해의 속도와 깊이가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영어로 글을 읽는 일은 단어를 하나하나 읽어내서 더 큰 내용을 만들어 나가는 상향식 처리(bottom-up processing)로 이해됩니다.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루며, 문단들이 모이면 글을 구성하므로 단어를 잘 이해하면 전체 글의 이해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벽돌 하나하나와 같은 단어들이 쌓이고 쌓여 큰 건물과 같은 글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상향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스키마 이론은 읽기가 관련된 경험과 지식을 통해 지문을 이해해 나가는 하향식 처리과정(top-down processing)을 수반한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특정한 지문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고,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하다면 단어가 조금 어려워도 글을 이해해 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상향식 처리과정과 하향식 처리과정 모두가 중요하며 이 둘이 서로 긴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읽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둘이 서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상호작용적 처리(interactive processing)”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영어로 글을 읽는다고 해도 배경지식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경지식을 쌓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영어로 읽기가 아닙니다. 단시간에 지식을 쌓으려면 해당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이를 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는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이기 때문입니다. 단위 시간당 정보처리량을 생각하면 외국어로서의 영어와 평생 써온 우리말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지요.

많은 이들이 이 점을 간과합니다. 끈기를 가지고 읽기를 완수하는 분도 있지만, “영어공부는 무조건 영어로”라는 슬로건을 맹신하여 모르는 단어 투성이의 지문과 씨름하다가 제풀에 나가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영어읽기의 목표가 ‘영어공부’에도 있지만 ‘읽기 내용의 이해’에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향식 처리만을 고집하여 ‘오로지 영어로!’를 고수하는 전략 보다는 한국어로 견실한 배경지식을 쌓아 하향식 처리의 효율성을 높이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 더욱 현명합니다. 전문영역을 공부할 경우에는 이 점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결국 영어읽기와 우리말 읽기를 배타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하고 도울 구석이 많습니다. 다양한 영역의 지식을 쌓아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데 있어 한국어와 영어의 멋진 ‘콜라보’를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영어공부를 우리말로!”라는 말이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작성중

영어를 배우는 이유

“우리는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가?”

참 많이 듣고 또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영어는 전세계의 시장을 여는 열쇠고, 인터넷과 미디어의 언어고, 경쟁력 강화를 위한 무기고, 기업간 커뮤니케이션의 보이지 않는 인프라이고,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기 위한 기본 능력이고, 세계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들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답을 한 거 아닌가요? 뭐가 더 필요한가요?

그런데 이 짧은 질문 안에는 참 많은 것들이 녹아 있습니다. 이를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우리사회가 영어공부를 대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문장은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은밀한 가정을 담고 있습니다. 누구나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나서 왜 배워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모두는 영어를 배워야 할까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전제 자체에 문제는 없을까요?

둘째, 이 질문의 주체가 누구인지 물어야 합니다. 영어를 왜 배워야 하냐고 질문하면서 “영어는 필요하다”는 답을 미리 내놓은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사교육 업체들인가요? 학자들인가요? 교사들인가요? 부모나 학생들도 과연 같은 이야기를 할까요? “우리”라는 단어는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나요? “우리 모두의 영어공부”라는 선언으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불이익을 받게 될까요?

셋째, 여기에서 “영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사회의 ‘영어’는 미국영어일까요? 영국영어일까요? 아니면 싱가포르나 홍콩에서 필요한 영어일까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아프리카 등의 국가들이나 주요 외국어로 사용하는 중국 등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이 ‘영어’에 포함되나요? 여행을 위한 영어인가요? 비즈니스를 위한 영어인가요? 시험 대비인가요? 문학작품을 읽을 수준이 되어야 하나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은연중에 생각하는 “영어공부”의 내용과 방향이 누군가에 의해 이미 정해져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배워야 하는 ‘영어’, 그리고 이를 공부하는 방법이 오랜 시간 가랑비 젖듯 영어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점을 형성해 온 것입니다. 결국 많은 영어공부는 우리 삶에 뿌리박고 있다기 보다는 이 사회의 요구에,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규정되고 확산되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 책은 ‘그들의 영어’에서 ‘나의 영어’로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찾아나가는 영어공부의 길로 초대합니다. 누군가가 정해주는 “왜”가 아니라, 유명인의 성공스토리가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뿌리박은 영어공부를 찾아나서려 합니다.

영어공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고, 전문가적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어떤 영어”를 “왜”, “어떻게” 공부하는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루하루의 일상, 관계맺고 있는 커뮤니티, 영어로 처리해야 하는 일, 영어로 즐기는 컨텐츠, 영어로 소통을 하는 친구 등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공부만이 오래, 깊이, 단단히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 남을 언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작성중

변하지 않는 것

Posted by on Sep 28, 2018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나의 중학 시절과 현재 적잖은 중고교의 문법 유인물이 거의 같다는 사실에.

나의 사범대 시절 전공교육과정과 현재의 교육과정이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에.

나의 임고시절 시험대비 ‘바이블’이 현재도 판만 바꾸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내 중고교 시절 영어 단답식 시험에서 ‘반점’의 기준이 지금의 수행평가 점수 부여시에도 똑같이 고민스러운 지점이라는 사실에.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기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뀌어야 할 것들이 그대로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리터러시”나 “4차산업혁명”을 논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참신한 대학원 과제 – 목차만들기

Posted by on Sep 26, 2018 in 강의노트, 수업자료 | No Comments

한 선생님은 대학원에서 작문이론을 가르치면서 조별로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내주었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작문이론 교재(textbook)의 편집자가 된다면 어떤 글을 넣고 싶습니까? 편집서의 차례를 만들고 각각의 글(학술논문 or 북챕터)을 넣은 이유를 설명하는 주석을 달아서 제출하세요.”

참신한 과제인 듯. 다음에 대학원 수업을 맡게 되면 시도해 봐야겠다.

말의 한계에 대하여

Posted by on Sep 26, 2018 in 강의노트, 단상, 말에 관하여, 집필 | No Comments

“언어는 애도하며 동시에 애도당하는 몸이다. 언어는 우리가 가장 신뢰하지만 결코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슬픔을 애도한다. 하지만 반대로 슬픈 언어 또한 넘쳐난다. 말과 우리는 슬픔으로 휘돌며 서로를 만날 운명이다.

말은 사람을 드러낸다. 말만큼 사람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소셜미디어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그 사람의 말일 뿐인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말은 사람이 아니다. 말은 존재의 정수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의 역사를 꿰뚫어 볼 수는 없다. 나의 대문에 걸려 있듯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지나온 삶의 증거이자 살 수 없었던 생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Harris의 문단을 발번역하며 말의 아름다움과 허전함을 다시 생각한다. 어쩌다 말이 열어준 길로 들어왔지만 이 길은 수많은 길 중 하나였을 뿐임을 기억한다.

“실로 심리적 고통은 무거운 짐이다. 존재의 중심에서 끔찍하도록 한치도 움직이지려 하지 않는 부동(不動)과 조응하며 미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이 짐을 거스르는데 이는 언제나 앞을 바라보며 아무 무게 없이 경계를 넘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단어, 멜로디,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것들이 허공으로 걸어들어간다. 언어는 애도하며 동시에 애도당하는 몸이다. 언어는 우리가 가장 신뢰하지만 결코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것이다. 언제나 근사(近似)일 수밖에 없기에 결코 마음을 홀라당 내어주도록 하진 않는다. 그것은 기껏 한낮의 열기일 뿐 결코 무언가를 진짜 태워버릴만한 열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일이다.” – Harris, J. <Signifying Pain> 중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Situated Cognition

“The theory of situated cognition, as I present it here, claims that every human thought and action is adapted to the environment, that is, situated, because what people perceive, how they conceive of their activity, and what they physically do develop together. From this perspective, thinking is a physical skill like riding a bike. In bicycling, every twist and tum of the steering wheel and every shift in posture are controlled not by manipulation of the physics equations learned in school, but by a recoordination of previous postures, ways of seeing, and motion sequences. Similarly, in reasoning, as we create names for things, shuffle around sentences in a paragraph, and interpret what our statements mean, every step is controlled not by rotely applying grammar descriptions and previously stored plans, but by adaptively recoordinating previous ways of seeing, talking, and moving. All human action is at least partially improvisatory by direct coupling of perceiving, conceiving, and moving – a coordination mechanism unmediated by descriptions of associations, laws, or procedures. This mechanism complements the inferential processes of deliberation and planning that form the backbone of theories of cognition based on manipulation of descriptions. Direct coupling of perceptual, conceptual, and motor processes in the brain involves a kind of “self-organization with a memory” that we have not yet replicated in computer programs, or indeed in any machine.” (pp. 1-2)
 
https://www.amazon.com/Situated-Cognition-Representations-Computational-Perspectives/dp/0521448719/ref=sr_1_3?ie=UTF8&qid=1537796300&sr=8-3&keywords=situated+cognition&dpID=5186Q2W%252BPPL&preST=_SY344_BO1,204,203,200_QL70_&dpSrc=srch

진리의 탈각

Posted by on Sep 24, 2018 in 단상, 수업자료, 집필 | No Comments

말은 행동으로부터 사고를 떼어낸 것이고, 쓰기는 말로부터 언어를 떼어낸 것이며, 언어학은 주체로부터 언어를 떼어낸 것이다. (Speaking is the alienation of thought from action, writing is the alienation of language from speech, and linguistics is the alienation of language from the self.) – Stephen A Tyler

말은 언제나 삶 속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말은 종종 온전한 행위를 ‘잊는다.’ 말소리를 글로 옮겨놓으면 또다른 탈각이 발생한다. 말하는 이의 표정, 어조, 음성, 나아가 몸짓이 사라진 언어만이 남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언어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언어학은 인간과 언어를 분리시키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 삶이 탈각된 말, 말이 탈각된 글, 주체가 탈각된 언어학.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의 분리를 깨닫지 못하는 공부는 언제나 진리의 탈각이라는 운명을 맞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내 인생의 노래, 그 노래의 이야기

다음 시간 in-class writing의 주제는 “내 인생의 노래, 그 노래의 이야기” 학생들은 ‘사연있는’ 노래 하나를 골라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적습니다.

bryanfurywins 2 years ago

2004, in my first year of college, I met a girl. I was completely head over heals for her; And her for me. My heart used to be “on fire” every time she’d text me… And at the time, Switchfoot – ‘The Beautiful Letdown’ was our favorite album and more so, this very song. Before moving to second year, she had to go back to Australia. Needless to say I was completely heart broken when she told me. I remember literally not being able to breath… I’m 35 years old now, married and with 3 kids. Seated at work listening to this song just made all the memories of her come flooding back.

삶을 위한 영어공부

Posted by on Sep 24, 2018 in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집필 | No Comments

“영어는 짱구다. 아무도 못말리기 때문이다.”
“영어는 골칫거리다. 내신의 적이기 때문이다.”
“영어는 스펙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영어교육에 관련된 강의 초반부에 “영어는 OO이다. 왜냐면 _________이기 때문이다.”의 형식으로 영어에 대한 생각을 묻곤 합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영어를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 답은 각각 초등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에게서 나왔습니다.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이 답변들에서 한국 사회에서 영어의 생애사를 만납니다. ‘재미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짱구 같은 영어’에서 ‘내신성적의 주요 영역’으로, 나아가 ‘취업과 승진의 수단’으로 변화하는 영어의 운명을 봅니다.

영어공부에 대한 애증은 학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 직장인은 제게 “영어요? 그림자 같아요. 계속 저를 따라오는 것 같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세월과 함께 변화하는 영어에 대한 메타포에서 학습자들의 슬픔이 배어나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애환이기도 합니다.

우리사회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영어교육에 투입합니다. 취학전부터 초중등 대학교육까지 공교육 사교육을 가리지 않고 큰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만족스런 결과가 나오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영어공부 헛했다’나 ‘몇 년을 공부했는데 입도 뻥긋 못하냐’는 한탄, ‘영어교육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논평은 이제 식상할 정도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분명 사회경제적,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그 해법 또한 거시적이고 구조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어교육 전문가들은 제도적 변화 없이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긴 힘들다는 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학교를, 취업의 조건을, 영어실력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바꾸기 전에 할 수 있는,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영어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시작은 ‘영어,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에서 ‘영어는 나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의 전환에서 시작됩니다. 영어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고 무턱대고 덤벼드는 일은 과거로 보내야 합니다. 영어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어를 누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영어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단초로 삼아 이때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영어에 대한 생각, 지금 우리의 영어공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고의 틀을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영어학습법도 변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 책은 이런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영어로 스트레스를 받고 그에 끌려가는 삶에서 영어를 통해 더 깊고 넓은 존재로 성장하는 삶으로의 변화를 꾀하려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제시되는 영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From speaking English to speaking through English
영어를 하는 사람에서 영어를 통해 말하는 사람으로.

2. From nonnative speakers of English to users of English as another repertoire for meaning-making
영어 비원어민 화자에서 영어를 또다른 의미생성의 레퍼토리로 사용하는 사람으로

3. From English as a threat for successful life to English as an asset enriching life
성공적인 삶을 위협하는 영어에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자산으로

“다른 언어를 배워서 그들의 네이티브처럼 말하지 않겠다. 다른 언어를 배워서 그들이 절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언젠가 Claire Kramsch 선생님 수업에서 들은 이 한 마디가 여전히 제 심장에 남아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고, 마음에 상처를 내며, 목을 뻣뻣이 세우는 영어의 시대를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스펙”이 아니라 “또다른 세계”를, “영어 정복하기”가 아니라 “영어와 친구되기”를, 무엇보다도 “네이티브 되기”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 되기”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성찰 없는 암기, 소통 없는 다이얼로그, 성장 없는 점수 향상을 넘어 우리의 삶을 위한 즐겁고도 단단한 영어공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초안작성중

유니버설 디자인, 안티-어포던스, 그리고 영어교육

‘ 제품을 사용하다가 감전당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조심 쓰세요.’

복잡한 디자인 오브젝트라는 관점에서 도시를 보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어포던스(affordances)를 무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포던스는 ‘행동유도성’이라고 종종 번역되는 용어로 디자인 영역에서는 사용자와 제품 혹은 서비스의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의자에 낮아 타이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오브젝트가 모든 이에게 의자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갓난 아기에게 이 오브젝트는 의자가 아니다. 300 Kg의 코끼리에게도 의자가 아니다. 이 오브젝트와 나의 관계는 아기 혹은 코끼리와의 관계와 다르다. 즉 이 오브젝트는 나와 아기, 코끼리에게 서로 다른 affordance로 작용한다.

최근 극도로 심한 허리통증을 느낀 적이 있다. 2-3일은 아예 침대 밖으로 나오기 힘들 정도로 아팠고, 두어 주는 느릿느릿 쉬엄쉬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달리기는 언감생심이었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호흡을 고르며 뾰족대는 통증을 이겨내야만 했다. 지하철에 설치된 손잡이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고 노인들의 발걸음이 지닌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모든 역 주요 지점에 설치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말 그대로 뼈저리게 느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의 시급성과 중대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신체의 내부에 존재하는 개개인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개인과 환경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즉 주변의 환경이 인간의 행동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관련된 문제였다. “특정 장애가 있는 사람은 이동할 수 없다”기 보다는 “도시의 특성상 특정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동할 수 없게 만든다”가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이같은 관점은 특정한 사물/환경이 어떤 사람을 돕느냐(serve),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느냐(afford)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한다. 어포던스의 관점에서 환경과 인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행로 중간이 움푹 파여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은 대다수의 보행자에게는 큰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비장애인에게 움푹 파인 그 곳은 돌아가면 되는 작은 흠결일 뿐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나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처음 제기한 ‘디자인 오브젝트로서의 도시’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100명 중 99명이 아무 문제 없다고 느끼는 그 결점이 1명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도시를 이렇게 방치하는 일은 어떤 디자이너가 가전제품을 출시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제품은 99명이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하지만 1명 정도에게는 감전의 위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지만 쓰시는 분들이 알아서 조심하여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제품을 출시하는 디자이너는 합리적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게 장애인들의 투쟁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 된다.

나는 이 관점에서 우리의 교실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 영어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삼는 것이 바로 ‘수준차’다. 수준이 다르므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재의 평가 시스템에서 이런 고충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 자체가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 교육과정에서 25퍼센트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75퍼센트는 수준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예요.”라고 말하는 교육체제가 어찌 합리적일 수 있겠는가?

이런 이해의 기반 위에서 나는 영어교육을 ‘유니버설 디자인’의 관점에서 다시 세워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유니버설 디자인(영어: universal design, 보편 설계, 보편적 설계)은 제품, 시설,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사람이 성별,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 위키백과)

이 관점에서 영어수업을 보자. 영어교재와 액티비티를 살피자. 영어교육과정을 검토하자.

‘디자인 오브젝트’의 관점에서 현재의 영어교육은 반-유니버설 디자인(anti-universal design)에 가까운 것 아닌가? 온갖 이유 때문에 평등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계급’이나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학교영어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소외되고 패배감에 휩싸이며 심각한 경우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영어교육은 어떻게 다시 디자인(redesign)되어야 할 것인가?

#영어교육과교육공학
#삶을위한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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