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인정과 오인

부르디외에게 있어 서로 다른 언어에 대해 부여되는 상이한 권력들은 사람들의 인정(recognition)에 근거한다. 하지만 그에게 이 모든 인정은 일종의 오인이다.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 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어는 역사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층층히 쌓인 오인 위에서 작동한다. 가장 ‘사랑받는’ 언어는 실상 가장 ‘오해받는’ 언어인 것이다.

#언어의말들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는 기본

어떤 면에서 영어는 ‘과대평가될 수 없는’ 즉,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은 능력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경향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는 기본’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무언가가 기본이 되면 다른 것들은 기본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삶에는 언제나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너무 쉽게 영어를 ‘기본’의 자리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건축과 소통

Posted by on Jan 29,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요즘에는 뭐 TV 보는 건 없으세요?”
“특별히 찾아 보는 건 없지. 근데 축구 떨어져서 좀 그러네.”
“아 그랬죠. 베트남도 떨어졌더라고요.”
“응 베트남도 떨어지고. 일본은 올라갔더라.”
“너무 빨리 떨어졌네요.”
“그렇지. 계속 올라갔으면 한참 좀 덜 외로웠을텐데.”
“축구는 그렇게 잘 보시더라고요.”
“보고 있으면 재미있어.”

“덜 외로웠을텐데.”라는 말이 목에 팍 박혔다. ‘
축구’와 ‘외로움’의 관계는 생각지도 못했다.

“축구 말고는 다른 거 보신 거 없어요?”
“그젠가 무슨 건축 강연을 봤어. 김광현 교수?”
“응. 어떤 분이예요?”
“강의를 잘하시더라. 건축학 교수시라는데,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죽 하는 게 아니고 원리를 이야기하시는데 좋더라고.”
“무슨 말이 남으셨어요?”
“건축은 소통에서 시작된대. 대화.”
“어떤 면에서요?”
“왜 유럽이나 오래된 건축들을 보면 처음 시작은 다 사람들의 대화였다는 거야. ‘우리 동네에 뭐가 필요한데’, ‘여기에는 뭐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대화들에서 건물이 나온다는 거지.”
“좋은 이야기네요. 소통에서 시작하는 건축.”
“근데 지금은 안그렇잖아. 그냥 돈을 벌어야 되니까 짓고. 땅이 있으니까 짓고.”
“소통에서 시작되는 건축은 아니죠. 분양해서 돈벌라고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우리가 식탁 방향을 어떻게 놓느냐, 가구는 어디에 갖다 놓느냐도 다 건축이라고.”
“아 그런 것도 다 작은 건축이겠네요.”
“이런 얘기 들으면 엄마도 공부하고 싶다. 그때 뿐이지만. ㅎㅎㅎ”

신대방역 부근은 여전히 예전 모습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양가적 감정이 든다. 서울치고 ‘낙후’되었다는 느낌. 예전의 정이 남아 있는 거리. 그래도 너무 빨리 소통 없는 건물이 들어서진 않았으면 좋겠다.

집으로 오는데 메시지가 왔다.

“건축은 삶을 닮는 그릇”
“건축이 공동의 언어”

‘건축’ 자리에 ‘수업’을 넣어보았다. 소통에서 시작하고 삶을 담는 그릇이 되며 함께 언어를 만드는 일.

말은 언제나 행동보다 쉽다.

#어머니와나

영어공부의 자기성찰성

영어공부는 거의 언제나 학습방법(how to)의 문제로 인식된다. 영어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영어공부는 성찰과 비판의 대상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전국민이 영어공부의 전문가라면, 전문가의 자기성찰성 또한 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학습법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대중적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영어공부를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다루는 일이었다. 영어관련서에 대한 대중의 습속(habitus)를 깨면서도 그중 일부를 받아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이 둘은 상반되는 주제이지만 사유되지 않는 공부는 가볍고 위험하며 불안하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재미와 멋이 없다. 솔직히 지금 우리사회의 영어공부 중 적지 않은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다.

공부를 해나가는 것 만큼이나 공부하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영어를 잘하는 것 만큼이나 영어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인식하는 일이 시급하다. 삶에 처참한 균열을 만드는 영어가 아니라 삶과 함께 성장하는 영어가 절실하다.

그냥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하도 떠들어서 페친 중에서는 벌써 피곤하신 분들이 있을 것 같지만.

#삶을위한영어공부 조금만 더 가면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호칭의 사회학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호칭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소셜미디어 상에서 서로를 부르는 방식입니다.

우선 ‘~님’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게 가장 무난할 듯합니다. 소셜미디어의 특성상 특정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위계적 관계를 함의하지 않으면서 예의를 갖춰 부를 일이 많으니 ‘~님”만큼 적절한 호칭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 “O박사님”, “O교수님”, “O원장님”, “O변호사님”, “O대표님” 등의 호칭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 호칭은 심심찮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이렇게 불러야 할 때도 있고, 평소에도 이 호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을 뿐이죠.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호칭의 경우 대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나 평범한 회사원들, 아이들과 학생들은 대개 이름을 기반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칭의 사회학에는 분명 비대칭적 측면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룬 업적에 기반한 호칭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욕망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이름보다 직책이나 자격으로 불리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그리 건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하여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호출해 봅니다.

“사장님, 길좀 여쭐게요.”

예의를 꽉꽉 채운 이 말, 어딘가 불편합니다. 길 묻는 사람은 최대한 예의를 지켜서 말을 건 것일 테니, 불만은 없습니다. 다만, 종종 들려오는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소화가 되질 않네요. 저는 사장은 아니고, 사장님은 더욱 아니며. 행여 사장이라고 해도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죠.

그냥 “실례지만 길을 좀 여쭈어도 될까요?”는 어떨까요? “사장님, 길 좀 여쭐게요”와는 달리 상대를 부르는 단어는 없습니다만 길을 묻는 기능은 충분히 수행하니까요. “아저씨”나 “학생” 혹은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상대가 ‘고통받을’ 이유도 없구요. (경험상 이 ‘고통’은 미혼 여성들이 “아줌마”로 불렸을 때 극대화되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한국사회에서 심심찮게 쓰이는 현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짧은 친절의 순간에도 “사장님”이 끼어드는 일은 좀 안타깝네요.

#삶을위한리터러시

지도교수 vs. work with someone

적어도 제가 아는 한 미국 대학원에서 지도교수가 누구냐고 물어볼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Who do you work with?”입니다. 직업을 물어볼 때 “What do you do?”라고 물어보듯 지도교수가 누군지 알고 싶을 때는 “Who do you work with?”라고 간단히 묻는 것입니다.

말을 바꾼다고 사람이나 시스템이 갑자기 변할 리야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work with”라는 언어패턴에 담긴 수평적 관계를 좋아합니다. “With”에는 상하가 없습니다. Someone to work with.함께 일하고 만들어 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지도교수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지도교수’는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를 다소 위계적으로 그립니다. ‘지도’는 보통 전문성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경우 “work with ~”보다는 “work for ~의 관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교수와 함께(with) 일한다기 보다는 교수를 위해(for) 일하는 것이지요.

페이스북에서 또 강의에서 명민하고 실력있는 대학원생들을 종종 만납니다. 뛰어난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을 그저 ‘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도적 협력자’로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지도할 사람” 보다는 “work with”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 합니다.

학문의 세계를 먼저 경험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관계는 근본적으로 수평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미 그런 곳들이 있겠지만, 석사생이든 박사생이든 함께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협력자(collaborator)로서 대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 물론 영어에도 academic advisor / dissertation advisor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다소 격식을 갖춘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며 한국어의 ‘지도교수’의 사용역(register)과 딱 대응되지는 않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일상 대화에서 ‘지도교수’가 많이 쓰이는 반면 영어에서는 ‘work with’와 호칭을 엮은 표현이 자주 쓰이는 것입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논문쓰기

 

불편한 말들

남들은 그냥저냥 넘어가는데

난 깜짝깜짝 놀라는 표현들이 있다.

 

‘아랫’사람/’윗’사람

‘부하’직원

사람을 잘 ‘다룬다’/’관리한다’

‘몸값’이 어마어마하다

가격이 ‘착하다’

얼굴 ‘천재’

‘팔리는’ 글

 

그리고 잘 보지 않던 드라마를 보면서 수없이 듣게 되는 말.

 

아들/딸 의사 ‘만들었다’

 

너무나 널리 퍼진 말들이어서

이런 말들을 쓰는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질 이유는 없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받아온 훈련 덕분에

혼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민감해지되 상처받지 않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극복을 위해

욕설의 언어학이라도 공부해야 할까. (먼산)

 

‘듣다’의 풍경

1. “네”가 “아니오”일 가능성이 꽤나 높은 상황이 있습니다.

“듣고 있니?”
“네.”

제대로 듣고 있으면 물어보지도 않았겠지요. “듣고 있니?”라는 말은 들었겠지만 그 전의 말들은 안 들었을 가능성이 높겠죠.

2. “말 좀 들어라.”

말을 다 듣고도 말 안들을 수가 있고, 말을 건성건성 들어도 말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듣다’는 ‘따르다(follow)’의 의미에 가깝겠지요.

3. 영어에서 “I hear you.”라는 표현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Hear는 물리적 소리를 듣는 경우에도 쓸 수 있지만 이렇게 사람을 목적어로 하면 상대의 말뜻을,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의미상 2인칭 대명사 ‘you’가 나오는 “I hear you”가 자주 쓰입니다.

4. “keep your ear to the ground”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땅에 귀를 대다/붙이다”라는 뜻인데 돌아가는 상황이나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주의/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정확한 어원은 모르겠지만 땅에 귀를 대면 그냥 듣는 것보다 보다 먼 곳에서 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네요. (덧. 전장에서 적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댔던 대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5. “Hear, hear”는 상대의 말에 대한 동의, 승인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는 감탄사입니다. 원래는 누군가의 말에 집중하라는 요청으로서의 “Hear him”에서 나왔다고 하고요. “그럼, 그럼”이나 “그럼, 그렇고 말고”정도의 느낌이랄까요.

#삶을위한리터러시 #삶을위한영어공부

논문쓰기 강의 단상 (2019)

<영어로 논문쓰기>는 개인강의로 세 번, 대학에서 네 학기를 진행했다. 두세 개의 연구단체에서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핵심을 압축하여 동영상 강의도 찍어봤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중에서는 늘 만족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그만큼 애정이 가는 강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과정이 새롭게 개편되지 않는 한 더이상 대학에서 논문쓰기를 가르칠 기회는 없을 듯하다. 대학원 초기 학술 리터러시와 논문에 대한 개념을 잡아주는 강의가 학과와 학생 모두에게 큰 도움을 준다고 믿지만, 그거야 일개 ‘듣보잡’ 리터러시 연구자의 생각일 뿐 아니겠는가.

개인 강좌의 경우에도 지인을 기반으로 강좌를 여는 방식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듯하다. 흔히들 말하는 “Scale up”을 위해서는 다른 조치가 필요하겠지만 그럴 여유도 열의도 야망도 없다. 물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게 꼭 좋은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우습달까.

지금으로선 논문쓰기 강의를 들은 분들이 간간히 연락을 해주시는 것으로 족하다. 완벽할 순 없겠지만 이번 강의도 알차게 만들어 가야겠다.

김영민, 집중과 영혼

Posted by on Jan 25,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물론 서둘러 말하자면, 희망은, 무엇보다 당신의 ‘생각’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힘들여 배워야 할 타자적 지평인 것이다.” (903쪽)

“예의는 연극적이다. 그 힘은 연극적 일관성으로부터 추출된다. 그러나 가면이 역설적으로 고백의 매체인 것처럼 연극적 예의는 본심을 찔러든다. 허허, 본심이라니! 하면서 예의가 고소(苦笑)를 보일 듯하다. 가면과 고백을 서로 대치시키고 예절과 본심을 가르는 진지한 형이상학 혹은 윤리학은 바로 그 진지함 탓에 자중지란에 빠진다.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연극적 삶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456쪽)

“인간은 자신의 세계와 구성적으로 상호의존의 관계를 맺는다. ‘장안 하늘에 뜬 한 조각의 달(長安一片月)'(이백)도 이미 시적 화자의 객관적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라는 주체는 외부를 ‘상황’이 되게 하고 대상을 의미의 초점으로 바꾼다. 나의 선택에 의해서 내 세계는 그 풍경을 바꾸고, 세계의 변화는 거꾸로 나의 주체적 개입을 재촉하며, 다시 이 개입은 내 주체의 성격과 지향을 재구성한다. 그런 뜻에서 인간의 장소는 동물의 텃세권과 다르고, ‘영혼’을 낳아놓는 인간의 주체는 자기보존에 적응된 동물의 통각(統覺)과는 다르다.” (55쪽)

또 하나의 ‘벽돌책’이 내 앞에 놓였다. <동무론> 이후 실로 오랜만에 김영민의 문장을 만난다. 처음 펼쳐든 페이지에서 ‘희망’에 대한 나의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나의 희망은 얼마나 얄팍한가. 또 얼마나 연약한가. 힘들여 배우지 않은 희망들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알처럼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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