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스케치

Posted by on Feb 27,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긴긴 마라톤 같은 일 하나가 끝났다. 혼자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이고 여러 분들로 부터 너무나 큰 도움을 받았지만 가끔 힘겹고 아프고 외로웠다. 끝나니 멍하고 퀭하고 홀가분하다.

2. 완주한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토닥일 만하다 여겼다. 간만에 혼자 짜장면을 먹었다. 생각보다 맛있진 않았지만 괜찮은 의례로 느껴졌다. 다음에는 짬뽕으로 할까.

3. 진이 다 빠진 채 새 학기를 시작하게 되어 살짝 두렵지만, 한 친구의 말처럼 학생들을 만나면 금세 기운을 낼 것도 같다. 이번 학기에는 지난 학기처럼 학부모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4. 대학에서 ‘빡센’ 강독수업을 하고 10퍼센트의 학생에게 호평을 90퍼센트의 학생에게 악평을 받는 꿈을 꾸곤 한다.

“OO님. 다음 문단 읽어주실래요?” -> “강의평가가 좋지 않아서 다음 학기 수업을 드리기 힘들겠는데요.” -> “예상한 바입니다.” 시퀀스.

5. “종전선언+α”가 나온다면 방학이 다 지난 슬픔도 훌쩍 털어버릴 듯하다. 물론 두어 주 쯤 지나면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기분은 그렇다.

6. 다음 프로젝트는 무엇이 될지. 학술적 글쓰기를 정리하는 일에 착수할지, 다른 선생님들과 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지어가게 될지. 그것도 아니면 지켜보던 책을 번역하게 될지. 강사법 시행을 앞둔 마지막 학기, 다음 행보에 대한 막연한 걱정만 늘어간다.

7.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지만 학기가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전력질주 모드다. 나의 능력 부족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완주하기 힘들다. 언제나 그렇듯 어찌저찌 잘 살아남을 것이다.

8. 전국영어교사모임 영어수업 플래너와 함께 회보 <함께하는 영어교육>을 받았다. 무려 통권 191호. 그중 1/4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구나. 시간은 흐르고 기록은 쌓인다. 잊혀질 운명일지라도 말이다.

커피를 내려야겠다.

제도화된 사랑

Posted by on Feb 26,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성취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멋진 결과를 코앞에 두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 상황에서 내면화된 실패라는 괴물이 고개를 쳐들면 버텨낼 힘이 쉬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훌쩍 넘어서게 하는 조건없는 지지다. 그리고 그 지지가 ‘도리’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기 보다는 제도로 정착한 사회가 더욱 더 ‘사랑 넘치는’ 사회다. 제도화된 사랑이 성공신화와 희생의 미담을 압도하는 사회를 꿈꾼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a learner of being

Posted by on Feb 23, 2019 in 단상, 영어, 영어로 글쓰기, 일상 | No Comments

A learner of teaching, a learner of writing, a learner of music, a learner of photography, a learner of mindfulness, a learner of giving, a learner of taking, a learner of loving, a learner of aging, a learner of breathing, a learner of walking, a learner of leaving, a learner of eating, a learner of staying, a learner of hugging, a learner of forgiving, a learner of suffering, a learner of learning, and a learner of giving all these things up. — All of these are what I am. And I am deeply grateful that I am becoming a learner of being. Thank you for being a witness to my life as a learner.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I hear you”

‘듣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hear’에는 ‘이해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듣는 일(지각)과 상대의 마음/의견/상황/생각 등을 이해하는 일(인지)이 한 단어 안에 쏙 들어가 있다.

그래서 “I hear you.”라는 말을 좋아한다.

돌아보면 상대의 말을 다 들어보지 않고도 공감한다 생각한 적이 많았고, 상대방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 하에 상대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적도 있었다.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해하기. 다 듣지 않고 알 수 있다 믿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않기. 지각과 인지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기.

“I hear you.”가 내게 전해주는 교훈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지언어학이야기

I just come and go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내가 활동주(agent)로서 자율적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나고 죽는 것은 주체적 선택과 행위와 거리가 멀다. (영어를 기준으로) 태어나는 행위는 대부분 수동태(be born)로, 죽는 행위는 대부분 자동사(die, pass away)로 표현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동사는 “fall in love”인데, “fall”은 주체의 능력이나 의도를 가장 적게 담고 있는 동사 중 하나다. 흔히 말하는 ‘불가항’의 행위인 것이다.

어쩌면 물흐르듯 산다는 건 자동사를 늘려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Rise, breathe, walk, sit, stand, smile, laugh, cry, clap 그리고 언젠가 disappear, vanish…. I just come, stay a while, and go.

#인지언어학이야기 #잡생각

보통명사, 고유명사, 그리고 김춘수의 <꽃>

1. 보통명사는 개념에, 고유명사는 개체에 대응된다.

a chair는 세계의 그 어떤 의자에라도 대응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대응하는 것이 특정한 의자가 아니라 의자성(chairness)이기 때문이다. a chair에 대응하는 것은 물리적 의자가 아니라 ‘의자’라는 개념이다.

하지만 개똥이는 오로지 개똥이에 대응된다.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개똥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똥이/라는 발음은 생물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유일한 개체인 개똥이를 가리킨다.

2. 우린 보통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배우지만 이 명제가 보통명사와 고유명사에 적용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보통명사는 개념의 세계에 대응한 뒤 개별 대상으로 나아가지만, 고유명사는 구체적인 대상에 바로 대응된다.

3. 김춘수의 ‘꽃’은 이 차이를 시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법설명보다 응축적이다.

다만, 그의 시어들은 위의 문법 설명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본 문법설명에 따르자면 아래와 같은 싯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보통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고유명사가 되었다.”

4. 김춘수의 ‘꽃’이 그린 세계와 달리 어쩌면 지금 이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꽃’이라는 보통명사에서 ‘몸짓’을 읽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명명의 세계를 현상학의 세계로 바꿔내는 일 말이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천착하는 자의 비극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개념에 천착하는 이들의 비극은 자신이 개념의 지층으로 파고드는 동안 대중은 여전히 지상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진실에 근접할수록 소통은 어려워지고, 깨달음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오해를 감내해야만 한다. 적지 않은 논쟁은 비슷한 지식의 양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매트릭스에 만족하고 있는 이들과 매트릭스에 균열을 내려는 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담론의 지형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와 오롯이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질문-답변의 양면

Posted by on Feb 17,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이 담고 있는 진술에 대한 답일 수도 있지만 질문당하는 행위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즉 질문에 대한 답은 “모면하기”나 “회피하기”, “넘어가기”나 “은폐하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가 도출된다. (1) 무턱대고 답변을 상대의 지적 상태를 보여주는 데이터로 삼지 말야아 한다. (2) 질문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여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수준 만큼이나 상호 신뢰가 중요하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문법용어 사용 단상

Posted by on Feb 17, 2019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집필 | No Comments

여전히 많은 교사/강사들은 문법을 설명할 때 ‘메타언어 용어(metalinguistic terms)’를 종종 사용한다. (‘메타언어’는 언어에 관한 언어를 의미하며 문법용어가 대표적이다.) 돌아보면 나 또한 오랜 시간 메타언어 용어를 사용해 가르쳐왔다. 그런데 3년 남짓 실력이 중간 쯤 되는 중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런 관행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한 적이 있다.

적지 않은 선생님들이 ‘구’나 ‘절’, ‘구문’ 같은 용어를 별 생각 없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분사구문” 파트를 가르칠 때에는 “절을 구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 빠짐없이 나온다. 여기에서 큰 병목이 발생한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중고생 중에 ‘구’와 ‘절’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시제’와 ‘시상’, ‘법’과 ‘태’와 같은 용어들은 또 어떤가?

통계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경험상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용어가 학생들의 귀를 닫고 마음을 닫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는 것.

실제로 내가 만났던 두 학생은 중학교에 진학해서 영어가 싫어진 가장 큰 이유로 ‘문법설명이 어려워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수업’을 꼽았다. 겨우 두 학생이 겪었던 영어교사들의 이야기를 일반화할 생각은 없지만 문법용어 사용이 여전히 널리 퍼져있음을 시사하는 일화다.

영어교육에서 메타언어 용어 즉 문법용어를 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자주 제기된다. 절대적으로 옳은 정답은 없을 것이다. 내가 내린 소결론은 이렇다. (1) 되도록이면 문법용어를 최소한으로 사용한다. (2) 만약 꼭 사용해야 한다면 학생들이 관련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확실히 하자. (3) “‘OO’가 무슨 말인지 알지?”라는 질문에 대해 “네”라고 답하는 학생들 중 다수는 사실 긴가민가 하고 있는 것이다.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필력 2

때로 밋밋함과 무거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글인 줄 알면서도 세상에 툭 던져놓곤 한다. 용기라기 보다는 게으름이고, 게으름이라기 보다는 무심함이다. 나 따위가 쓰는 글이 뭐, 이런 심정이랄까.

솔직히 내 글이 재미는 없다. 그래도 10명 중 1-2 명은 내 글의 ‘객관적 무재미’를 너른 마음으로 품어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것 같기도 하다. 팍팍한 세상이지만 은혜와 기적은 도처에 있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아니 그냥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다. 페이스북 친구만 해도 이리 많은데 세상엔 얼마나 많은 무림고수가 있을지. 원래 무림고수는 은둔자여야 하건만 요즘은 그냥 여기저기서 막 튀어나온다. 아 무서워. 긴장도 막 되고 그렇다. 이기려고 쓰는 글은 아니지만 너무 못쓰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종종 드는 이유다.

사실 ‘필력’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글쟁이들은 쓸 때마다 괴로운 게 글이라고 털어놓지만 ‘필력’은 정의되지도 않은 힘力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줄세운다. “글 얼마나 잘 쓰세요?” “저요? 만렙이예요.” “오 대단하시네요. 저는 이제 겨우 천렙인데.” “만렙 되시려면 고생 좀 하셔야 될 거예요.” 뭐 이런 대화가 떠오른달까.

글쓰기에는 일종의 역설이 존재한다. 쉬운 글은 없고, 쉬운 글이 없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좋은 글이라고 무조건 많이 읽히지도 않는다. 1000만 관객 영화가 좋은 영화가 아니듯 말이다. 가끔 쭉쭉 써내려가는 대단한 필력의 소유자보다 조금씩 다부지게 작은 이야기들을 품어내는 사람들에 끌린다. 뻗어나가는 것보다 스러지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쁘지 않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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