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의 모순

Posted by on May 30, 2019 in 단상, 수업자료, 집필 | No Comments

한국의 교육정책과 평가시스템은 너무나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한국교육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두 문장 사이의 간극에

한국교육의 비극적 모순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실행연구

Posted by on May 30, 2019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교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영어교육 석사 커리큘럼의 중심은 실행연구(action research)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양적연구나 문화기술지, 근거이론이나 비판적담화분석 등의 영역도 유효하긴 하지만 교사들의 삶과 이론, 방법론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데 실행연구만한 틀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을 이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넘어 늘 새롭게 변화시키고 재창조해야 할 실천의 장으로 보는 것. 이를 통해 평생을 지속할 반성적이며 비판적 실천의 토대를 쌓는 것. 이 방향에 대한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미움받는 법

지난 주 기말고사 일자를 공지했다. 늘 그렇듯 강의계획서에 나와 있는 학기 마지막 수업일이다.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다가왔다. 오래 전부터 계획한 여행을 가야 하는데 시험 날짜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되려 일정을 바꿀 수 없느냐고 물었고, 그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사뭇 단호한 것이 당장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날짜를 물어봐 줄 수 없겠느냐는 너무나 간곡한 요청에 결국 다음 시간에 학생들에게 날짜 변경 가능여부를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날짜를 옮기는 데 모두가 찬성한다면 일자를 변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수업 시간. 여행을 가려는 학생이 리마인드를 해 주었다. 학급 전체에 물었다. “시험 날짜 당겨도 될까요? 저는 한 주 일찍 봐도 상관이 없습니다.” 교실을 둘러보았다. 그냥 예정된 날 보자는 얼굴들이었다.

다시 “그냥 그날 볼까요?”라고 물었다. 여기 저기에서 그러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예정된 대로 봐야겠네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짐을 챙기는데 여행을 가려는 학생이 앞으로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길래 일정대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학생들에게 물어본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그래도 물어보신 게 아니잖아요.”
“???”
“거수해서 다수결 투표하지 않으셨잖아요.”
“아… 제가 교실을 다 둘러봤어요. 그대로 보자는 학생도 꽤 있었고요. 그러면 그대로 봐야죠.”
“그래도 다수결 투표를…”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가버린 학생. 나는 마지못해 ‘미안하게 됐다’는 말을 했다. 여행을 취소하거나 미뤄야 하는 상황을 맞은 그의 얼굴엔 분한 표정이 가득했다.

사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 ‘다수결 투표’가 답이라고 생각하는지. 몇 명이라도 기존의 계획을 선호한다면 그대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다수결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저 인식은 어디에서 온 건가?

황당하게 미움받는 거, 참 별로다. 그렇다고 피할 방법도 없다. 그래도 하나 배운 게 있으니 이제 시험 날짜 변경 요청을 받으면 단칼에 거절할 것이라는 것. 간곡함에는 단호함으로. 기말은 마지막 날에.

– 수년 전 일기에서

집착의 도약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정우성이 난민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글에 달린 댓글. “난민보다는 북한주민 인권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정적으로 끌리는 문제를 강조할 때 “나는 A가 B에 더 강하게 끌린다”고 말하기 보다는 “A는 B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두 단계의 도약이 있다. 먼저 자신의 주관적 믿음에 불과한 느낌이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생각의 위치로 점프하고, 이후에는 객관성을 갖는 명제의 자리로 점프한다.

의지와 실행의 영역에서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을 뚫고 나가려면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론장에서 특히 ‘베스트 댓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행태를 보면 믿음의 도약이라기 보다는 집착의 도약(leap of obsession)에 가깝다. 자신이 꽂혀 있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이 주장은 반박될 수 없다.

집착의 도약이 ‘베스트 댓글’이 될 때 사람들은 집착에 객관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많은 ‘베스트’ 댓글은 사실 ‘워스트’ 댓글이라는 것을.

이 시대 진리의 비결은 좋아요 숫자일 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화산과 마음

Posted by on May 30,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화산이 어떻게 폭발하는지 온전히 이해한다고 해서

화산을 막을 수 있을까?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온전히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을 막을 수 있을까?

#우문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몸 바꿔치기

Posted by on May 29,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거 제 몸 아니예요. 근데 괜찮죠?”
“아 어쩐지… 잘 어울리네. 난 언제 신제품 좀 써볼 수 있으려나. 몸 바꾼 지 벌써 3년이네.”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바꾸는 것에 이렇게 열광한다면 진짜 몸을 바꿀 수 있는 시대를 쌍수를 들고 환호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댓글분석의 한계?

나도 주로 언어를 보는 일을 하지만, 댓글분석 등의 궁극적인 약점은 사람마다 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쓴다는 가정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질문해 보자. 내가 쓰는 A라는 단어는 당신이 쓰는 A라는 단어와 같은가? 미국 민주당원의 ‘자유’는 공화당원의 ‘자유’와 같은가? 50대가 정치권에 대해 사용하는 욕설 B는 10대가 학교를 향해 내뱉는 욕설 B와 같은가? 자가설문조사가 주체와 말 사이의 정합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처럼 키워드로 특정 집단을 성격짓는 일은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컨텍스트를 거세할 위험을 갖는다. 분명 언어분석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맥락화하는 작업이 없이는 섣부른 결론에 다다르기 십상이다. 언어는 존재의 주요한 부분이지만 부분일 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안개 속을 거닐다

Posted by on May 29,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5월 말. 기말까지 3주 남짓 남았다. 이맘때면 다음 학기에 뭘 하게 될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번은 완벽한 예외다. 강사법의 여파로 (실은 교육부와 대학의 늑장대응으로) 까마득한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답답함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이 어떻게 변곡점을 맞을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지나친 자의식은 금물이라지만 안개가 유난히 짙은 이번 학기는 자주 뒤를 돌아본다. 임용고사를 공부하다가 보다가 교육학 암기가 너무 싫어서 대학원에 진학했던 일(함께 스터디했던 조원 6명은 모두 합격)이나, 경제적인 급박함에 회사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미루었던 일(딴짓을 했지만 보통의 직장생활과 IT프로젝트 매니징을 배웠다), 함께 하고 싶은 학자와 공부를 하게 된 행운(배운 거 다 까먹게 생겼…), 돌아와서는 또 닥치는 대로 미친듯 일했던 기억 (돌아보면 어찌 했나 싶을 정도다).

기업에서 기업연구소로, 다시 대학으로의 이직은 나름의 방향성이 있었다. 그때의 순진한 마음은 대학을 겪으면서 솔직한 마음이 되었고 여느 처세서의 말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끈둥글해진것이 아니라 까칠뾰죽해졌다. 경지에 이르지 않은 이상 부드럽기만한 마음으로 시간강의를 이어가긴 힘든 것 같기도 하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지경. 목표지점은 언제나 머리 속 지도 위가 아니라 걸음걸음의 끝에 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안개는 순식간에 걷힌다. 그때까지는 내 발끝에 시선을 둘 것이다. 어리숙하게 보일지라도 먼발치가 아니라 발딛는 땅을 살필 것이다.

조금 모자라게 좀더 자유롭게.
요즘 안개 속을 거닐며 되뇌는 화두다.

논문 제출 잡감

Posted by on May 29,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만 2년을 친애하는 벗과 함께 쓴 논문을 투고했다. 언뜻 이해가 안될지 모르지만 출판 여부와 관계없이 충분히 괜찮은 경험이었다. 완성한 것만으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둘다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2. 처음 본격적으로 정치와 관련된 글을 썼다. 처음에는 만만하게 보고 덤볐다가 논문의 범위를 조정하는 데만 한 해를 넘게 보냈다. 좌충우돌하면서 많이 깨지고 힘들게 배웠다.

3. ‘서로 배운다’는 말이 어울리는 협업이었다. 중간에 나 때문에 공저자 친구가 고생한 것 같아 미안한 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마지막까지 잘 온 것 같다.

4. 언젠가 ‘협업/공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리한 적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이번 협업 과정은 참으로 기쁘고 감사했다.

(1) 신뢰가 없는 이와 협업하지 않는다.
(2)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협업하지 않는다.
(3) 대화할 때 스파크가 튀지 않는 사람과 협업하지 않는다.
(4)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할 상황에서 협업하지 않는다.

요약: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산출물이 안나오더라도 괜찮은 사람과 협업한다.

5. 논문을 완성하고 쓰고 나니 ‘애개 겨우 이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뱅뱅 돈거야?’ 싶다. 논문을 읽는 사람도 그렇게 느낄지 모르겠다. 정제된 이야기 하나를 만드는 건 설익은 이야기 몇을 엮는 것보다 수십 배 힘든 일이다.

6. 논문을 쓰면서 “socioculturally-minded applied linguistics’라는 표현을 썼다. 실은 조금 더 나아가 ‘sociopolitically-minded’ 라고 불러도 좋을 지형에 놓여 있는 글이다. 이 바닥에서는 별로 알아주지 않는 주제인 것 같은데 그래서 앞으로 더더욱 열심히 파고 싶다. 대책 없는 변방쟁이.

7. 무언가를 내놓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정말 의미있다고 여기는 작업을 내놓을 수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다.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지만 시간은 살같이 빠르고 나는 해가 다르게 느려져 간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8. 엄연한 쓸쓸함과 벗하여 가야 한다. 하지만 오늘만은 벗 덕에 쓸쓸하지 않다.

이제 수업 준비 마저 해야지.

신라면, 어떻게 발음하시나요?

‘신라면’의 발음 – 결과발표

1. 무려 156분이 답을 해주셨습니다. (아 신라면이 매워서 슬프다고 표시하신 분까지 하면 157명이네요.)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1위는 ‘신나면’이 차지했네요.*

‘신라면’의 발음, 어떻게 하시나요?

/신라면/ 63명 0.404
/실라면/ 21명 0.135
/신나면/ 72명 0.462

2. 제가 이 설문을 하게 된 동기는 지난 학기 한 수업 시간에 ‘신라면’ 발음이 화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학교 3학년 수업에서 2/3 이상의 학생들이 신라면을 /실라면/으로 발음한다고 답했을 때 저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3. 전통적인 설명에 의하면 ‘신+라면’과 같이 ‘신’을 별도의 이름으로 인식할 경우 ‘신라면’으로 발음할 수 있고, 하나의 이름으로 인식한다면 ‘신나면’으로 자음동화를 적용해서 발음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죠.

4. 그런데 수업 시간에 20여 명의 학생들 중 15명 정도가 /실라면/으로 발음을 한다는 겁니다. 충격이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5. 제 경우에는 ‘신나면’이라고 주로 하고, 광고에 나오듯 ‘신~’을 길게 빼서 발음하는 경우에는 ‘시~ㄴ라면’에 가깝게 발음하는 듯합니다. 주변에 여쭈어보니 이런 경향이 나타나더군요.

6. 아래 광고 두 편(하나는 오래 전 강부자/최수종 광고, 다른 하나는 최근의 하정우 광고)에서도 ‘신나면’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2DD0qCgGQ (하정우)
https://www.youtube.com/watch?v=Tb2DD0qCgGQ (강부자/최수종)

이런 이유에서 저는 ‘신나면’이나 ‘신라면’을 예상했습니다.

7. 아까 답변해 주신 분 중에서 ‘신라면’은 /실라면/으로, ‘진라면’은 ‘진나면’으로 발음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조금 난감합니다.

8. 저는 이런 현상을 전통적인 경제학과 행동경제학의 설명방식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경제학과 같은) 규칙 기반의 설명에서는 언중이 하나의 패턴을 따라 동일한 발음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행동경제학적 설명을 따르면) 개개인의 발음은 표준규칙에 의해 움직인다기 보다는 자신의 주변 환경, 인상적이었던 발음 등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9. 저의 가설은 연령에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는 것이었는데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해요 즉 /실라면/을 선택해 주신 분들 중에 연령이 비교적 낮은 분들이 다수셨거든요. 하지만 의외로 연세가 있는(?!) 분들도 계셔서 세대간 차이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10. 물론 이 설문을 (1) “‘신라면’을 천천히 읽어보세요”라는 지시문과 (2) “신라면 광고를 찍는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맛있는 신라면’을 연기해 보세요”와 같은 지시문을 주었을 때로 분리해서 실시한다면 아래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사회언어학의 아버지 Labov가 지적한 바 있듯이 말이죠.

11. 저의 감으로는 ‘안녕하세요’에서 ‘요’의 발음도 상당히 많이 변화한 것 같습니다. 입을 오므려 정확히 /요/를 발음하는 경우는 분명 젊은 세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고요. 이런 변화가 하나 둘이 아니겠지요.

12. 아무튼 한국어는 철자 그대로 소리를 낸다는 생각은 전혀 근거가 없고, 하나의 철자도 이렇게 상당히 고르게 갈릴 수 있습니다.

13. 저는 이런 예를 들어 외국어 발음에 대한 메타지식으로 활용합니다. 한국어도 이렇게 발음이 갈리는데 외국어 단어의 발음도 당연히 갈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식으로 말이죠.

14. 이상으로 신라면/신나면 or 신라면 or 실라면/에 발음 설문에 대한 간략한 결과보고를 마칩니다.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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