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와 비주류의 글쓰기

Posted by on May 22,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문득 ‘주류언론’을 보고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과 비마이너나 워커스를 보면서 글쓰기를 배워가는 사람은 사뭇 다른 글길을 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습작의 문제가 아닌 삶의 지평의 문제일 것이고, 발딛고 있는 토양이 바뀌지 않는 글쓰기는 언젠가 ‘퇴각’하고 말겠지만 글의 꼴과 결을 지어감에 있어 이들 매체가 꽤나 다른 가이드가 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 또래가 소위 ‘언론고시’를 준비할 때만 해도 조중동의 글을 열심히 분석했던 게 떠오른다.)

좋은 글은 날카로운 칼과 같지만 더 좋은 글은 묵직한 숫돌과 같다고 생각한다. 날선 칼은 자르고 나면 그만이지만 숫돌은 읽는 사람의 마음결을 갈아 섬세하고 날카롭게 한다. 그래서 정말 좋은 글은 독자의 시선을 벼리고 어둑했던 것들을 명징하게 한다. 적어도 요즘 내게 큰 울림을 준 글은 대개 비마이너와 같은 ‘비주류’ 매체에서 나왔다. 지극한 이기심의 발로에서 언론인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주류의 글을 분석하고 베끼는 일은 점차 사라졌으면 좋겠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남해연구소 강의 후기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남해연구소 강의 <원어민과 비원어민의 차이, 그 간극 좁히기> (2019.5.20)

KIOST(한국해양과학기술원) 강의 덕에 처음으로 거제에 다녀왔습니다. 오전 강의인지라 전날 오후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하루 반을 온전히 썼네요. 빗속을 뚫고 가느라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풍광 덕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해양연구소답게 입구가 바다와 맞닿아 있더군요. 정문 옆이 바다인 정부기관은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강연에는 해양연구소 연구원들과 UST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대학원생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네이티브 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네이티브와 우리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아가 어휘와 쓰기학습의 측면에서 이 간극을 빠르게 좁힐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강연을 조직하신 직원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연구소 소장님의 말씀에 피곤이 확 풀리더군요.

겨우 하루 지났는데 며칠은 지난 기분입니다. 거제와 서울의 시공간은 참 많이 다르네요. 간만에 ‘시골’ 유학지의 느릿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좀더 여유있게 거제 곳곳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기본소득 그리고 기본시간

Posted by on May 21,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독서량의 감소와 함께 살펴야 할 현상이 있다. 통계치로 뒷받침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텍스트를 대하는 시간은 증가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책을 읽지 않더라도 각종 기사, 몇몇 페친의 포스팅 등을 늘상 접한다. 연령대가 낮을 수록 영상 소비가 많다고 하나 디지털 기기가 일상에 도입되기 이전보다 텍스트를 적게 소비한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이런 추측이 맞다면 독서량이 지속적으로 줄고 있는 반면 텍스트 소비량은 상당히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내가 놓치고 있을 수 있겠으나) 종래의 프린트 미디어와 함께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컴퓨터 등을 통한 텍스트 읽기까지 포함된 상세 통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Daniel Keller가 지적하듯 디지털 시대의 리터러시는 축적(accumulation)과 가속(acceleration)을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전자는 (1) 다양한 리터러시 활동(전통적 글쓰기와 읽기, 소셜 미디어 활용하기, 동영상의 생산과 소비, 데스크톱과 모바일 등 각종 플랫폼을 통한 소통)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piling up)과 (2) 일상생활 곳곳에 리터러시 활동이 폭넓게 자리잡는 것(spreading out)이다. 후자는 빠른 시간 안에 효과(effect)를 획득하는 리터러시 활동의 추구다. 메신저와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소통은 이러한 특징에 특히 잘 들어맞는다. 다시 말해 리터러시의 레퍼토리는 급속히 증가하면서 일상 곳곳에 침투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리터러시 행위의 목표를 신속히 달성해야 하는 사회적, 기술적, 제도적 압력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한 리터러시 행위를 획기적으로 줄이기는 힘들다. 삶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상황에서 독서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긴 점점 힘들어진다. 결국 호흡이 긴 리터러시 활동을 고민하는 이들은 단지 독서과정의 인지적, 정서적 요인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휘몰아치는 삶의 속도와 싸워야 할지 모른다. (긴 호흡의 글을 읽고 쓰는 일의 장점을 옹호한다는 가정 하에) 리터러시의 질에 대한 고민은 일상의 시간을 재조직하는 일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종종 ‘기본소득’ 외에 ‘기본시간’이라는 개념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다.

정치인의 말

Posted by on May 18,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유머는 지적 능력을 머금고
메타포는 태도를 품고
답글은 공감의 결을 보여준다.

현실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는 웃음과
서로 다른 세계를 순식간에 엮어내는 기예와
타인의 말에 담긴 코드를 적절하게 변주하는 일이야말로
말을 쓰는 존재로서 우리의 가치를
오롯이 드러내는 것이다.

적확한 언어가 지니는 아름다움은
단어 하나하나를 쓸모있게 만들려는 노력에서 비롯하고
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무척 닮았다.

정치는 때로 말을 빚어 삶을 바꾸는 일이건만
입만 열면 오물같은 말을 쏟아내는 이들 덕에
헤드라인만 봐도 온몸이 어지럽다.

단어의 무게를
말소리의 파장을
말하는 존재로서의 존엄을 살피지 않는
정치인들 속에서

노회찬을 생각한다.
김근태를 떠올린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어떤 위로

Posted by on May 18,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한 학교에서 다음 학기 강의 없음을 통보받은 날.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나: 강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없다네.
짝: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은 하지. 근데 신경이 쓰이네.
짝: 음… 내가 지금 피에르 르메트르라는 사람 책을 읽고 있거든. 근데 그 사람도 그 전까지 커뮤니케이션 교육 쪽 일 하다가 55세가 되어서야 소설을 썼대. 20년 문학을 가르치는 동안 많이 배워서 쓴 거라고.
나: 나는 책도 많이 안읽어서 힘들 거 같아.
짝: 지금부터 하면 되지.
나: …

소설을 쓰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위로가 된다.

그렇다고 대학이 시간강사를 대하는 방식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힘겹게 싸우는 이들이 떠올라
할말을 꾹꾹 눌러담는다.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고,
모든 문이 닫히면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된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잔혹한 것 아닌가.

근데 55세까지 뭐하면 좋을까… (먼산)

자기주도학습 잡감

Posted by on May 16,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수업자료, 일상 | No Comments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을 이야기한다. 학습자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점검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에서 학습하는 주체의 실질적 권력, 학습의 목표와 대상을 정의하는 주체와 이를 받아안는 주체 사이의 관계, 자기주도의 범위 등이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습을 위한 과업은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그 안에서 ‘자기주도’를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야간자율학습’은 자율이 아니며, ‘자기주도적으로 하루에 단어를 100개씩 외우라’는 주문은 타인의 욕망에 학습자를 종속시킬 뿐이다.

결국 자기주도의 핵심은 학습자가 주체로 나설 수 있는 맥락과 과업의 창조에 있지, 주어진 맥락과 과업 하에 맞는 주체성의 생성에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어설픈 자기주도학습 담론은 주어진 구조의 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순응능력을 요구할 뿐 주체로서의 학습자가 지닌 욕망과 탈주, 창조적 열망을 받아안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자기주도학습 담론의 핵심에는 학습전략 훈련이 아니라 학습을 둘러싼 권력배분의 문제가 놓여 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말가져옴의 윤리

‘버닝쑨대국집’과
‘버닝선대인’ 작명에서
말가져옴의 윤리를 생각한다.

저 말을 쓴 사람들은
주목받는 말장난을 원했을 거다.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를 일으켜
한번 더 쳐다보게 하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에서
말만 떼어 가져오려 했다.
말이 태어난 자리의
착취와 잔혹함
분노와 고통은 아랑곳 않고
말의 힘만을 가져오려 한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말은 사전 위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 상태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관계 속에
뿌리박고 있다. 투쟁하고 있다.
권력과 욕망과 아픔과 교차하고 있다.

그리하여
말 가져옴의 윤리는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는 윤리이며
말이 자라난 사회정치적 토양에 대한 살핌의 윤리이며
무엇보다도
그 말로 엮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이다.

삶과 세계를
인간을 거세하고
말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시키는 행위는
결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된다.

단지 말실수가 아니다.

삶에 대한 모욕이며
인간에 대한 망각이며
컨텍스트에 대한 몰이해이며
자기중심성으로의 한없는 함몰이다.

우리의 말은
원래 누군가의 말이었고
우리의 조어는
결코 완벽한 창조가 아니다.

말이 우리 곁에 올 때
세계가 온다.
사건이 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이 온다.

우리 모두
그렇게 말을 쓰면서
그렇게 삶에 잇대면서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길 빈다.

단단한 영어공부, 함께 걷는 이들을 만나다

Posted by on May 14,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영어공부, 영어 | No Comments

평범한 후기이겠거니 했는데
읽다가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책이지만
누군가의 삶에 닿아
어떻게 쓰이게 될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군요.

만남은 기억을 소환하고
지금을 돌아보게 하고
또 다른 만남을 불러옵니다.

방학 이후 쉼없이 달려온 탓에
조금은 힘겨운 나날이지만
작은 기적들을 맛보며
또 한 걸음 내딛습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열어가고자 하는 분들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https://blog.naver.com/pr1024/221537130417

색깔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으면 보지 못한다?

Posted by on May 14, 2019 in 과학, 수업자료,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색상을 가리키는 언어가 없다면 그 색상을 볼 수 없다는 취지의 컬럼이 공유되고 있는데… 컬럼의 내용상 기 도이처의 저작인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를 그대로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즐겁게 읽은 책이네요.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가 없으면 인지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워프 가설에 대응하는 주장입니다. 흔히 언어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이라고 불리지요. 하지만 이런 강한 언어결정론은 학계에서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다만 언어의 사용이 인지과정을 세밀하게 조정하거나 특정 대상의 개념화에 다소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의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또한 논쟁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요.

학계의 논의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름 모를 색깔들을 꽤 많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립스틱을 놓고 색깔을 대보라 하면 어버버 하겠지만 서로 다른 색상의 립스틱을 구별하는 일이 아주 어렵진 않겠지요.

컬럼에서는 마치 언어학계의 중론인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이름을 모른다고 색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 근거가 희박한 주장입니다. 다만 특정한 이름을 붙여 색상들의 스펙트럼을 특정한 범주로 분류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관련 색상을 잘 구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Blue”라고 통칭되는 색상이 러시아어에서는 goluboy와 siniy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미국인들과 러시아인들에게 goluboy와 siniy 경계의 색상을 보여주고 이를 구별하라고 하면 러시아인들이 미국인들에 비해 구별하는 속도가 미세하게 빠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인들이 저 아래 중간 사각형 두 개의 차이를 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지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동물들은 색상을 가리키는 말이 없어도 자신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색상을 구별합니다.

덧. 컬럼에서 언급되었듯 기 도이처 또한 색상용어가 등장하는 순서가 일정하다는 것을 말하긴 했지만 이 분야를 개척한 사람은 Brent Berlin과 Paul Kay입니다. 1969년 기념비적 저서인 <Basic Color Terms: Their Universality and Evolution>을 내서 색상과 인지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이 저서에 대한 설명은 아래 위키 페이지를 참고하십시오.

https://en.wikipedia.org/…/Basic_Color_Terms:_Their_Univers…

덧2. 일반인 수준에서 색상용어에 관한 학계의 논의를 정리한 영상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Vox 미디어에서 제작한 <The surprising pattern behind color names around the world> 입니다.

덧3. 아래 색상 이미지는 Lera Boroditsky의 테드 강연 <How language shapes the way we think>에서 가져왔습니다.

짓다 철학학교 특강 후기 (2019.5.13)

Posted by on May 14, 2019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일상 | No Comments

1. 강연을 마치고 첫 질문을 던지신 분은 20년 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셨다. 주로 입시 그 중에서도 외고입시 일을 많이 하셨는데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끼시고 중간에 상담을 전공하셨다고 한다. 네이티브 중심주의와 인풋만능주의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이젠 학부모들과 만나면서 그들부터 올바른 영어교육을 경험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계시다고 했다. 듣는 내내 내 마음에도 눈물이 고였다. 영어공부엔 상처가 많다. 상처인지도 모르고 지나는 상처들.

2. 월요일 저녁인데도 적지 않은 분들이 오셨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홍천여고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멀리 서울까지 와 주었다는 것. 서울 안에서도 시간을 내기 힘든데 홍천에서 와준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참 고마왔다. 비록 그들의 삶에 당장 대단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겠지만, 게속해서 삶을 위한 단단한 영어공부를 이야기할 힘을 얻는다. 시쳇말로 ‘입시에도 내신에도 별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를 들으러 먼 길을 오신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3. 대중강연을 하면 항상 나오는 질문이 있다. 유아 영어교육을 언제부터 어떻게 시켜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정답이 있을리가 없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고 아이들의 성향이 다르다. 계획을 짠다고 해서 그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만나는 선생님들도 천지차이다. 쉽게 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도’는 (1) 영어에 올인하지 말고 한국어 발달을 염두에 두며 (2) 아이의 흥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영어를 경험하게 하고 (3) 아이가 계속 거부하면 재촉하지 말고 인내심으로 기다리며 (4)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시키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어를 얼마나 시키느냐”가 아니라 “아이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주체가 되라”는 이야기를 한다. 영어를 중심에 놓지 말고 전인적 성장을 중심에 놓으라는 요청이다.

마지막으로 행사를 준비해 주시고 진행 및 정리까지 담당해 주신 짓다철학학교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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