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 or Perish!

어떤 논문을 읽으면 내 작업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또 어떤 논문을 읽으면 ‘이런 글은 하루면 쓸 것 같다’는 오만함이 발동하기도 한다. 학계에서 훈련을 받고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글이라 하더라도 천양지차가 있다.

함량미달의 논문이 쏟아지는 현상은 왜 일어날까? 개개인의 연구 역량차도 있고, 글쓰기 훈련의 수준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개별 학회가 요구하는 연구의 질에도 상당한 편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밀어내야만 생존 가능한(publish or perish)’ 양적 평가가 지배하는 학계의 풍토가 가장 큰 원인 아닐까?

#영어로논문쓰기 #삶을위한리터러시

시간을 뒤집는 기억

Posted by on Jul 18,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5년 전 특별할 것 없는 말 몇 마디를 기억하고 그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마음이 다섯 해의 망각을 깨웠습니다. 퇴근길 분주한 지하철 안, 뭉클한 눈으로 기억의 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고마왔습니다.

어떤 ‘친절’은 베풀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되기에 존재하게 됩니다. 발생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에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Give and take가 아닌 take and give. 시간을 뒤집는 기억들을 떠올립니다.

새로운 세계

Posted by on Jul 17,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다음 학기 강의가 결정되었다. 강사법 시행의 여파로 예년에 비해 5주 이상 늦게 결정된 셈이다. 강사모집 공고가 여전히 나오는 걸 보니 몇몇 학교들은 7월 말이 되어서야 다음 학기 강사를 확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강의를 시작한 후로 가장 적은 강의를 맡게 되었다. 대학 울타리 안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먹고살기 위해 다른 일들을 모색하고 있다.

3. 이런 상황에 이른 데에는 강사법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지만 내가 대학강의에 대해 갖는 생각도 한몫했다. 7년간 누구보다 많은 강의를 소화하면서 말 그대로 엄청 얕고 엄청 넓은 지식을 쌓아왔다. 이대로 가면 몸도 마음도 공부도 너덜너덜해질 것 같다. 아니 이미 그런 면이 있다.

4.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많이 가르치기 보다는 잘 가르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량의 100%를 강의에 쏟아붓는 삶에서, 겉핥기 공부에서 벗어나야 한다.

5.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사람구실을 하면서 공부와 집필 시간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할 때가 왔다. 강사법을 둘러싼 여러 대학의 행태는 심히 유감스럽지만 그로 인해 결단의 시간이 앞당겨졌다. 가혹한 시대는 지혜가 담긴 의지를 요구하고 있다.

6.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 학교에서 3년간 일하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3년간 도서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연구자에게 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자원이 이렇게 기쁘다니.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7. 사실상 2학기가 시작되었고, 2019년_2학기 폴더를 만들었다. 새로운 일들을 궁리한다. 대학 밖에서 가르치고, 공부모임을 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짓고자 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서 배우고 싶다. 그 가운데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 믿는다.

이 근거없는 믿음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선택지이다.

말하고 듣는 주체의 비대칭성

어떤 고민

설명을 할 때는
듣는 사람을 고려하기 마련이다.
초등학생과 중고생, 또 성인에게
같은 언어와 예시로 설명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
말할 때에는
듣는 이의 복수성을
자연스럽게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에 따라
내 말은 변주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듣거나 읽을 때는 다르다.
듣거나 읽을 때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 하나의 청자와 단 하나의 독자
즉 자기 자신만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경험과
나의 생각과
나의 감정과
나의 지식을 기반으로
듣고 읽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내가 듣고
내가 읽고
내가 이해한다.

그렇기에,
나에게 들리지 않고
나에게 읽히지 않고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글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기 일쑤다.

말하거나 쓸 때에는
청자와 독자를 고려하지만
듣거나 읽을 때에는
오직 하나의 청자와 독자만을 상정하는
리터러시 행위의 비대칭성.

여기에 많은 문제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유연하게 말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듯
여러 사람이 되어 듣고 읽어내는 일이 필요할 듯한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를 논의함에 있어
‘올바른 독법’만을 강조하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다.

정확히 읽어내는 것과
누구로 읽어내느냐의 문제는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읽기만큼이나
누가 되어 읽는지.
뒤집어 말하면
말글을 접할 때
어떤 존재가 되는지 살펴야 한다.

정답을 강조하는 리터러시 교육은
단 하나의 존재를 상정한다.
이는 이상화된 독자(idealized reader)인데,
실제 삶에서 이 이상화된 독자는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잘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의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일을 넘어
이상화된 독자를 해체하고
다양한 해석의 주체가 되어보는 일을 포괄한다.

이 사회의 획일화된 교육이
일분일초를 다투어야 하는 사회체제가
이런 읽기를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나는 왜
새벽 잠을 설치고
몇 시간을 뒤척거리다가
이런 해상도 떨어지는 글을 쓰고 있는가.

구멍 숭숭 생각이지만
계속 생각하고 발전시켜 보기로 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Four Resources Model: Critical Literacy

호주 빅토리아 주 교육훈련과(Department of Education and Training)의 Literacy Teaching Toolkit 사이트. 리터러시 교수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Critical) Literacy pedagogy를 논의할 때 자주 등장하는 Four resources model을 찾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관련된 자료는 많지만 역시 웹사이트의 가독성이 중요한 듯. 참고로 유아 및 초등수준의 자료가 대부분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4 Resources Model
https://www.education.vic.gov.au/school/teachers/teachingresources/discipline/english/literacy/readingviewing/Pages/fourres.aspx#decoder

https://www.education.vic.gov.au/school/teachers/teachingresources/discipline/english/literacy/Pages/default.aspx

일상의 리터러시에 대하여

– 글로/말로 사과하는 법
– 소셜 미디어에서 답글 다는 법 & 답글 참는 법
– 강의평가란에 건설적인 멘트 남기는 법
– 택시기사와/가 이야기하는 법
–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는/양보받는 법
– 식당에서 기분좋게 추가주문하고 음식 받는 법
– 조별활동에서 상처 주고받지 않고 소통하는 법 (가능할까?)
– 칭찬에 답하는 법
– 감정을 표출하는 글에 반응하는 법
– 문자메시지/이메일 쓰는 법
– 헤드라인만 보고 반응하지 않는 법
– 아재개그의 유혹 참아내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 자신에게 상처주지 않고 말 건네는 법
– 말하고 글쓸 필요가 없는 영역으로 사라지는 법

책 안읽고 읽은 척 하는 ‘리터러시’보다
이런 게 훨씬 더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삶을위한리터러시

다녀오다

Posted by on Jul 12, 2019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짝의 장기 근속 휴가 덕분에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다녀왔다. 무계획과 빈틈으로 일관한 나를 인내와 미소로 이끌며 16일 간의 멋진 여행을 만들어 준 짝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루 2만 여 보를 걸으며 런던, 에든버러, 파리를 살폈다. 수박 겉핥기도 안되는 배움이었지만 기쁘고 성실하게 걸었다. 마음의 손바닥을 펴면 반짝일 작은 순간들을 모았다. 바람이 훅 불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겠지만, 잠시 내 손을 거쳐간 빛이 있었다는 걸 잊지 않을 것이다.

텍스트와 멀어졌다. 쓰기와 읽기 모두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평상시의 페이스를 회복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실 그게 좋았다. 멀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가까와질 수 있다는 것. 문해력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문해의 바깥으로 한 발을 내딛어 보는 것. 다른 세상을 기웃거리는 것.

사랑하는 음악과도 멀어졌다. 보름간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사적인 음악감상은 사라졌다. 거리의 다양한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산책로 울창한 나무들의 새소리에 들떴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고도 음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음악만은 아닐 것 같다. 사랑이라는 말은 꽤나 습관적이고 수사적인 것.

그렇게 집에서, 글에서, 음악에서 멀어졌다. 그렇다고 나 자신과 가까워졌느냐 하면 그건 또 모르겠다. 기말 2주간의 폭풍같은 시간을 보내고 노곤해질 때로 노곤해진 상황에서 쉼없이 걷기가 수월하진 않았고, 그저 걷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욱신거리는 다리가 몸 전체를 장악하자 자신과 가까와질 틈새는 사라졌다. 굳이 가까워진 것을 찾으라면 나 자신의 연약함 아니었을까.

쌓아놓은 일들을 해야 한다고 되뇌인다. 문득 지금 앞에 놓인 일들이 세상을 둘러보는 일보다, 짝과의 동행보다, 쉼없이 걷기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것보다 중요한지 묻는다. 삶이 짧은 것이 아니라 나의 우둔함이 긴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긴다.

천착하기 만큼이나 끊어내기가 소중하다는 가르침을 준 여정. 그렇게 똑같은/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Eva Cassidy – Time After Time

‘친구맺기’ 단상

1. 말과 생각 사이에 어떠한 연관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부르든 현상의 본질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2. 페이스북의 ‘친구맺기’는 꽤나 요상한 명명이다. 친구가 아닌데 ‘친구’가 되고 뭔가를 맺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맺기’가 된다. 언어의 외연이 확대되는 일이야 자연의 법칙에 가깝지만,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해서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3. 친구맺기의 형식은 단순하다. 친구맺기를 신청하는 사람은 요청(request)을 한다. 이에 대해 요청을 받은 이는 수락(accept)한다. 요청과 수락의 짝은 일종의 의례(ritual)로 기능한다.

4. 종종 이 의례의 이름이 ‘친구맺기’가 아니라 ‘어쩌다연결’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쩌다연결’이 의미하는 것은 관계의 지속이 아니라 필연적 헤어짐이다. 계정은 언제든 비활될 수 있고 탈퇴 또한 가능하다. 그러고 보니 ‘헤어짐’이라는 말도 과한 것 아닌가 싶다.

5. 소셜미디어에서 친구를 맺는 일은 누군가를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담벼락을 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뜻에 가깝다. 관계를 상정한다기 보다는 구독을 허락하는 행위인 것이다. 구독을 허락하는 것과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건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행위를 ‘friend request’를 ‘accept’한다고 표현한다.

6. 쉽게 툭 끊어지는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애당초 없었던 관계에 대해 환상을 부여한 것에 가깝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옷깃을 스치긴 꽤나 힘든 일 아닌가.

7.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존재하지 않던 것에 대한 집착을 강화한다.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기대 뿐 아니라 개인 정체성의 일부도 포함된다. 내가 아닌 나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친구의 수가 많아지고 반응의 수가 증가하면 자신에 대한 ‘환상’도 팽창한다.

8. 의미있게 유지할 수 있는 관계의 수를 말할 때 종종 언급되는 ‘던바의 수’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수백 수천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게다가 페이스북은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적’ 알고리즘에 따라 담벼락을 재구성한다. 이 논리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의 선택 또한 상당부분 환상이다.

9. ‘너랑 친구 안한다(unfriend)’는 애초에 많은 이들을 ‘친구’로 받은 이들에게 예비된 업보일지도 모른다. 필요이상의 물질적 부를 누리는 이들에게 낭비가 필연이듯 말이다.

10. 권력(power)의 그림자를 배제할 수 있는 관계란 없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눈높이를 맞추고 경청하기 위해 친구맺기를 ‘요청’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줄 사람들을 찾기 위해 친구맺기를 ‘강요’한다. 전자의 친구가 후자의 친구와 같을 리 없다.

11. 친구였던 적 없는 친구를 ‘잃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나도 많은 이들에게 그다지 좋은 친구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별로 없다.

12. 그럼에도 ‘어쩌다연결’에서 ‘친구맺기’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은 참으로 소중하다. 그런 기적에 맛들여 이 공간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너무 교훈적인 결론인가? 아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결론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