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마지막 밤에

Posted by on Jul 31, 2019 in 링크, 일상 | No Comments

끝, 시작, 그리고 끝 ending, beginning, and ending, again (모티프로 즉흥연주 & 믹싱. 2013년 11월. 사진은 아마도 2011년.)

바람에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번역 : 권정생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교육을 위한 언어학 이론

촘스키를 주축으로 한 형식언어학은 시대를 풍미한 언어학의 본류로서 공부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문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기능언어학이나 인지언어학의 쓸모가 훨씬 더 많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개개인마다 ‘더 나은 문법체계’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모두를 조금씩 공부해 본 입장에서 교육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에서 촘스키 언어학 대신에 다른 언어학을 공부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그림책 잘(못) 읽는 법 (feat. 짝)

짝: (문해력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그런데 그림책을 잘못 읽는 경우가 많은 거 같더라.
나: 그림책을 잘못 읽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짝: 영어 그림책의 경우가 더 심한 거 같은데… 그냥 텍스트만 읽고 그림은 슥 보고 넘어가는 거지.
나: 아…
짝: 그림책은 텍스트랑 그림이 함께 있는 건데.
나: 그렇지. 둘다 중요하지.
짝: 근데 내용 이해된다고 텍스트 위주로 넘겨버리는 거지.
나: 나도 그렇게 읽은 적 많은 거 같은데…
짝: 일러스트레이터도 독립된 예술가잖아. 단지 주문한 걸 그린 게 아니라 텍스트에 기반해서 어떤 장면 혹은 맥락을 해석해 낸 거거든.
나: 그렇겠네.
짝: 특히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그냥 텍스트만 읽어주고 넘어가기 보다는 왜 그런 그림이 거기 들어가 있는지 질문을 하는 게 좋아.
나: 왜 그림그린 사람이 그렇게 해석했는지 말이지?
짝: 그렇지.
나: 자기는 책 만들 때 텍스트가 먼저 나오나? (<– 짝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예요.)
짝: 응. 나같은 경우는 학습에 초점을 맞추니까 텍스트가 먼저 나오고 그걸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나: 그렇겠네. 난이도나 내용을 조절해야 하니까.
짝: 응. 그렇다고 하더라도 텍스트와 삽화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관계가 있어. 텍스트를 그냥 묘사하는 게 아니라 해석해서 그리는 거지.
나: 삽화가의 의도와 관점이 개입되겠네.
짝: 그렇지. 그게 핵심이야.
나: 결국 읽기지도를 하거나 소리내어 읽어줄 때도 왜 그런 그림이 나왔을지,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어디인지, 자신이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지,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때 새로운 그림을 넣고 싶지는 않은지 등등을 다뤄주면 좋겠구나.
짝: 응. 텍스트와 그림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거.
나: 그림책 읽어줄 일은 없지만 기억하겠소. 그림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ㅎㅎㅎ
짝: 응. 그렇게 해. ㅎㅎㅎ

요약: 그림책에서 그림은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핵심 요소중 하나입니다. 텍스트와 그림간의 긴장과 교섭, 갈등과 협업에 주목하여 읽어보세요. 그림책이 달리 보일 거예요.

#삶을위한리터러시
#다아시는이야기를이렇게길게해서죄송합니다.

‘유튜브의 시대’와 학교의 권력

전통적으로 학교교육의 내용은 ‘텍스트 중심 문해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조금씩 보급되고 있지만 현재의 교육이 텍스트 중심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필자가 처음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한 게 1995년이다. 이후 월드와이드웹이 급부상하고 전산망이 빠르게 보급됨과 동시에 대중 개개인이 운용할 수 있는 컴퓨팅 자원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 등은 웹의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잡았고 모바일을 통한 정보습득과 공유가 일상이 되었다. 최근 영상매체의 증가로 인해 적어도 10대 전후의 세대에 있어서는 문자 기반 읽기자원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담론과 교육 이론가들이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1996년 J. P. Gee와 N. Fairclough 등의 학자들은 ‘New London Group’이라는 연구집단의 이름으로 하버드 교육 리뷰에 <A pedagogy of multiliteracies: Designing social futures>라는 기념비적 논문을 발표한다. 이들은 기존의 리터러시 교육이 곧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 주장하면서 수백 년간 근대교육을 지배해온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 교육에 일대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게 무려 23년 전 일이다. 그들의 주장이 묻힌 것도 아니다. 위 논문은 2천 여 회 인용되었고, 이후 그들의 주장을 엮은 책 <Multiliteracies: Literacy Learning and the Design of Social Futures>이 라우틀리지에서 출판된다. 교육 관련 서적으로는 드물게 피인용 회수가 4천 회에 육박한다. (구글 스칼라 기준) 한 가지 주장을 담은 이야기가 6천 회 이상 인용되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적어도 학계에서는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럼에도 텍스트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일부 수행평가의 예외는 있으나 내신과 수능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지필평가의 포맷을 고수하고 있다. 정보의 바다 유튜브의 시대, 학생들은 여전히 단일 국가기관이 발행한 EBS 수능특강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기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크게 세 가지 원인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기존 제도의 관성이다. 한국교육의 실질적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평가체제의 변화가 필수다. 그런데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다. 평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교육내용을 바꾸어야 하고 교육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당연히 교육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지식을 익혀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변화인 것이다.

둘째는 근본적인 이유다. 여전히 텍스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기반이 되는 학문체계는 텍스트 위에 올려져 있다. 과학과 기술, 지식생산은 압도적으로 문자에 의존한다. 학술 및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은 문서로 이루어진다. 흔히 말하는 ‘고급지식’의 생산, 축적, 공유, 재가공 등 제반 활동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영상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의 변화를 받아들여 교육을 본격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어떤 유익을 가져다줄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는 좀더 솔직한 이유다.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른다. 알고 있는데 안한다기 보다는 몰라서 못하는 측면이 큰 것이다. 이리저리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난무하지만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만큼의 지식과 노하우, 이론적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친구가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를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시대다. 그간 인류는 다음 몇 십년의 변화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교육의 판을 짰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기성세대가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장 감을 잡기 힘든 시대일지도 모른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로 대표되는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이지만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학교교육은 여전히 강력하다. 위의 이슈들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 구조는 쉽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하지 않는 학교를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자명하다. 그들이 힘을 갖게 될 때에도 이 관성이 유지될까? 그 시기를 준비하는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지금 이 모습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참고: A pedagogy of multiliteracies designing social futures
http://newarcproject.pbworks.com/f/Pedagogy+of+Multiliteracies_New+London+Group.pdf

#삶을위한리터러시
#디지털리터러시

 

물화 reification 와 명사화 nominalization

“톰슨은 『이데올로기 이론 연구Studies in the Theory of Ideology』(1984)와 『이데올로기와 현대 문화Ideology and Modern Culture』(1990)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당화legitimation, 위장dissimulation, 통합unification, 분열fragmentation, 물화reification라는 다섯 가지로 구별한다.”

(1) ‘정당화’는 지배관계를 ‘정당한, 즉 공정하고 지지할 만한 것으로 제시하여’(1990: 61) 그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하는 과정이다.

(2) ‘위장’은 지배관계를 숨기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3) ‘통합과 분열’은 서로 반대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연관된다. 통합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람들을 통합하고 하나로 묶어내고자 하는 반면, 분열은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자 한다.

(4) ‘물화’는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 방식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물화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을 하나의 사물 혹은 사건으로 변환시킨다는 뜻이다. 과정은 행위자가 있고,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담고 있는 동사로 표현된다. 하지만 물화된 사물은 사회-역사적 기원이 은폐된 채 행위자와 행위 없이 그냥 그렇게 존재한다.

— 이상 <리터러시와 권력> (사회평론, 2019) 3장 ‘언어와 권력’에서 발췌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방식에서 ‘물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 언어현상으로 명사화(nominalization)가 있다. 세계는 중단없는 시간의 흐름과 물리적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becoming)된다. 하지만 명사는 이러한 역동의 상태를 경계가 반듯하며 굳어진 개념으로 포획한다. 이는 인간의 언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이자 세계를 구획화하는 강력한 무기이다. 물화와 관련해서 이전에 썼던 글을 업데이트하여 아래 옮겨본다.

===

언어의 한계 중에 하나는 바로 명사표현이 만들어 내는 효과와 인상입니다. 오늘은 성경구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어 언어의 ‘은밀한 함정’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입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발화됩니다. 글로 써 놓아도 그것을 읽어내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지요. 한 문장이 일시에 이해되거나 발화될 수는 없습니다. 문단이나 글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진-리-가-너-희-를…”과 같이 발화되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가 퍼져나가므로 진리 다음에 자유가 나오게 되죠. 흐르는 시간에 얹히는 말소리는 결코 한 순간에 응축될 수 없습니다. ‘진리’와 ‘자유’가 동시에 포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언어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는 때로 존재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선후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진리’ 다음에 ‘자유’가 오는 언어 구조가 저 말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담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어가 갖는 선형성(linearity)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언어는 복잡다단한 요인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세계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을까요?

아울러 생각해 볼 지점은 “진리” 그리고 “자유”가 명사라는 사실입니다. 중학교 때 배운 “명사는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명을 떠올리면, “진리는 OOO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정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사물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명사라면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것’ 혹은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명사표현의 이분법적 도식(소유의 여부 혹은 도달 여부)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네게 진리가 있어? 그럼 넌 자유로운 거야!’라거나 ‘진리를 모른다고? 그럼 자유로울 자격이 없군!’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언어표현의 한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좀더 정확한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진리를 알아가는 점진적 과정은 조금씩 자유케 되는 과정을 내포한다. 이 두 과정은 서로 교섭하며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킨다.”

물론 이 문장에서 사용된 “과정”이라는 단어 또한 명사이므로 구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진리”와 ‘자유’라는 명사가 개별적으로 쓰였을 경우 주는 느낌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거나 거기에 도착한 상태가 아니라, 실천하고 아는 과정으로서의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다”고 하는 동사는 대개 “그 사람 이름을 안다”나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안다”와 같이 특정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행위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진리를 안다/모른다는 이분법은 형식논리학의 구조에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앎’과 ‘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밀어부치면 언어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참 부족한 매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진리와 자유의 관계를 선후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언어, 진리나 자유를 명사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혹은 표현하도록 강요하는 언어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상태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변화의 과정일 테니까요.

언제나 언어와 삶을 엮어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계는 언어를 통해 물화reification되지만, 삶은 언제나 운동하고 생성되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지언어학이야기

종이책, 전자책, 그리고 과업(task)

Posted by on Jul 30,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 수많은 논의가 대개 간과하는 것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으로 읽느냐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전자책에 어른들은 종이책에 익숙하다는 가정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들이 시험을 위해 종이책을 볼 때와 어른이 재미로 종이책을 볼 때의 차이는 어떨까? 어른들이 퀴즈를 풀고 직무교육을 끝내야 할 때 보는 전자책과 아이들이 그냥 전자책을 볼 때는 어떨까?

매체만큼 중요한 것은 매체로 무엇을 하느냐, 그 ‘무엇’이 독자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이다. 일반적인 독자가 추상적으로 정의된 매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독자가 주어진 상황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과업(task)을 수행하면서 매체와 상호작용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책과 영상: 상상력(imagination)과 지각(perception)이 만들어 내는 인지 생태계의 변화

1. 적지 않은 이들이 소설의 영화화에 불만을 터뜨린다. “내가 알던 소설은 이게 아닌데 영화가 말아먹었다”고 외치곤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영화에는 극찬을 아끼지 않게 된다.

2. 실제로 영화가 망작인 경우도 많고 연출력이 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제작비가 부족한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망하는 데는 이 외에도 몇 가지 근본적인 요인이 더 있는 것 같다.

3. 우선 ‘새것 효과’다.소설을 통해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처음 접할 때의 신선함이 영화에서는 떨어진다. 이 점은 굉장히 직관적이다. 뭐든 두 번 보면 새로운 작품이 주는 짜릿함을 찾기 힘든 것이다.

4. 다음으로는 디테일의 차이다. 대개의 경우 소설의 내용 전부를 영화화하긴 어려우며, 감독과 작가는 취사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특정한 부분이 강조되고 ‘줌업’되어 그려진다. 여기에서 기존 스토리의 일부분은 ‘누락’되고 촘촘한 디테일을 기대하는 관객은 여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5. 무엇보다 텍스트와 영상이라는 매체의 근본적 차이가 실망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텍스트는 문자의 배열을 통해 세계를 ‘그려낸다’. 여기에서 ‘그려낸다’는 단어의 중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6. 먼저 작가가 세계를 그려낸다. 이 경우 그려냄의 결과는 텍스트, 즉 문자의 배열이다. 다음으로 독자의 ‘그려냄’이다. 이 경우 독자는 텍스트를 재료로 작품 속 세계를 머리속에 상상해 낸다. 이 경우 산출물은 5감의 간접경험을 수반하는 신경의 활성화 패턴이다. 많은 이들은 종이 위의 꼬불꼬불한 잉크자국이 독자의 머리를 ‘마비시키는’ 경험을 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7.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의 복수성이 탄생한다. A와 B가 같은 소설을 읽었다고 하자. 비슷한 속도로 정독을 했다. 그렇다고 A와 B의 머리속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아닐 것이다. 같은 텍스트를 재료로 했다고 해도 그들의 상상(imagination)은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자가 가진 경험과 지식, 기대와 독서전략의 차이가 상상력과 스타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8. 따라서 A와 B의 독서는 같은 텍스트에서 다른 세계를 그린 경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체 줄거리는 비슷하게 기억한다 하더라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지나는 지적, 정서적 여정은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9. 이번에는 영상을 보자. 두 사람이 집중하여 하나의 영화를 보았다.이 경우 두 사람은 완벽하게 같은 영화를 보았을까?

10. 사실 그럴 수는 없다. 어떠한 자극도 서로 다른 유기체에 동일한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인상깊게 본 장면이나 기억에 남는 대사가 다를 것이고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디테일 또한 있을 것이다.

11. 하지만 한 가지는 자명하다. 두 독자가 텍스트를 재료로 그려낸 바 보다는 두 관객이 영상을 통해 접한 바가 훨씬 더 유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자의 경우 상상(imagination)의 힘이 강하게 작용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지각(perception)이 단연 우세하기 때문이다.

12.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이 있다. 책의 위기와 영상의 두각을 논의하는 것은 매체(media)의 권력관계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체의 변화는 결국 인간의 간접경험이 상상이라는 엔진을 쓰느냐 지각이라는 엔진을 쓰느냐의 문제로 봐야 하는 것이다.

13. 다시 말해, 매체의 변화는 미디어의 변화라는 외피를 넘어 인지(cognition)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는 인류의 인지 생태계(cognitive ecology)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한다. 따라서 ‘책이냐 영상이냐’는 생각의 생태계의 지각변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관점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14. 맥루한의 책 제목을 살짝 뒤틀자면 “미디어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뇌를 어떻게 마사지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의 뇌를 마사지하는 주요 도구가 변화하고 있고, 그 결과 두뇌가 소통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15. 미디어의 세계가 묻고 있다.
“뇌를 어떻게 마사지해 드릴까요?”

#삶을위한리터러시 #책과영상

곧 지워질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

Posted by on Jul 27,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새로운 학기,
큰 변화들이 기다리고 있다.

‘절반의 프리랜서’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두려운 여정이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또다른 세계를 열어갈 생각에
기대가 되기도 한다.

합정-망원 시대를 접고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난다.
일터로부터는 멀어지지만
나 자신과 좀더 가까와지고 싶고,
‘동네’라는 공간을 발견하고 싶다.
무엇보다 산책의 즐거움을 회복하고자 한다.

27년 만에 진주에 다녀오면서
소소한 모임을 짓고 키워가는 분들을 만났다.
창업, 학습, 독서, 글쓰기 등등으로 엮인
생활과 대화의 자리가
참 좋아보였다.

점수와 평가로 엮이지 않고
일상과 배움으로 엮인 모임을
나 또한 꿈꾼다.

느리고 꾸준하게
유머를 잃지 않고
배움과 성장에 천착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 가고 싶다.

어른들이 읽는 그림책 모임?
영어가 중심이 아닌 영어책 모임?
문해를 깊고 넓게 바라보는 리터러시 북클럽?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영어교육 공부모임?
‘삶을 위한 영어공부’ 실천 모임?

아니 꼭 내가 모임을 만들 필요는 없지.
그냥 좋은 모임에 슥 끼어들어도 좋겠다.
가만히 배우고 조용히 사라지는 기쁨을
오랜만에 경험하고 싶기도 하다.

긴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다.
그저 닥치는 일들을 해낼 뿐이다.

멀리 내다보기엔
남들처럼 빼어난 눈을 가지지 못했다.
최선을 다하기에는
지금 있는 일만으로도 손발이 너무 바쁘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황지우 시인의 말에서
세계의 길과
인생길의 차이를 배운다.

도로는 닦고 다니는 것이지만
삶은 내딛는 족족 길이 되는 것.

그렇다고 대로를 꿈꾸진 않는다.
나같은 범인에겐
곧 지워질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일테니.

리터러시와 진짜 세계

리터러시는 텍스트를 잘 읽는 능력에서 그치지 않고, 텍스트’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는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 “요점이 뭐야?(What’s the point?)”보다는 “입장이 뭐야?(What’s your position?)”에 답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까운 것이다.

리터러시는 개별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들로 구성된 컨텍스트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텍스트가 쏟아지는 시대라면 신뢰할만한 텍스트들을 선별하여 컨텍스트를 구축하는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원리가 도출된다.

1. ‘구독한 세계’는 내 취향 안에 갇혀 있다.
2. ‘친구의 세계’는 소셜미디어의 알고리듬에 의해 큐레이션된 세계이다.
3. 결론적으로 ‘진짜 세계’는 타임라인 바깥에 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텍스트와 인식론(Text and Epistemology) – William Frawley의 논의를 기반으로 (2) 

2) Predoxa-Doxa-Paradoxa

두 번째로는 텍스트성이 지식 체계에 있어서의 교전 doctrine/doxa 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의를 보자. 비텍스트성 non-textuality 을 근간으로 하는 구술문화에서는 지식 체계에서의 교전 혹은 정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지식에서 교전을 갖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텍스트의 존재를 상정하기 때문인데, 구술 문화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규모 커뮤니티 단위에서 권위를 가진 몇몇 사람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지식에 기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가지는 권위와 텍스트로 존재하는 기준이나 원칙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텍스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전과 법전일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개인의 의견/행동/말의 일관성은 텍스트적 일관성과는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텍스트 자체는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텍스트성이 중요해지는 문화에서는 텍스트간의 관계, 그 위계의 중요성이 커진다. 다시 말해, 텍스트성은 아이디어 상호간의 위계질서를 필요로 하며, 지식은 많은 경험들의 수평적 연결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묶는 논리 logic 에 기반한다. 이것은 여러 지식 체계를 관통하는 교전 doxa 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다. 지식생산의 성공 여부는 이러한 논리 logic 에 근거하여 기존의 지식을 얼마나 잘 조직하느냐에 달려 있다.

위의 분석과 관련하여 Frawley는 월터 옹의 고대 텍스트 분석의 예를 제시한다, 옹에 의하면 구술문화는 정보의 전달을 등위 접속사에 의존한다. (옹은 이를 ‘등위접속사의 승리’라고 부른다.) 즉, 구술문화에서는 정보의 전달에 있어서 그리고/그러나/그렇지만/그런데 등의 역할이 매우 크다. 하지만 텍스트가 축적된 문자문화에 들어서면 종속접속사 (영어에서 while / before / until 등) 등이 더욱 자주 나타나게 된다. “텍스트에 기대어 이야기하기”가 매우 중요한 소통의 모드가 되면서 이런 경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술이 일련의 사건을 등위접속사 위주로 전개한다면 텍스트 특히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텍스트는 문장간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논리적 힘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호텍스트적 하이퍼리터러시의 시대에는 해석의 기준이 되는 ‘하나의 원칙’이 사라진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궁극의 레퍼런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특정 지식은 더이상 교전 doxa 이 될 수 없으며, 여러 텍스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거대담론은 사라지고 특정 컨텍스트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의 기능/권력만이 존재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개개인의 숫자, 아니 그 개개인의 상황과 기분과 관점의 수만큼이 많아진다.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가 상정하는 담론의 세계가 바로 이런 모습일 수 있을 것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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