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지켜보기

가슴 졸이며 보고 있는 말 몇 가지

1. 국뽕

“국뽕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국뽕이 차오른다” 등

‘국뽕’이 부정적 뉘앙스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사용되는 경우들이 꽤 많음.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한 사람에게서도 종종 발견됨.

2. 지키다

“OOO을 지킵시다”
“우리가 지킵시다” 등.

정치인을 ‘지킨다’는 표현이 자주 보임.
이 ‘지킨다’라는 말은 거대한 프레임(frame) 안에 위치하는 듯함.
지키는 주체로 ‘우리’가 호명됨. ‘우리/그들’ 이분법이 함께 작동하는 듯함.

3.입을 털다, 씨부리다

“함부로/되는대로 입을 털어서”
“뭐라고 씨부리노” 등.

상대의 말을 지칭하면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음.
상대의 말이 가진 약점을 비판하려고 할 때 이런 말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효과적일지 모르겠음.

4. 종족

상대를 ‘종족’으로 지칭하는 방식.
언어상에 나타난 인종주의적 편향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
종족문제가 아닌데 종족으로 지칭하는 것 자체가 문제.
나아가 종족이 다르면 마구 타자화하고 일반화해도 좋다는 생각은 더 큰 문제.

가면 갈수록 특정 이슈를 둘러싼 소통은 힘들어지지 않나 싶음. 이슈가 터지는 즉시 ‘피아구분’이 ‘논점’과 ‘대안’과 ‘협상’ 등을 집어삼켜버리는 듯함. 피아구분은 거의 매번 타자화(othering)로 이어짐.

리터러시 책 준비하면서 공저자 선생님과 함께 가장 크게 우려했던 부분은 “타자에 가 닿는 소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나 또한 예외는 아님.

단단한 영어공부, 동료를 만나다

추석 연휴, 몇해 전 저의 수업을 듣고 졸업한 학생으로부터 감격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OO이에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추석이 되어서 저의 근황을 알려드리려고 해요~!! 너무 TMI 인가요?? ㅎㅎ 교수님 책을 읽고 제 교육 가치관의 큰 변화가 찾아왔어요. 예전에는 사교육시장에서 원하는 선생님이었다면 지금은 많이 제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들이 행복 해질 수 있는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지난번에 제가 엄하게 아이들을 잡는다고 하고 이 책을 읽으니 많이 부끄러웠어요. 저만의 교육 철학을 세우지 않고 사육교에 이리저리 휘둘리긴만 한 것 같아요. 그 때는 이 교육방식이 교육이라는 것에 반하는 내용인지도 몰랐어요.”

“이제는 저의 욕심만 앞서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언어를 배움으로써 느끼는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기다리고, 함께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러고 나니 아이들과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어요~”

“학교는 졸업했지만 이렇게 교수님의 책으로 아직도 배움을 하는 중이랍니다~ 좋은 책으로 저에게 좋은 교육철학을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대원 동기들에게도 이 책 많이 추천했어요!! 아! 영어논문 찾던중에 유튜브에서 교수님의 영어논문 쓰는법 강의를 보고 너무 반가웠어요~ 교수님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고 나중에 OOOO와 한번 더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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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해진 마음으로 그가 전해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제 책을 읽고 배웠다고 하지만 사실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언젠가는 저의 ‘제자’였지만 이제는 함께 배움을 바꾸어가는 동료가 되었음에 기뻐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더 나은 영어공부를 만들어 갈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영어가 아니라 가르고 줄 세우는 영어, 철저히 사고파는 물건이 되어 버린 영어의 시대. 우리 사회에서 또 우리 안에서 영어가 휘두르는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영어를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영어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혼자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함께해야 하는 일입니다.” (단단한 영어공부, 254쪽)

단단한 영어공부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대단할 것 없지만 삶에 깊이 뿌리박은 우리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공부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힘겨워 주저앉을 때마다 이렇게 힘을 주는 이들이 있어 계속 걸어갈 수 있네요. 그저 고마운 마음입니다.

#단단한영어공부
#삶을위한영어공부

삶과 실적

Posted by on Sep 15,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Academic people don’t have biographies; they have careers.” – Pierre Bourdieu

추석 연휴를 지나며 부르디외를 띄엄띄엄 소리내어 읽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에겐 배울 것이 많다. 하지만 “학계의 사람들은 전기는 없고 커리어만 있다”는 그의 말은 꽤나 슬프다.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이 말을 받아들일까? 인생을 갈아넣어 커리어를 만드는 일을 줄이는 게 인문사회과학을 하는 이유 중 하나일텐데, 그들의 삶은 종종 커리어’만’으로 기억되는 듯하다. 삶과 실적 사이의 모순을 견뎌내는 것이 학자의 능력으로 판단되는 일이 점점 줄어들기를 빈다. 언제나 그렇듯 순진하게, 바보같이.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의미생산을 돕는 Guided Writing

대부분의 Guided writing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철저히 문법과 어휘를 기반으로 유도된다는 점이다. 문제는 ‘의미의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Although…. willl…을 활용하여 너의 의지를 기술하라.

Although I cannot change the entire system, I will try to change the atmosphere of each community in which I belong.

Although I cannot forgive his fault, I will try to understand his character without prejudice.

또 다른 예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겠다.

2. If 가정법을 활용하여 당신이 공감하고 싶은 대상에 대하여 기술하오.

3. prefer A to B를 활용하여 오늘 일과 중에서 바꾸고 싶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시오.

4. <동명사 is 동명사> 구문(예 Seeing is believing.)을 활용하여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개의 활동을 기술하시오.

5. not so much A as B 구문을 활용하여 사람들은 A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B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시오.

이와 같은 안내는 단순히 특정 구조와 어휘를 활용한 문장 만들기를 넘어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의미에 집중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바람직한 guided writing은 어휘문법적 활용 뿐 아니라 의미생산을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삶을위한영작문 #단단한영어공부

부르디외 vs. 촘스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핵심적 특징이 ‘생성적(generative)’이라는 데 있다고 말하면서 촘스키의 심층구조(deep structure)와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심층구조가 다양한 조작을 거쳐 여러 표층구조로 실현될 수 있듯이 아비투스가 사회 구조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자체가 다양한 행위를 생성할 잠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부르디외는 이상적 원어민 화자(idealized native speaker)를 상정하는 촘스키의 언어관을 “언어 공산주의(communisme linguistique)의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완벽하게 평등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건만 촘스키와 같이 모든 화자들이 동일한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을 가진 사회를 상정하는 것은 언어학에서 현실을 탈각하고 이상의 세계에 가두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언어인류학자나 비판사회언어학자들의 촘스키 비판과 맥을 같이한다.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하면서 현실사회의 동학을 다루었던 사회학자 부르디외에게 있어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장(fields)에서 서로 다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을 가진 개개인이 소통하는 상황에 ‘이상화된 원어민 화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몸이 또 다른 몸에게 말하는 동안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보편문법의 소유자’는 백그라운드 인지 프로세스로 상정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구체적인 사회학적 분석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밝히는 학문적 작업의 해심

“핵심은 제 작업의 아이디어가 아이디어(ideas)로 개념화되기 보다는 방법(method)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제 작업의 중핵은 사고의 방법, 일종의 사고방식에 있습니다. 좀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저의 방법은 그저 아이디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자신의 학문적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부르디외의 대답:

Cheleen Mahar: CM What would you consider to be the core ideas around which your work has been written?

Pierre Bourdieu: The main thing is that they are not to be conceptualised so much as ideas, on that level, but as a method. The core of my work lies in the method and a way of thinking. To be more precise, my method is a manner of asking questions rather than just ideas. This, I think is a critical point.

영어논문읽기 강연

<지리학에서 영어논문읽기, 어떻게 할 것인가> (19.9.9.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논문읽기 방법론을 주제로 경희대학교 지리학과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기존에 해오던 “영어로 논문쓰기: 읽기쓰기 통합전략을 중심으로”의 뼈대를 기초로 읽기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영어논문읽기를 ‘영어+논문+읽기’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각각을 설명하되 응용언어학의 장르분석(genre analysis)을 적용해 보았습니다. 열 두 시간 짜리 강의를 한 시간 남짓에 담아내려니 디테일은 좀 떨어진 듯하지만 명민한 학생들이 빈틈을 메워주리라 생각합니다. ^^

#영어로논문쓰기
#영어로논문읽기

동반자로서의 텍스트

Posted by on Sep 13,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부르디외는 이전 학자들의 텍스트를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companion)”로 여겼다고 한다. 돌아보면 공부를 하면서 가장 벅찼던 경험은 텍스트가 ‘자료’나 ‘지식’에서 ‘동료’이자 ‘친구’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공적인 권력 획득으로서의 글읽기가 사적인 관계맺기로 변화할 때 글의 힘은 더욱 깊고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과시를 위해 읽는 사람들은 동전 모으듯 문구를 모아대지만 성장을 위해 읽는 이들은 삶과 글을 엮어 텍스트를 촘촘히 직조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원어민의 몇 퍼센트까지 가능해요?

“제가 나이가 정말 많거든요. 40대 중반인데 지금 시작해서 영어를 열심히 하면 원어민의 몇 퍼센트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요? 해외에서 거주하게 될 가능성도 있어서요.”

“(속으로 ’40대 중반이시면 나이가 정말 많으신 건 아닌데’를 되뇌이며) 음… 솔직히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 거 같은데요. 몇 퍼센트라고 이야기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어떤 운동을 시작해서 그 분야 운동선수의 몇 퍼센트 정도의 기량에 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게 도움이 될까요?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 즐기면 되는 거 아닐까요? 운동을 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요?”

한빛도서관 세 번째 강의를 끝내고 나오려는데 한 어머니께서 영어공부의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아이는 이제 7세인데 몇년 간의 영어공부 끝에 이젠 자신보다 나은 것 같다고, 적어도 말하기와 발음에 있어서는 딸아이가 자신을 추월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근심섞인 표정으로 ‘원어민의 몇 퍼센트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의 대답은 위와 같았다.

얼마 전 메이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이들이 영어공부의 종착점, 최종 목적지를 상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네이티브’를 최종 타겟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공부에서 좋은 모델을 만나 그를 본받으려 애쓰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부의 본령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가꾸고 성장시키며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정체불명의 네이티브와 비교하며 자신의 실력에 좌절하기 보다는 하루하루 재미난 일들을 찾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몇 퍼센트까지 갈 수 있느냐가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닐까.

#삶을위한영어공부 #단단한영어공부

정치인의 사과

“~라면 유감이다.”
“~로 보였다면 유감이다.”
“~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면 유감이다.”

정치인이 ‘사과’할 때 주로 쓰는 언어 패턴이다.

이들 구절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라면’이라는 부분이 늘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라면’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라면’은 사실의 영역이 아닌 가정의 영역을 나타낸다.

“~해서”가 아니라,
“~라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에 들어가는 내용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라면’은
자신의 해석과 대중의 해석이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쳇말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느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느끼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사실을 가정과 섞고,
팩트의 묵직함을 해석의 차이로 뭉갠다.

무엇보다 이러한 진술은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생산된다.

‘당신은 사실로 생각하지만 나에겐 아니다.’
‘당신은 그렇게 해석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유감표명은
상대의 입장에 서지 않는 언술행위다.

저 말 속에서
정치인과 대중은
‘평행우주’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과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아닌가.

“~이 벌어진 데 대해 깊이 반성한다.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었다.”

“~라고 느끼게 만든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모두 저의 불찰이다.”

이렇게 말하며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모습은
왜 그리 찾아보기 힘든가.

종종 그들은
유감을 표명하되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머리숙여 사죄’한다면서
머리도 숙이지 않고 죄과도 돌아보지 않는 듯하다.

명예에 잔기스 하나,
마음의 작은 상처 하나
감당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큰소리친다.

그런 ‘유감’들이
심히 유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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