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SA의 문해력, 실질적 문해력

최근 다양한 매체에서 리터러시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표준화된 리터러시 개념으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자료 중 하나는 PISA의 읽기능력 평가 결과인데요. 읽기를 포함한 OECD의 PISA 평가는 크게 다섯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참고로 PISA는 OECD 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의 약자입니다.)

(1) 읽기 리터러시
(2) 수학 리터러시
(3) 과학 리터러시
(4) 문제해결능력
(5) 협력적 문제해결

PISA에 따르면 읽기 리터러시(통계나 수학, 기타 영역의 리터러시와 구별되는 읽기영역에서의 리터러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주어진 목표를 성취하고, 지식과 잠재력을 성장시키며, 사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록된 텍스트를 이해하고 사용하며 그에 대해 숙고하고 텍스트를 가지고 상호작용하는 행위.”

이와 같은 정의는 일상의 읽기 활동에 관여하는 과정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읽기 평가에 있어 핵심을 이루는 구인(construct)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PISA와 PISA-D 테스트는 읽기를 평가함에 있어 크게 세 가지 축을 상정합니다.

(1) 텍스트 (2) 상황 (3) (읽기) 과정 (혹은 양상)

즉 쓰여진 글, 그 글이 등장하고 논의되는 상황, 그리고 글을 읽어내는 데 관여하는 과정이 중요시된다는 것이죠.

PISA-D( PISA for Development)는 이중에서도 특히 과정(process)에 방점을 두는데요. 크게 다섯 가지 과정이 상정됩니다.

(1)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해(literal comprehension)
(2) 정보 추출(retrieving information)
(3) 전반적인 이해의 형성(forming a broad understanding)
(4) 해석해 내기 (developing an interpretation)
(5)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숙고와 평가(reflecting on and evaluating the content of a text)

즉 어떤 사람이 텍스트를 잘 이해했는지 보려면 텍스트를 이루는 기본 단어와 문장을 정확히 이해하는가, 해당 문서에서 적절한 정보를 선별해 낼 수 있는가,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진술할 수 있는가, 특정한 관점에서 해당 텍스트를 해석해 낼 수 있는가, 텍스트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가를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평가하기 위해 여러 포맷의 텍스트를 활용하는데요. 에세이나 신문기사 등 연결된 텍스트는 물론 정보를 담은 표나 일정표 등의 텍스트도 활용합니다. 아울러 개인적, 공적 영역의 텍스트, 교육기관이나 직장에서 사용되는 텍스트를 두루 활용하지요.

그런데 저는 PISA 등의 표준화 평가에서 말하는 ‘읽기능력’ 혹은 ‘독해력’이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이야기되는 ‘문해력’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 맥락을 고려한다고는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읽기능력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특정한 텍스트와 맺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요구되는 읽기능력은 단순히 텍스트와 개별 독자간의 관계만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텍스트의 내용 뿐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여기에 이 텍스트가 쓰여진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를 소화하는 능력으로서의 읽기 리터러시는 실제 상황의 반쪽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독해능력이나 쓰기능력을 평가하는 도구는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복잡다단한 맥락과 관계를 온전히 포괄하지는 못하죠. 그렇기에 우리는 텍스트를 완벽히 해석하는 데 필요한 리터러시를 논의함과 동시에 관계와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리터러시를 논의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삶을 위한 리터러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평가를 넘어서

Posted by on Oct 29,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평가가 없으면 누가 공부를 하겠냐’는 말은 평가 없이 공부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 아닌가 싶다. 평가가 무용하다는 것이 아니다. 평가는 결국 ‘평가 없음’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영화에서 저 영화로, 이 웹툰에서 저 웹툰으로, 이 지도에서 저 지역으로, 이 음악에서 저 미술작품으로 횡단하는 끝없는 배움의 여정에 줄세우는 평가는 초대되지 않는다. ‘어떻게 평가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보다 더 간절하다. 평가를 넘어서는 상상력 하에 평가체제가 구축될 수는 없는 걸까. 바보같이 묻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리듬 앤 플로우

음악도 잘 모르고
힙합은 더 모르지만
지난 한 주 <Rhythm + Flow> 덕에 행복했다.

오디션 경연 포맷을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엄청난 압력을 견뎌내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 이들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욕설이나 비하, 성적인 묘사들에 대해
그리 익숙하지 않다.
‘정치적 올바름’에 다소 경도된
고리타분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열 편의 에피소드는
“다른 문화를 엿보는” 경험으로 생각하고
최대한 즐겁게 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한 귀퉁이를 접고 보니
즐거운 순간이 많았다.

기획과 편집의 힘이겠지만
이번 경연에 참가한 아티스트들은
대개 불우한 형편에서 자랐다.
약물중독으로 가족을 잃거나
범죄로 인해 감옥에 갇힌 가족을 봐야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와중에
그들을 지켜준 것이
음악과 가족, 그리고 때로 신앙이었다.
빈곤과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음악을 택했던 것이다.

응축된 고통이
벌건 마그마처럼
리듬과 가사로 요동칠 때
나 또한 흔들리고 흐느꼈다.

언어교육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 연기나 랩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게
종종 아쉽다.

삶과 말을 재료로
혼과 리듬을 엮어내는 일,
대사를 매개로
타인의 몸과 마음을 상상하는 일의 아름다움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아, 그리고 사소한 즐거움 하나.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초반 30인의 경연자 중 우승자로 점친 사람이
진짜 우승을 했다.
업계 최고수들의 생각과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
소소한 기쁨을 선사했다.

음악이 있어 다행이고
음악하는 사람들이 축복이고
음악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내 삶의 리듬과 플로우를 찾아
하루 하루를 지어(compose)가야겠다.

 

Let’s make the rhythm flow, yo.

말과 침묵, 그리고 겨울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세상. 말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의 ‘침묵’은 더욱 깊어진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성량 조절에 힘쓸 뿐, 자신이 목소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논쟁으로 문제를 풀려는 무리들은 서로의 말 속에서 허우적대며 강요된 침묵에 침묵한다. 침묵의 소리를 듣는 신중한 이들은 고개를 떨구고 발걸음을 돌린다. 슬픔은 내려안고 바람은 어두워진다. 말이 얼어붙는 사이 침묵은 포효한다. 밤은 오래 깨어 묵묵히 상처를 벼린다.

다시, 눈빛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단단한 영어공부, 4쇄 발행

Posted by on Oct 25, 2019 in 단상, 삶을위한영어공부, 일상 | No Comments

전국영어교사모임 자율연수에서 <삶을 위한 문법과 어휘교수>를 주제로 강의를 마치고 왔더니 문간에 반가운 택배가 와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봉투를 엽니다.

오늘로 4쇄를 찍은 <단단한 영어공부>가 들어 있습니다. 책이 나온 3월이 엊그제같은데 시간이 참 빠릅니다. 고마운 분들의 얼굴이 휙휙 스쳐갑니다. 멍하니 허공에 머무는 눈길을 그냥 둡니다.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무엇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위한 영어공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뻐기고 구획하며 줄세우는 영어가 아니라 소통하고 성찰하며 연대하는 영어를 만들어 가기 위해 함께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단단한영어공부 #4쇄 #유유출판사 #삶을위한영어공부

일상 스케치

Posted by on Oct 21,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 No Comments

이번 학기 나름 여유롭게 산다. 종종 늦잠도 자고 멍도 때린다. 지난 주부터는 건반에도 조금씩 손을 대고 있다. 그래봐야 적극적으로 게으름을 피울 정도는 아니지만 강의가 줄어드니 확실히 덜 쫓기는 것 같다. 회사생활과 박사과정을 포함해서 20년 만에 가장 덜 분주한 시절이다. 새로운 과목 예닐곱 개를 가르치던 게 과연 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그렇게는 못할 거 같다.

일이 엄청나게 준 것은 아니다. 강의는 반토막났지만 생계형 외부 강의가 늘었고 새로운 책도 준비하고 있다. (무려 세 분이 ‘이거 아니냐’며 물어오셨는데, <지극히 주관적인 어휘집>은 아닙니다. 책으로 내기에는 아직 그저 잡다구리한 생각들이죠.) 곰곰 생각해 보니 학기말에 누군가를 평가해서 줄을 세워야 하는 부담이 반으로 줄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대학에서 무조건 상대평가를 강제하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취업을 위해서는 더욱 열심히 논문을 써야 하지만 마음이 좀처럼 동하지 않는다. 대학에 대한 애증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뒤덮는 절망이 스물스물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는 아니지만 “쓰지 않으면 죽는다(publish or perish)” 마인드를 탑재할 수는 없는 상황이랄까. 엉거주춤한 자세로 몇 년을 살다보니 나름 이 자세가 편해졌나 보다. 의미 찾다가 굶을 것도 같은데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다.

주말에 사려깊은 학생 둘이 찾아왔다. 냉면을 먹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저릿했다. ‘이 친구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뭔가를 가르친다고 설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쳐간 학생들이 꽤나 많아졌다. 가르칠수록 부끄러운 일들이 많아진다. 지식을 전수한다며 무지를 방관하는 세월이 쌓여간다. 아는 척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길을 잃고 낙심한 나를 일으켜 준 건 언제나 학생들이었다. 고맙고 미안하고 자랑스럽다. 내내 평안하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더 열심히 싸울 수 있기를. 함께 나눈 이야기가 어두운 시절을 밝히는 작은 빛이 될 수 있기를. 무엇보다 강건하기를.

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3: 환유(Metonymy)의 세계 (1)

아래 세 문장을 살펴 봅시다.

a. “버스 파업중이야. 지하철 타고 가.“
b. “빨간 모자 너무 시끄럽다. 가서 한마디 할까?“
c. “손이 모자라서 시간이 배로 걸릴 듯. 사람 좀 더 뽑아주지.“

일상에서 쉽게 쓰고 또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이 문장들 속에 인간이 세계와 언어를 엮어서 인지하는 방식의 작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a를 봅시다. ‘버스 파업중이야’라고 하지만 실제로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은 버스가 아닙니다. 멀고 먼 훗날 자율주행 버스들이 자신의 권익을 찾기 위해 파업을 벌이는 상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SF 속 이야기고, 실제로 파업을 하는 것은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죠. 하지만 우리는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중이야.’라고 길게 말하기보다는 ‘버스 파업중이야’를 택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 대상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그 대상을 가리키는 데 꼭 필요한 정보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문장의 길이도 상당히 짧아지지요.

다음으로 b를 봅시다. ‘빨간 모자’는 그 자체로 시끄럽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모자라면 소리를 내진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빨간 모자 쓴 사람 너무 시끄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빨간 모자’만 써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c입니다. 여기에서 ‘손’은 단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손’을 말합니다. 따라서 손이 부족하다는 것은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이 됩니다. a나 b와 비교할 때 조금 다른 점은 ‘버스’나 ‘빨간 모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부분이 아님에 비해 ‘손’은 가리키는 대상 즉 일할 사람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입니다. 흥미롭게도 영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short-handed’죠. 일손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종종 쓰이는 표현입니다.

Metonymy의 정의

위의 a-c는 모두 ‘환유’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현상의 예시입니다. 인지언어학자들은 환유(metonymy)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합니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준거가 필요한 만큼 Littlemore (2015)의 다음 정의를 차용하도록 하겠습니다.

Metonymy is a figure of language and thought in which one entity is used to refer to, or in cognitive linguistic terms ‘provide access to’, another entity to which it is somehow related. (환유는 언어와 사고의 수사법 중 하나로 한 실체가 관련된 다른 실체를 가리키거나, 인지언어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관련된 다른 실체에 ‘접근지점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환유는 한 언어표현이 특정 대상을 정확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로 연결되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metonymy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라틴어metonymia, 나아가 그리스어 metōnymia에 닿게 되는데, 이것은 “이름을 바꾸기(change of name”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표현에서 ‘빵’은 단순히 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먹거리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를 어원에 빗대어 설명하면 ‘먹거리’가 ‘빵’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죠. 물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이렇게 이름을 바꾸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많은 서구권 국가에서 빵은 주식 중 하나이기에 이런 이름바꾸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환유(metonymy): 몇 가지 예시

그렇다면 이번에는 영어 환유 표현을 몇 개 살펴 보겠습니다.

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펜은 칼보다 강하다.)
e. The White House sees it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백악관은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f. Ireland passed a landmark bill last year. (아일랜드는 작년에 기념비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속담 a에서 ‘the pen’은 필기구가 아니라 문필 즉 글을 쓰는 행위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에 대구가 되는 ‘the sword’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체의 활동을 가리키지요. “The pen”과 “the sword’가 다른 개념으로 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에서 “The White House”는 미국 대통령이 참모와 함께 거주하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를 가리킵니다. 빌딩이 아닌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f에서 “Ireland”는 아일랜드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 의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아일랜드 국가 전체가 아니라 의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예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특정 개념에 접근할 때 종종 해당 개념에 정확히 상응하는 언어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 전반’에 접근하기 위해 ‘펜’을 사용하고, ‘미국 정부’라는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 ‘백악관’이라는 언어를 활용하죠.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간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가 됩니다. 즉 환유는 단순히 언어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구조와 과정을 보여주는 개념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계속)

<참고문헌>
Littlemore, J. (2015). Metonymy: Hidden shortcuts in language, thought and commun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에 관하여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관계를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는 걸 꺼리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있는 글과 메시지의 총량이 분포되는 흐름에 관해서도 더 이상 글을 쓰는 개인의 책임과 깊이 문제로 혐의를 두기를 그쳐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란 건, 더 이상 가능한 관점이 아니다.” (서울비, 2003, <글쓰기 강좌에 대하여> 중에서)

부가 사회경제적 구조를 통해 분배되듯이 글쓰기 능력이라는 문화자본도 사회적, 계급적으로 분배된다. 경제적 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과 글의 생산, 분배, 공유방식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시작하고, 재미를 붙이고, 괜찮은 글을 써내고, 읽을만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글쓰기를 위한 독서를 하고, 때로 출판 기회를 잡고, 그 결과 얼마간의 금전적인 댓가를 얻고, 이 모든 것이 저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한 사람의 재능과 의지로 설명될 수 없다. 다른 문화자본과 마찬가지로 글쓰는 능력은 필자의 성장환경, 물적 토대, 그가 속한 공동체, 사회경제적 구조, 그리고 다양한 교육기회의 영향으로 형성된다. 글쓰기를 개개인의 ‘노오오오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방어하기 힘든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서울비님이 말하듯 “좋은 글을 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은 지탱될 수 없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이 필요하듯, 저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회가 ‘동원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글 못쓰는 한 사람”이라는 관점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순전한 노력으로 일구어낸 ‘필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글 잘쓰는 사람’에 대한 칭송은 ‘글 못쓰는 사람’에 대한 폄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기계적인 능력주의(meritocracy)를 경계한다면 글쓰기 기예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은 거두어 들이는 것이 옳다. 글은 한 천재의 생산물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의 부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지적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개개인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만약 “창의적인 한 사람”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될성 부른 나무’에 사회적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시쳇말로 “몰빵”을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스티브 잡스도 나오고 빌 게이츠도 나오는 것 아닌가? 노벨상도 막 타고 그러는 것 아닌가?

하지만 “창의적인 한 사람”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발현되는 창의성의 네트워크”라는 관점을 채택한다면, 창의적인 팀, 창의적인 학교, 창의적인 회사, 창의적인 사회를 그릴 수밖에 없다. 개별 노드의 특성이 아닌 링크의 효과로서 창의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몰빵”은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기 보다는, 필요한 자본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어 사회문화적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리터러시 이론의 흐름 또한 이러한 관점을 반영한다. 글쓰기 과정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Flower와 Hayes는 글쓰기의 과정을 인지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들의 연구는 글쓰기 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적인 툴킷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지만, 글쓰기라는 행위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교육적, 이데올로기적 힘을 간과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이들이 제시한 글쓰기에서의 인지모형은 사회적 영향을 반영하는 쪽으로 수정, 발전된다. Street 등을 위시한 학자들은 ‘신리터러시연구(New Literacy Studies)’의 흐름을 주도하며 리터러시의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맥락(context)에 주목한다. 글쓰기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연구하려는 인지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며 글쓰기의 상황성(situatedness)에 주목하는 연구를 펼친 것이다. 아울러 1990년대 초 Swales를 중심으로 발전된 장르 이론 또한 글쓰기를 하나의 사회적 관행(social practice)으로 파악하면서 텍스트의 사회적 뿌리를 강조한다.

누가 좋은 글을 쓰는가? 노력하는 개인이 훌륭한 저자가 되고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인가? 결과물만 놓고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출판계까지 갈 것도 없이 페이스북만 봐도 글 잘쓰는 분들이 넘쳐나지 않나.

하지만 우리는 빙산의 끝자락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글을 써낼 수 있다’는 구호는 ‘읽고 쓰고는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라고 속삭인다. 이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할 리터러시 발달에 대한 책무를 개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나는 논문에 들어간 감사의 말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여전히 이 말을 믿는다.

I typed the dissertation. But we wrote it. (저는 논문을 타이핑했어요. 하지만 쓴 건 나 혼자가 아닌 우리였죠.)

#삶을위한리터러시

‘속도의 리터러시’ 단상

1.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슈가 계속해서 터질 때에는 일상과는 다른 리터러시 활동이 벌어진다.

2. 이슈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뉴스와 분석이 실시간으로 쏟아진다.

3. 관련된 글을 모두 읽어낼 사람은 없다. 단연코 없다.

4. 사람들은 종종 상황을 면밀히 이해하고 견실한 판단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읽는다기 보다는 ‘탈출하기 위해’ 읽는다. 탈출에는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다.

(1) 기존에 갖고 있던 확신을 설득력있게 채워주는 글을 만나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2) 해당 사안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 답해주는 글을 만나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3) 자기가 팔로우하고 있는 ‘논객’이 정리된 글을 올리면 해당 이슈 읽기에서 탈출한다.

(4) 뉴스를 읽을 시간이 없는 경우, 기존의 관점과 신념을 가지고 뉴스의 공백을 채운다. 그 결과 팩트가 들어갈 곳에 믿음이 자리를 잡기도 한다.

5. 이 상황에서 몇몇의 ‘논객’은 다른 사람에 비해 좀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이를 정리한 글을 올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면들을 검토했느냐 보다는 자신이 갖고 있는 관점에 맞는 (혹은 자신을 팔로우하고 있는 독자군의 지향에 맞는) 내러티브를 만족스럽게 구성했는가다. 방대한 정보를 엮어 거의 실시간으로 글을 써내기 위해서 어느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하다.

6. 숨가쁘게 터져나오는 속보와 반격, 성명과 수사결과, 논평과 논쟁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전체의 의미를 구성(construct)하기 보다는 의혹과 의심의 미로에서 탈출(escape)한다.

7. 정보와 뉴스의 생산과 유통이 가속화되는 시대, 사람들은 분명 이전보다 더 자주 ‘1차자료’를 접한다. 그러한 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리터러시 역량은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8. 하지만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하며 끊임없이 탈출할 수밖에 없는 숙명에 놓인다. 때로는 그런 쫓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슈 따라가기를 멈추기도 한다.

9.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시대,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을 잃는다. 물론 성실한 읽기로 가공할 속도를 버텨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종종 미로에서 겨우겨우 탈출하고 있으면서 세계를 다 파악한 듯 말하는 이들이 두렵다.

10. 누군가는 미로를 좀더 면밀히 탐색하여 지도를 만들자고 외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미 미로를 빠져나갔다.

11. 느리고 모자란 나는 숨이 가쁘다.

 

#삶을위한리터러시

금요일 오후 세 시

Posted by on Oct 12,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금요일 오후 수업은 등산같다. 오기는 싫은데 막상 오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문제는 대개의 학생들이 한 주의 피곤을 잔뜩 짊어지고 온다는 것.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해도 ‘어이, 이거 빨리 끝내고 불금으로 넘어갑시다!’라는 표정을 지울 수는 없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 “친구들아. 불금은 선생에게도 소중하단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달프거든. 그러니 조금만 더 집중해서 공부를 해볼까?” 그래도 가르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나에게 주어진 날들을 맑고 밝게 만들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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