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황’을 보다

Posted by on Dec 28, 2019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박사과정 첫 학기를 마치고서였다. 기말 과제를 하느라 쪽잠으로 버틴 지 며칠. 지치고 힘든 마음을 가볍게 만들 영화를 찾다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골랐다. 황정민, 임수정 주연의 <행복>. 결과는 처참했다. 행복해지긴 커녕 새벽에 보고 센치와 비참 수치가 100이 되어서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그따위로 제목을 지었는지.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선택(?)이었다.

오늘 학기를 마쳤다. 가르치는 이들은 수업을 애정하지만 방학을 사랑한다. 학생들이 최고로 치는 명강의도 휴강을 이기지 못하듯 말이다. 그래서 고른 영화가 <두 교황>. 진짜 두 교황에 대한 이야기이고, 실제 사건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교황이 아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해성사를 뛰어넘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위인’의 업적이 아닌 변화와 타협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영성의 씨줄에 인간성의 날줄을 엮어 삶과 신앙의 경계를 없앤다.

다시 볼 거라고 확신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이 영화는 꼭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나단 프라이스와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에 감탄했고, 두 캐릭터의 상반된 성격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구성에 뭉클했다. 초반에 터진 눈물이 끝까지 멈추질 않아서 조금 힘들긴 했지만 <행복>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졌다.

신앙이 있건 없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의미생산의 주체 키우기

약 10년 전.
학술 영작문을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이런 활동을 했다.

“이 디지털 카메라로
이곳을 이렇게 또 저렇게 찍어볼게요.
같은 세계라도
다른 각도, 거리를 확보하니
다른 빛깔, 다른 느낌의 사진이 되죠.
물론 여기에서
카메라 모드를 바꿀 수도 있어요.
자동으로 할 수도 있지만
셔터스피드 우선 모드,
노출 우선 모드,
풀 매뉴얼 모드 등을 사용할 수 있죠.

언어는 어떨까요?
한 가지 사건을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이 사진을 보세요.
여러분을 찍은 건 아니지만
어제 밤 피아노를 치던 자기 자신이라고
상상해 보죠.
이걸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까요?
어떤 어휘와 어떤 문법을 동원해서
의미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사진을 통해 세계를 포착하는 일과
언어를 통해 세상을 표현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를까요?

사진을 찍을 때는
어떤 것들을 조절해서
어떤 효과를 얻어낼까요?
글을 쓴다면
어떤 요소들을 조정해서
어떤 의미를 빚어낼까요?
그건 사람들에게
어떤 감각과 생각을 안겨줄까요?

사진과 언어만은 아니죠.
음악도, 미술도, 건축도, 안무도
다양한 요소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체험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를 만드는 주체로서
어떤 역량을 갖추어야 할까요?

여러분에게는 이미
의미를 만들어 내는 기예가 있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죠.
그것을 더 갈고 닦아서
쓸모있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지요.

글쓰기 수업이지만
이번 주에는 이렇게
‘의미생산자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한 문법과 어휘에 대한 걱정은
조금 접어놓고 말이죠.”

돌아보면
초기의 수업에서
더 과감한 시도들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은
‘리터러시’라고 묶을 수 있는
광의의 문해력을 키우는 데
디딤돌이 되는 활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끔은 나 자신이
‘영어선생’으로 규정되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물론 영어를 중심으로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가르치지만
결국 추구해야 할 것은
다양한 미디어를 소화하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의미-디자이너(the designer of meaning) 나아가,
의미생산 주체(the meaning-making subject)가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니 말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인풋의 양이 아니다. 경험의 깊이다.

영어학습의 초특급 키워드 ‘인풋’. <단단한 영어공부>에서도 여러차례 언급했지만 ‘무조건 많은 인풋’이 능사는 아니다. 최근에 학부모들을 만나면서 반복하는 메시지는 ‘인풋의 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영어를 좋아할 수 있는 계기, 언어의 숲으로 ‘빨려들어가게’ 하는 실마리를 찾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계기가 영어의 발음일 수 있다. 단어의 발음이 예뻐서, 누군가의 억양이 매력적이어서 영어가 좋아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영화의 배역(e.g. 해리포터)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좋아하는 유튜버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노래나 챈트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림책의 내용일 수 있다. 미국 미드웨스트 지역의 백인 중산층 영어가 아니라 맨체스터의 노동자들의 ‘투박한’ 발음에 끌릴 수도 있다. 심지어 속어와 욕설이 영어로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간의 영어학습 담론에서는 ‘양(quantity)’이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내용과 방법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노출되느냐였다. 이렇게 ‘무조건 많이’로 대표되는 인풋 담론은 개개인의 영어에 대한 욕망(desire)를 간과했다. 인지적인 측면들을 과하게 강조하면서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면, 지각에 관련된(perceptual) 특성들을 무시한 것이다.

우리는 외국어를 배우면서 그 언어의 정보를 처리(process)하지만, 그와 함께 특정한 소리나 단어에 애착을 갖고, 누군가의 발음에 매료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변화시킨다. 언어학습은 지식암기가 아닌 전인적 발달과 변화과정이다.

물론 현장의 영어교수 또한 변하고 있다. 학습자들의 감정과 정체성을 고려하는 시도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문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차가운 머리를 갖고 언어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과 소통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켜 간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학습에서 정서와 지각, 정체성과 욕망의 문제는 주변이 아닌 중심에 놓여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풋의 양이 아니라 경험의 깊이인 것이다.

영상 vs 텍스트: 지식생산의 관점에서

영상은 영상대로, 텍스트는 텍스트대로 강점과 약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수준을 염두에 두었을 때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함에 있어 텍스트가 여전히 우위를 점하는 대표적 영역 세 가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추상성
‘부재와 존재’를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 표현했다고 하자. 텍스트가 지닌 추상성을 영상이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추상적 개념을 층층이 쌓아올린 구조를 영상으로 구축할 수 있을까?

2. 경제성/생산단가
화장실에 앉아서 텍스트를 통해 생산할 수 있는 세계를 영상으로 생산해낼 수 있을까? 웹소설의 생산속도를 영상이나 웹툰이 따라올 수 있을까?

3. 검색과 인용
텍스트 검색 및 인용의 유연함을 영상이 따라올 수 있을까? 다양한 소스를 엮어 하나의 논리적 구조로 만드는 일에 있어 (1) 단어의 연쇄라는 동일 포맷을 유지할 수 있는 텍스트와 (2) 장르, 해상도, 구성, 색감, 음악, 나레이션 등의 요소들이 울퉁불퉁하게 엮일 수밖에 없는 영상이 같은 수준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삶을위한리터러시 에서. :)

#프리뷰모드

공감의 한계에 관하여

Posted by on Dec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공감을 강조하는 담론에 대해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공감이 갖는 본래적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2.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진정한 공감’은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경험이라는 것이 특정한 몸이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특정한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해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3. 이를 하나하나 풀면 이렇다.

(1)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2) 특정 경험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얻는다고 해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3) 특정 사건과 상황을 깊이 이해한다고 해서 당사자가 평생 쌓아온 이해와 해석의 방식을 체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 즉, 우리는 ‘누군가의 처지와 경험’을 상상(imagine)하는 것이지 경험(experience)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언어(상황을 상상해서 나오는 진술)와 상황 내에서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과 경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5. 문법용어를 빌리자면 공감은 기본적으로 가정법(subjunctive mood)이고, 경험은 과거시제이자 현재완료(진행형)이다. 공감하는 이는 If 절을 피할 수 없고, 동사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If I were you, I would … 에서 I는 you가 아니며 ‘were’는 ‘am’이 아니고, ‘would’는 철저히 생각의 세계에 속한다. If절이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다고 해도 가정과 추측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올 수 없는 것이다.

6. 그렇다고 해서 공감을 무조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한계를 온전히 넘어설 수는 없지만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당 개인의 경험을 ‘그 사람 고유의 경험’으로 봄과 동시에 구조적 요인들의 분출로 보는 것이다.

7. 다시 말해 해당 경험을 순수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요인들이 개인을 통해 세상에 뛰쳐나온 것으로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고유한 경험은 보편적 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고, 보편성에 대한 고민에 기반한 실천을 통해 해당 경험과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온전히 공감할 수 없을지라도 그 경험의 기반을 변화시킬 실천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8. 공감의 언어는 과대평가되었다. 더욱 가치있는 일은 연대의 손길이다. 매끄럽고 완벽한 말보다는 말없이 함께 떠날 수 있는 꾸준하고 투박한 발걸음이 소중하다.

9. 결국 공감의 중요성은 응당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히 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와 닮았다.

10. 알 수 없어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 있다. 다 알 수 없다고 해도 함께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함께 궁리하는 가운데 우리 ‘사이’를, 우리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이해하는 척에서 끝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닫힌 이해가 아닌 열린 실천, 이것이 공감이 지향해야 할 바 아닐까.

기말의 ‘폭력’

Posted by on Dec 11,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점을 채워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기말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학교가 신체적/심리적 폭력에 가까운 부담을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수 개개인의 가혹함이나 학생 하나하나의 욕심에서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평가를 위한 시험과 과제의 구조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숨가쁘게 휘몰아치는 일정을 이악물고 헤쳐나가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대학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집요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 이 모습이 정말 최선일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