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꿈

제2언어 리터러시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학술적 글쓰기, 특히 논문쓰기에 관심을 갖고 강의를 열고 있습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대학에서마저 체계적으로 글쓰기를 배울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몇해 전 한 교수님의 도움으로 경영학과 대학원에서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시적으로 열리는 강의여서 2년 만에 폐강이 되었죠. 반응은 나쁘지 않았으나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속할 힘을 잃었던 것입니다.

사실 대학원에서 영어논문쓰기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저와 같은 리터러시 연구자와 해당 분야의 내용전문가가 협업하여 커리큘럼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제가 영어논문쓰기에 대한 개념적 틀을 제공하고 다양한 전략을 나누긴 하지만 개별 학문분야에 속한 학술지나 논문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해당 분야를 꿰뚫고 있는 연구자와의 협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이같은 협업의 토대가 제공되긴 커녕 학술적 글쓰기 수업도 개설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물론 개별 수업에서 글쓰기가 핵심활동으로 자리잡는다면 영어글쓰기를 따로 가르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부, 대학원 과정은 내용의 전달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쓰기를 통해 지식을 심화하고 재조직하는 일은 뒷전입니다. 영어논문쓰기도 엄청나게 강조는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주질 않죠. ‘읽고쓰기 각자도생’이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현실입니다.

몇해 전부터 내용 전문가와의 협업을 통해 탄탄한 글쓰기 수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새로운 강의 개설은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커리큘럼 개발을 위한 시간과 돈이 필요하고 강의개설 및 운영권이 필요합니다. 이들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책임자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없어 대학 외부에서 강의를 열 수밖에 없더군요. 이것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대학의 리터러시 교육 개혁이라는 대의를 생각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느낌입니다.

꼭 영어로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학술장은 과도하게 ‘국제화’ 담론을 퍼뜨려 왔고 영어논문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많은 분야에서 KCI 등재지는 ‘2류 저널’ 취급을 받죠. 자기 존재를 비하하는 현실.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저 또한 제 학술활동의 많은 부분을 한국어로 진행합니다. 대중과의 소통에서는 한국어 글쓰기가 중심이고요. 학문이 사회에 뿌리박고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모국어 리터러시가 탄탄해야 합니다. (한국어 잘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영어 글쓰기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에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우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학교육의 본분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알아서 여기까지 왔으니 너도 혼자 해봐’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의미있는 일들을 해낼 시간과 에너지를 박탈하는 일입니다. 도구를 주고 집을 짓게 해야지, 도구까지 만들어가며 집을 지으라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어제는 한 대학 단과대학 랩의 초청으로 두 시간 <영어로 논문쓰기>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 디렉터이신 교수님이 오셔서 마음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오늘 말씀하신 걸 25년 전에 알았으면 제가 공부하고 논문쓰는 게 정말 달라졌을텐데요. 제가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너무 잘 정리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일 뿐입니다. 대단한 비법이 담겨있지도 않죠. 하지만 간혹 연구자로서의 삶에 진입하는 단계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또 다른 협업을 통해 더 나은 글쓰기 강의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꿈꾸다 보면 언젠간 되겠죠. :)

#영어로논문쓰기 #삶을위한리터러시

내면의 삶에 대한 권리로서의 책읽기

1. 읽기는 내면의 삶(the inner life)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주를 팽창시킨다. 물리적 세계와는 별도로 상상과 기억의 공간을 생성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쓰기를 매개로 공동의 기억(collective memory)이 된다. 심리적 공간이 사회문화적, 담론적 공간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2. 읽기쓰기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는 ‘문자중심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 것이다. 문자는 문자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춤은 춤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세계를 생성하고 연결한다.

3.그럼에도 구텐베르그 은하계 이후 인류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은 압도적으로 문자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내면의 삶과 공동의 기억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어온 일 말이다. 근현대 문명을 모두 긍정할 수는 없으나, 문명의 성장에 있어 문자의 비중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4. 독서교육을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 짓기’라는 관점으로 보는 게 적절하리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지식과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엄청난 양을 습득하지 않아도 내면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갈 수 있다는 말, 넉넉한 영혼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5. 먹고사니즘은 시간을 강탈한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일에 몸은 지쳐간다. 내면의 삶을 가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시대는 크고작은 혁명의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독서가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책을 집어들고 내면의 삶을 키워가는 일을 연례행사로 만드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리는 없다.

내면의 삶에 대한 권리로서의 책읽기를 고민할 때가 아닐까 싶다.

#삶을위한리터러시

[강좌공지] 영어로 논문쓰기 – 읽기쓰기 통합전략을 중심으로

본 강의는 영어논문 작성에 필요한 지식을 <읽기와 쓰기의 통합>의 관점에서 논의합니다. 기존의 다독(多讀)이나 다작(多作) 전략을 넘어, ‘분석적 읽기’, ’쓰기를 위한 읽기’ 방법론을 익히고 적용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일시 및 장소>
일자: 2020년 2월 1일, 8일, 15일, 22일(토요일)
시간: 오전 10:30-1:30 (총 12시간)
장소: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10길 48 동궁빌딩 2층 (망원역 부근, 전국영어교사모임 사무실)

<대상>
(영어) 논문의 세계에 입문하는 대학원생
논문의 전형적 구조와 내용을 정리하고자 하는 연구자
논문지도에 체계를 더하고 싶은 지도교수
영문 아카데믹 라이팅 전반에 관한 이해를 도모하고 싶은 일반인

<강사>
김성우 (응용언어학자. 서울대학교 강사)
제2언어 리터러시 연구자로 석박사과정 학생들의 리터러시 발달과 관련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영어교육과 영어 글쓰기 관련 강좌를 해 왔고 연세대 등에서 논문쓰기 특강을 진행했다. <영어교육을 위한 IT> (공저), <어머니와 나>, <단단한 영어공부> 등을 썼으며 <리터러시와 권력>의 번역을 감수하였고, 현재 <삶을 위한 리터러시 (가제, 공저)>의 출간을 준비중이다.

<수강료>
수강료: 20만원(입금 기준 선착순 마감)
입금계좌: 농협 352-1224-5068-13 (예금주 이경란)

<강의신청 링크>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xBXU0tyqLwUUYcUxq1Cjtieb1yocnMI_IaIv9MMJwal08KQ/viewform

<강의내용>
I. 학술 논문의 개념적 이해 (1강, 3시간)
1. 장르로서의 학술논문
2. 읽기와 쓰기의 관계
3. 학술공동체와 작가로서의 연구자

II. 논문작성을 위한 기초체력 기르기 (1강, 3시간)
1. 콜로케이션과 메타포 공략하기
2. 의미생산을 위한 문법 익히기
3. Academic Phrasebank로 학술논문 기본구문 공부하기

III. 영어논문작성을 위한 읽기쓰기 통합전략 (2강, 총 6시간)
1. 흐름 코딩으로 논문 꼼꼼히 읽기
2. 논문의 얼굴 – 초록과 서론의 분석적 이해
3. 거인의 어깨 – 문헌리뷰 및 인용의 논리와 구조
4. 논의 쓰기 – 연구자의 실력을 발휘하라
5. 투고 전후 고려할 점
6. 논문쓰기와 마음 지키기

* 강의에 관한 질의는 literacylectures@gmail.com 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유튜브 댓글: 재미있는 현상들

Posted by on Jan 10,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집필 | No Comments

1. 영상에서 기~일게 한 이야기를 정리해서 번호를 매겨 답글을 단다. 여기에 좋아요가 몰린다.

솔직히 몇몇 영상들은 너무 뜸을 들인다. 그래서 이런 댓글이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것 같다. 블로그 글 중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 두어 페이지 하고 본론은 끝에 한 문단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영상의 경우에는 미괄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속도의 문제가 크다.

2. 예전의 영상에 ‘이거 OOOO년에도 듣고 있는 분?’이라는 답글이 달리고 여기에 엄청난 좋아요가 붙는다.

유튜브 영상 주요 카테고리 중 하나는 ‘리액션’이다. 특히 음악에 대한 반응을 찍어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영상은 원래 영상 못지 않게 큰 호응을 얻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사람들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만큼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소비’한다. 이게 다 외로워서 그런 걸까? (먼산)

3. 긴 영상에 타임 스탬프를 찍어 해당 지점으로 안내하는 답글이 인기를 끈다.

음악 컴필레이션 영상에 이런 댓글이 상당히 많고, 강연 영상의 시작점이나 내용영역을 표시하는 경우도 많다. 텍스트는 휘리릭 보는 스캐닝(scanning)이나 문자검색이 가능하나 영상은 아직까지 이런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타임스탬프 댓글의 인기가 높은 것 아닐까 싶다. 이와 조금은 다르게 자신이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의 타임스탬프를 올리는 경우도 많다. 전자가 ‘공익’에 복무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감상포인트’를 강조하는 것에 가깝다.

#유튜브 #삶을위한리터러시

학술매체로서의 텍스트 vs. 영상

1. 학술매체로서의 텍스트의 위상이 쉽게 추락할 것 같지는 않다. 영상과 이미지의 시대가 된다고 해도 지식과 과학의 언어가 시각매체로 대체될 시기는 한참 멀었다. (얼마나 멀었는지는 나도 모름) 아래에서 ‘인용’을 키워드로 삼아 위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학술글쓰기를 배울 때 인용(citation)은 ‘양념’처럼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문장쓰기, 문단쓰기, 문법 및 구두점 용례, 내용구조 등을 두루 배우고 나서 마지막에 ‘이것도 알면 좋다’는 식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3. 하지만 인용은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중 핵심이다. 학술글쓰기는 자기 경험에 기반해 논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연구와 주장에 기반해 자기 논지를 ‘조립’하는 작업이다. 내러티브와는 다르게 학문 공동체가 쌓아온 자산이 글의 바탕이 된다. 동료/선배 학자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한짝 올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인용(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텍스트와 영상의 사용패턴은 사뭇 다르다. 학술텍스트는 밑줄그어지고, 요약되고, 재진술(paraphrase)된다. 이것은 차곡차곡 쌓이고 정제되어 나의 글에 새로운 스토리로 자리잡는다. 무엇보다 텍스트는 선형적(linear)이다. 논문 50개를 요약하여 하나의 글로 만든다고 해도 최종 산물은 선형적 텍스트다.

5. 텍스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책을 꼭 끝까지 읽어야 된다거나 완벽하게 읽어야 된다는 고집하지는 않는다. 책의 서문만 볼 수도 있고, 목차 중에서 흥미로운 장만 읽을 수도 있다. 학술서의 색인을 펼쳐서 흥미로운 키워드를 골라서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공부 방향에 따라 특정한 주제, 흐름을 가지고 책을 읽어가면서 지식을 쌓고, 생각의 자리를 마련하면서 일종의 담론 공간(discursive space)을 만들어낸다.

6. 이런 면에서 텍스트는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에 매우 적합한 매체다.

7. 하지만 영상의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는 여전히 소수 ‘덕후’들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상편집 기술 습득의 문제라기 보다는 영상매체를 대하는 사람들의 아비투스에 기인한다.

8. 내가 바라는 주제를 가지고 수십 개의 영상에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 다시 보는 경우가 있을까? 영상 프로듀서가 아니라면 거의 하지 않을 행동이다. 영상을 영상으로 요약하거나, 영상의 특정 부분을 ‘재진술(paraphrase)’하는 영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9. 이러한 이유로 영상을 재조립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은 부족하다. 넷플릭스에서 ‘감동받았던 장면들에 북마크를 하고, 이를 모아서 30분짜리 영상으로 만들기’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1) 그렇게 영상을 대하는 사람이 없으니 (2)그렇게 할 수 있는 기능을 굳이 제공하지 않는다. (1)과 (2)는 동전의 양면이 되어서 ‘다시 볼 거면 처음부터 보거나, 시간을 조정해서 찾아봐’라는 명령으로 돌아온다.

10. 또한 영상을 모아 새로운 영상을 만들었을 때 그 영상이 부드럽게(seamlessly) 이어지기 매우 힘들다. 그런 이유로 여러 영상 소스를 기막히게 편집한 몇몇 영상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리믹스’는 수백년 간 텍스트로 이루어져 왔던 관행이다.

11. 학술논문의 ‘리믹스’를 보면서 수십 개의 영상 소스를 기막히게 엮어낸 동영상을 볼 때 만큼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가? 사실 학술적 글쓰기가 겨냥해야 할 지점 중 하나는 ‘모으고-엮고-재조립하고-변형하고-재구조화해서-나온-글’에 대한 경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2. 약술한 요인들로 인해 종합, 이론화, 주석, 추상화, 재진술, 재구조화 등을 주요한 과업으로 삼는 학술 커뮤니케이션에서 영상이 텍스트를 쉽게 대체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13. 과학과 학술담론은 권력이다. ‘텍스트의 시대가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권력에 대한 의도적 간과를 낳는다. 영상의 외연이 넓어지고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쉽게 텍스트의 몰락을 예견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초안마무리중

리터러시의 위기, ‘배운 놈들이 더한다’

리터러시의 위기를 그저 개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안이하고도 위험하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묻히는 상황에 터한다. 한 사회가 자신의 이슈를 발굴해 내고 이를 사회문화적인 공론장으로, 나아가 제도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가가 리터러시의 척도인 것이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말해야 할 것에 침묵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말할 수 있는 자’에게서 온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해력을 갖춘’ 이들, ‘말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이들의 것이다. 빈곤이 가지지 못한 자의 책임이 아니듯 비문해는 문해력 습득에 실패한 자의 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배운 놈들이 더한다’는 리터러시를 철저히 사유화한 이들에 대한 이 사회의 경고일지 모른다.

#삶을위한리터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