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관련 영어표현

코로나19바이러스로 전세계가 떠들석합니다. 관련 핵심표현만을 모은 페이지에서 주요 표현을 가져와 해설을 달아보았습니다.

1. contract a virus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할 때에는 contract라는 동사를 주로 씁니다.

2. extremely infectious / highly contagious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는 표현들입니다. Extremely/highly로 강도를 표현합니다.

3. pass it to others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고 할 때 pass를 주로 씁니다.

4. carriers 그렇게 바이러스를 (본의 아니게) 옮기게 되는 사람을 carrier라고 합니다.

5. super-spreaders 우리말로 ‘수퍼전파자’는 super-spreader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가급적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쓸 경우에는 spreader라는 표현을 기억해야겠네요.)

6. patient zero 최초 감염자는 patient zero입니다. One이 아니라 zero로 개념화되는 게 흥미롭네요.

7. show/display symptoms 증상을 보인다고 할 때에는 show/display symptoms라고 합니다.

8. fever 열 cough 기침 respiratory difficulty 호흡곤란 등이 있겠죠.

9. 잠복기는 the incubation period 라고 표현하지요.

10. (감염)사례는 cases라고 표현합니다.

11. 확진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call someone confirmed or diagnosed cases”라고 표현합니다.

12. 사람들이 감염이 된 것으로 테스트 결과가 나오는 경우 “They test positive for it”이라고 합니다.

13. 유난히 감염자가 많은 경우를 spike로 표현해서 “a spike in cases”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치솟는 모양을 표현한 단어죠.

14. 치명률은 “the mortality rate of a disease”로 표현합니다. 사망자수는 death toll이 되겠습니다.

15. 질병의 발생은 outbreak로 표현하죠. 이 제목의 영화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6. 전 세계로 퍼지는 감염병을 판데믹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pandemic으로 씁니다. Pan-이 붙으면 ‘전체의, 전세계의’의 의미가 되죠.

17. 바이러스를 통제하고 확산을 막는다고 할 때는 control/contain the spread of the virus 라고 합니다.

18. 특정 지역을 봉쇄한다고 말할 때에는 “Towns and cities may be put/placed on/in lockdown”으로 표현합니다.

19. 격리조치는 quarantine이라고 하며 사람을 주어로 할 경우 “be put/placed in quarantine”를 쓰면 됩니다. 자가격리는 self-quarantine이라고 표현하면 되지요.

20. 마스크는 그냥 mask 라고도 하지만 face masks라는 표현도 자주 쓰입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백신개발’은 ‘develop a vaccine’이라고 표현하면 되겠습니다.

어지러운 나날이지만 모두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표현 출처:

https://dictionaryblog.cambridge.org/2020/02/26/quarantine-carriers-and-face-masks-the-language-of-the-coronavirus

오래된 가수, 조규찬

Posted by on Feb 25, 2020 in 단상, 링크, 일상 | No Comments

조규찬의 노래를 들으며
그가 이젠 정말 나이든 가수가 되었구나 싶다.
‘오래된 가수’
그의 표현으로는 그렇다.

<그날의 온기>는 아예 대놓고
옛날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노스탤지어에 버무려 내더니
이번 곡 <오래된 가수>는
그렇게 지난 날을 반추하는
‘생활인이 된’ 일상을
체념했으나 방기하지 않을 눈빛으로
찬찬히 응시한다.

어쩌면 ‘추억팔이’라고 불릴만한
이 두 곡을 관통하는 정서는
찌질함을 감싸는 따스함이다.
어쩔 수 없음을 받아안는 너른 품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음악에 꽤 긴 시간을 쏟아부은 아마추어로서
객기섞인 평을 해보자면
조규찬은 작사, 작곡, 프로듀싱, 노래까지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는 아티스트 중 하나다.
무엇보다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걸 충실히 해내는 가수다.

그런 그가
<해 지는 바닷가에서 스털링과 나는>에서
아빠로서 느끼는 사랑과 애틋함을 노래하고
<중년>에서는 나이듦의 쓸쓸함과 호젓함을 읖조리며,
<Someday We will be Together>에선
이별과 만남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있음을 말한다.
나이듦의 아름다움과 상념,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엄연한 힘을 담은 음악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오래된 가수’로서
멋지게 성숙해 가는 것 같다.
‘기호품일 뿐인’ 음악을 만든다고
한숨을 내쉬는 것 같지만
결국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일상을 보둠어 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자칫 클리셰가 될 수 있는
‘고마워요’라는 말을
참 멋지게 해내는 그를
본받고 싶다.

내 인생 작은 소망은
영혼을 담아
‘고맙습니다’를 말하는 것.
막던지는 Thank you가 아니라
나를 만들어 온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담은 인사를
빚어가고 싶다.

내 곁에 와 주어서
살아있어 주어서
먼저 떠나가 주어서
언젠가 함께해 줄 거여서
고마운 사람들.

요즘은 그냥
시도때도 없이 고맙다.

===

이제는 꿈의 시효도 끝난
이제는 현실에 맹종하는
잊혀짐에 익숙한
생활인이 된 나는 오래된 가수

한 때는 새 노래를 내놓으면
한 때는 인터뷰 제의도 들어오곤 했던 나였지
그 땐 그게 당연한 일이라 여겼어
이젠 모두 다 지난 일 이제는

어쩌다 고작 별 네 개짜리의 가수가 됐느냐는
동정어린 댓글을 받는


지워져 사라져 가
내 새 노랜 품평 받는 흔하디 흔한
기호품일 뿐이라는 그 엄연한 현실에
고갤 떨구는 일만이
어렵사리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일임을 꾹 삼키는 일

요새 난 자주 고민에 빠져
이제 그만 멈출 때가 된 것 아니냐고 자문하곤 해
가수 생명은 이제 끝나지 않았냐고
더 버티면 버틸수록
더 초라할 뿐

사랑받기엔 너무 말라버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꽃잎도 잎사귀도 없는


지워져 사라져 가
내 새 노랜 품평 받는 흔하디 흔한
기호품일 뿐이라는 그 엄연한 현실에
고갤 떨구는 일만이

어렵사리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일임을 꾹 삼키는 일

그럼에도
이런 내 노래를 들어주는 그대여
고마워요
고마워요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Feb 25,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이번 주와 다음 주 너댓 개의 일정이 취소되었다. 아쉬움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떠다니는 옅은 공포. 서로에 대한 배려. 혹시나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엮여 만남의 시간을 밀어내고 있다. 이 흉흉한 시절이 어서 지나가기를.

2. 1학기 중 대중강의 요청이 뚝 끊겼다. 다들 힘들겠지만 자영업자와 ‘프리랜서’들에게 특히 엄혹한 시절 아닐까 싶다. 절반의 프리랜서인 나에게도 쉽지 않은 나날이다. 뾰족한 수는 없다. 긴축하고 몸을 낮추고 잘 버텨내야지.

3.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온라인을 매개로 한 뭔가를 해야 하나 싶기도 한데, 그렇다고 누가 뭘 배우려고 하려나 모르겠다. 고민이 깊어간다. Zoom은 참 괜찮은 툴 같더라. (<- 쓰기 강사에게 첨삭당할 문장)

4. 알러지성 비염이 있어 대중교통 이용할 때마다 엄청나게 긴장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고 싶지 않아서다. 메르스 때 한번 못참고 연속 기침을 했더니 홍해 갈라지듯 사람들이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어 더욱 조심스럽다. 기침을 참고 눈초리를 피하고 마음을 보전하자.

5. 최종교정을 보고 있는 책의 출간일정이 조정될지도 모르겠다.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오프라인 서점의 매출 전반이 급강하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다. 책을 내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알릴 수가 없는 상황이니 조금 더 있다가 내는 것이 더 지혜로울 것 같기도 하다. 주시+관전중.

6. 살면서 자취한 시간이 십여 년은 되는데 요 며칠만큼 집에서 밥을 많이 먹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루 세 끼 집에서 먹고 설거지하고 간간히 집정리를 좀 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간다. 방학에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아버지들은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못하겠다.

7. 최일선에서 방역작업을 하고 계신 질병관리본부 이하 수많은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잠을 줄이고 온종일 보호장구 속에서 숨을 죽여가며 일하고 있는 분들의 땀 속에는 모든 걸 정치이슈로 몰아가려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숭고함이 있다. 그분들의 건강을 빌고 또 모든 분들의 안녕을 빈다.

힘겨운 시절,
모두 몸도 맘도 평안하시기를 빌어요.

독자의 시간을 헤아리는 논문쓰기: 경험으로서의 텍스트

전형적인 연구논문이라면 제목, 초록, 서론, 문헌연구, 방법론과 결과, 논의, 결론, 나아가 참고문헌과 부록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출판된 논문이라면 대개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논문은 하나의 완결된/닫힌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논문은 하나의 완성품입니다. “논문”이라는 명사로 표현되고요. 명사의 세계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자동차’나 ‘지우개’에 시간이 들어있지 않듯 말입니다.

하지만 논문을 독자가 읽기 시작하면 시간 위에서 흘러갑니다. 읽는 행위는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텍스트를 스캔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아니라면 우리는 1분에 기껏 몇백 단어를 순차적으로 읽어내어 내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읽기라는 행위가 시간의 축 위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쓰기는 단지 완결된 텍스트의 생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쓰기는 독자가 경험할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고, 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만 하는 경험을 조직하는 활동입니다. 이런 면에서 쓰기는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지식을 독자의 경험으로 번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가 강의를 하고 있는 건물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외관이 바뀌거나 방 사이의 칸막이가 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죠. 계단이 춤을 추거나 창문이 자리를 바꾸지도 않습니다. 공사가 끝난 건물은 변화하지 않는 정적 구조물입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명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건축물이 누군가에 의해 경험될 때, 건축물은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예술이 됩니다. 건축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시간의 축 위에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건축물은 완결된 구조가 아니라 방문자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경험의 총체입니다.

미술관을 설계하는 건축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단지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방문객들이 건축물과 만났을 때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지요. 미술관에 진입하는 길에서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할지, 미술관 벽면의 소재가 어떤 느낌을 줄지, 정문을 어떤 방식으로 통과하게 할지, 들어왔을 때 채광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어떤 느낌일지, 천장의 높이와 조명에서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낼지, 방문자의 동선을 어떻게 유도할지 등을 세심하게 살핍니다. 이를 통해 변하지 않는 완성품으로서의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살아 움직이는 건축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독자의 시간을 헤아리는 글쓰기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맞는 문장, 멋있는 표현을 동원하는 글쓰기도 중요하지만, 글을 읽어내려가는 독자의 호흡을, 이해의 속도를, 정서적 임팩트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풀어내는 행위이면서 독자의 시간을 먼저 살아보는 행위입니다.

유능한 작가는 유능한 독자입니다. 쓰면서 동시에 읽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좋은 작가는 쓰면서 읽고, 읽으면서 씁니다. 텍스트를 읽을 땐 읽기+쓰기를, 쓸 때는 쓰기+읽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자에 대한 감은 어디에서 올까요? 독자를 직접 만나볼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전공영화’와 ‘수 구조(move structure)’라는 개념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로논문쓰기

‘뚫렸다’는 은유에 대하여

‘뚫렸다’

감염병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지만 메타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뚫렸다”는 은유의 아슬아슬함을 생각한다. 어딘가가 “뚫렸다”면, 거길 지키는 사람/시스템이 있고, 바이러스와 숙주가 된 사람이 거길 ‘뚫었으며’, 뚫린 구멍은 점점 커질 위험이 있다. 바이러스에 ‘뚫린’ 지역사회는 그로 인한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렇게 ‘뚫고 들어온’ 사람을 경계하고 비난하며 단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바이러스의 숙주로 기능한 이들은 방역망을, 지역을, 안전이라는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인가? 우리는 ‘뚫은’ 주체를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으로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가해자/피해자라는 구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뚫다/뚫리다’로 표현되는 공수 혹은 침투 메타포가 우리의 생각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촛불집회 논문 출판

Posted by on Feb 21, 2020 in 강의노트, 링크, 영어로 글쓰기, 집필 | No Comments

작지만 뜻깊은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2016-2017년 박근혜 퇴진운동의 거의 모든 집회에 참여하면서 틈틈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와 함께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에 관한 다양한 문헌을 읽기 시작했고, 언어교육과 관련된 논문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여름이었던가요. 장인철(Inchull Jang) 선생님과 함께 현실정치에 관심을 둔 사회언어학/응용언어학자로서 함께 글을 써보자는 의견을 나누었고 자료조사와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방향 전환, 검토와 수정을 거쳐 오늘 <사회기호학 (Social Semiotics)> 저널에 “시위에서 매개도구의 궤적: 대한민국 촛불 집회에서의 손피켓의 사례를 중심으로(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라는 제목의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논의는 시위도구로 쓰여진 손팻말(hand placard)에 집중합니다. 최근 한국의 시위현장에서 보이는 손피켓은 개개인이 손수 만든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대량으로 제작되어 뿌려지는 것이죠. 이는 그 자체로 특이한 현상이면서 여러 가지 언어적, 심리적, 상징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논문은 이 점에 주목하여 손피켓이라는 매개도구(mediational means)를 중심으로 촛불집회를 조망합니다. 시위 현장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의례적으로 또 창조적으로 사용하는지 추적합니다. 나아가 그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합니다.

논문을 읽어보실 분들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논문을 쓰면서 가장 깊게 고민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These impressions made the first author ask the following fundamental questions regarding the politics of protest in a democratic society: “How can we marshal solidarity across a wide range of sociopolitical spectrums while not forfeiting the small yet critical voices of each participant and stakeholder, and how can we achieve democracy ‘within’ protests beyond the protests ‘for’ democracy?” (Fieldnote, 4 December 2016).”

논문을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 사진들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신 박여라 선생님, 홍승희 선생님,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이병한 편집국장님과 이정민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원고를 보고 꼼꼼히 피드백을 주신 이정아 선생님과 Mike Chesnut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힘있게 논문을 마무리해 주신 저자 장인철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아래는 논문의 초록입니다. 혹시 읽어보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아래 답글로 말씀해 주십시오. 메일로 논문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 trajectory of a mediational means in protest: the hand placard in South Korea’s Candlelight Protests>

While positioning this research within the growing body of scholarship related to linguistic landscape of protest, we illustrate a distinctive form of analysis. Rather than giving a generalized, extensive, or quantitative description, we focus on a qualitative and in-depth analysis of a single protest tool in relation to protest actions and space-making. Drawing on the concept of “mediational means” from mediated discourse analysis, we analyze the linguistic and semiotic functions and effects of sonp’aenmal (hand placard), a protest tool uniformly and widely employed during South Korea’s 2016–2017 Candlelight Protests. Based on a corpus of protest images and our autoethnographic accounts of direct participation, we examine why this sign emerged as an important tool in the protest space, how it was utilized ritually and creatively, and the effects of its use on protesters’ experiences, sensitivity, and identity. Competing discursive effects caused by its uniform design and widespread use are discussed further.

KEYWORDS: South Korea, Candlelight Protests, linguistic landscape, mediational means, hand placard, protest tool

 

논문 링크: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10350330.2020.1730555

진심, 진실, 그리고 권력

권력이 있다는 것은 단지 권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이 있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할지 말지, 또 어떻게 행사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와 맥락에 따라 권력의 강도와 범위를 그때그때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권력이 없다는 것은 단지 의도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은 상대의 권력행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특정한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조절’로 봐야 할지를 계속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권력없음’의 이중고가 드러난다. 권력이 없기에 실력을 행사할 수 없는데다가, 상대의 의도를 지속적으로 모니터해야 하는 입장에서 설명되지 않는 공포심, 심리적인 피로감이 쌓여간다. 힘이 없기에 신경을 계속 써야 하고, 두려움과 싸워야 하고, 이것이 또 다른 무력감을 발생시킨다.

모든 면에서 상대적인 우위에 선 사람이 ‘나도 힘들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진심일지 모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을 서슴없이 진실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대 소셜미디어 지형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진심을 진실이라 단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1) 없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진심을 ‘과도하게’ 느끼고 (2) 그것을 유려하게 표현해내면서 (3) 추호의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현실에 있지 않을까 싶다.

모두에게 진심이 있지만 모두가 진실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끈질기게 응시하고 기억하고 사유하는 자들에게도 무척이나 드물게 허락된다. 모두가 그저 진실한 세상에서 나는 자주 어지럽다. 누군가는 나 때문에 그렇게 어지러움을 느끼겠지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Feb 20,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1. <삶을 위한 리터러시(가제)>의 최종 교정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탈고하고 마음이 헛헛하여 한 주 남짓을 생산성 제로로 보냈습니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 사두고 안봤던 책들을 전전하며 학술적인 작업에 힘을 쓰지 못했죠.

이런 슬럼프를 겪으면서 ‘지속하는 힘’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번 책 작업을 함께한 선생님이나 페이스북에서 연구 이야기를 올리시는 여러 분들을 보면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의지를 느낍니다. 그걸 의지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습관이라고 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끝없는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겐 그런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니, 확실히 부족합니다.

뭔가 하나를 마치기 위해 전력투구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허전함이 찾아듭니다. 성취의 기쁨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바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 보다는 ‘이번에도 겨우 일을 마쳤네, 더 열심히 한다고 뭐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이런 일시적 무력감을 완전히 떨쳐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의지나 자세의 문제라기 보다는 성향의 문제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이걸 이겨내는 힘은 사회적인 관계, 커뮤니티의 지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커뮤니티가 중요하다고 논문까지 써놓고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나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 2013년 2월에 <인지언어학 이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2-3년 쓰다 말겠지’ 했습니다. 그게 4년, 5년, 6년이 되더니 이제 만 7년에 이르렀습니다. 계획하지 않았던 길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네요.

처음부터 큰 청사진을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니어서 원고는 울퉁불퉁합니다. 그때그때 마음에 이끌려 쓴 글도 제법 되고요. 그러다 보니 하나로 묶기에 적당치 않은 글이 1/3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흔 꼭지 정도는 다듬고 보강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1-2년 더 쓰고 그간의 원고 2/3 정도를 고쳐써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을 해놔야 그나마 좀 손을 댈 것 같네요.

3. 소셜미디어에서 믿을 수 있는 지인 몇몇과만 관계를 맺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분들을 봅니다. 존경스럽고 또 부럽습니다. 저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거든요. 이곳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의 글을 보며 많이 배우고 또 좋은 기운도 받지만, 아무런 교류 없이 타임라인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페친도 적지 않네요. 가끔은 제가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눈엣가시’가 된 건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그런 면에서 Unfollow는 편리하고도 비정한 기능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계속 엉거주춤 살아갈 수밖에 없겠죠. 좋은 글 써주시고 대화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4. 코로나19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많은 일들, 그 중에서도 의심과 혐오, 공포가 아프게 다가옵니다. 최전선에서 잠을 줄여가며 일하고 계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이 사태가 빨리 수습되길 기원합니다.

한편 외출과 만남을 대폭 줄이다 보니 생활이 참 단촐해졌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번잡한 일들이 참 많았구나 싶은 겁니다. 앞으로 좀더 단순한 삶을 꾸려가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드네요.

5. 앗, 벌써 자정을 훌쩍 넘겼군요. 어지러운 세상, 모두 몸도 맘도 평안하시길 빕니다.

한계는 가벼움이 아니다

언어의 해상도는 사고의 해상도를 넘지 못한다.
사고의 해상도는 경험의 해상도를 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은 동시대 인류 경험의 일부일 뿐이다.
현시대 인류의 경험은 인류가 경험한 역사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무엇보다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에서 먼지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매일 목도하는
쉼없는 언어들의 부딪침은
의미없는가?
이토록 ‘해상도 떨어지는’ 말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희망은
헛된 몽상일 뿐인가?

나는 이 질문의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때로 언어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기에,
때로 언어는 우리를 드러내는 유일한 정체성이기에,
때로 언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이기에,

언어를 매개로
예술이, 철학이, 과학이,
그 무엇보다
우리의 관계가 변화하기에,

언어는 더 정교해져야 하고,
더 넓어져야 하고,
더 깊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몇 개의 카드로
세상을 다 이해한 듯 소란떨지 않고,
몇 마디 경구로
삶에 달관한 듯 읊조리지 않고,
몇 권의 책으로
다 알았다는 듯 써갈기지 않는 것.

긴 글로도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삶의 진실이 있기에
긴 글을 쓰고 읽어가는 일의 고됨을
기꺼이 받아안는 일.

요약본에
자신의 생각을
송두리째 맡기지 않는 일.

이들이 소중하다 믿는다.

그 어떤 노력을 경주한다 해도
말이 삶을 오롯이 담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아니
‘거대한’이라는 말을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우주라는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언어가
한없이 뭉툭하다는 걸 깨달을 때,
고로 나의 언어는 그저
‘한계의 한계’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 설 때
말의 무게를 깨닫게 된다.

한계는 가벼움이 아니다.
한계는 하찮음이 아니다.

언어의 한계는 그 내부를 성찰해야 할
조건이자 명령이다.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에 넣으려다가 넣지 못한 단상을 다시 더듬어/다듬어 남겨놓습니다.

‘국뽕’ 단상

Posted by on Feb 18, 2020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일상 | No Comments

1.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국뽕’이 들어간 표현을 심심찮게 본다. 이 단어가 집어 삼키는 현상의 범위가 넓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예전 같으면 ‘국뽕’을 언급하지 않을 현상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동원되는 것이다.

2. 재미있게 생각하는 연어(collocation; 함께 나올 확률이 높은 단어들)는 ‘국뽕에 취한다’이다. ‘취한다’는 ‘술취하다’와 같은 의미이지만 조금 비틀어 보면 무언가를 소유로 삼는다는 뜻도 있다. 즉, 국뽕은 ‘취하게 하는(intoxicate)’ 것이지만 ‘취하는(take)’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취한다’는 표현으로 장난스럽게 ‘책임을 회피’하지만 그 이면의 의도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3. 돌아보면 언어가 포섭하는 세계가 멋없이 확장될 때 그 언어와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나만 알고 있던 밴드가 인기를 끌면 마음이 멀어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으려나.

4. ‘팬질’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잠깐 아카펠라 그룹인 <Take 6>의 동호회를 만들어 몇 번 음악감상 모임을 갖기도 하고 라이브 공연을 함께 관람한 적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푹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참 재미없게 살았다.

5. 그러고 보니 사진도, 음악도, 글도 온전히 나를 사로잡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성향이 못마땅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떻게 하나 싶은 마음이다. 한편으로는 하나에 홀라당 마음을 빼앗기지 못했기에 이것 저것을 잘 조립해서 가르치는 일을 택한 것 아닐까 싶고.

(이거 봐. 국뽕 이야기하려다가 거기에 빠지지 못하고 딴 소리 하면서 끝나는 거. 글도 엄청 짧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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