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시공간, 두서없는 단상들

온라인 개학 시기, 교수학습의 시공간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1. 온라인 개학이 거둔 일정한 성공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온라인 교육’이 가지는 내재적 균열은 ‘몸과 공간의 변화’라는 급진적 변수를 무시하고 ‘내용과 시간’을 잡아두려는 데 있지 않았을까. 배움에 있어 시공간은 분리 가능한가? 우리 교육은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2. 왜 적잖은 사람들이 집에서는 도저히 공부가 안된다고 말하는가? 그저 의지의 부족인가? 배움의 공간이 달라지고 그 안에 놓여지는 몸이 달라지는데 ‘O교시’로 대표되는 시간의 구획이, 그 안에서 다뤄지는 내용이 그대로인 것은 자연스러운가?

3.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건만 여전히 교육에서 시공간이 따로 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옳은 일일까? 학교에서의 시간은 집에서의 시간과 같이 흐르는가? 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과 화면 속 사람들을 보거나 콘텐츠를 시청하는 시간은 동일한 밀도와 점성을 가지고 있는가?

4. 우리의 지각, 주의, 집중, 지속, 정서, 태도, 흥미, 몸짓 등은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어떻게 엮이는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의 몸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으로 매개되고(socially mediated), 공동체에 의해 규율잡힌(community-regulated) 학습은 컴퓨터에 의해 매개되는 학습과 어떻게 다른가?

5. 오랜 시간 유지되어 온 학교의 “O교시” 체제는 그 자체로 개인의 차이를 무시한다. 개인별로 이해와 배움, 집중과 지속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고의로 망각’한다. 공교육체제의 특성상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양과 수준 이상의 지식을 전수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필요악’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6. 추후 온라인 학습이 또 다시 ‘디폴트’가 되는 시기가 온다면 우리는 여전히 O교시 체제를 고집해야 하는가? 혹 ‘급진적 개인화’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공간의 변화, 함께 존재함(co-presence)의 상실은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변화를 수반한다. 그렇게 변화한 시공간에 맞는 새로운 배움을 상상해야 할 시기일지 모른다.

7. 몇 주 만에 온라인 개학을 위한 IT 시스템을 안정화시켰다는 소식, 그에 대한 일부 언론의 상찬을 보며 우리사회가 여전히 기술중심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IT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그것은 ‘온라인 개학’의 기술적 선결과제일 뿐 완성은 아니다.

8. 중요한 것은 ‘온라인/디지털’이라는 플랫폼에서 ‘개학’을 했다는 것이다. 학교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IT시스템의 완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교사들의 노고, 나아가 학부모와 학습자들의 협력이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조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온.라.인. 개학’이 아니라 ‘온라인 개.학.’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교육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

9.교실에서 행해지던 짝활동 및 모둠활동이 힘들어진다는 것은 상호작용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부 온라인 수업이 택하고 있는 ‘시청완료=학습완료’의 공식은 바람직한가? 시청의 완료가 그 시간 동안의 인지적 정서적 몰입(engagement)을 담보하는가?

10. 오프라인 개학이 다가오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전의 세계’에 적응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 시간의 고군분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잊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새로운 실천의 싹이 트지 않을까?

‘힘내요’ 버튼 단상

Posted by on May 1, 2020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코로나-19 사태에서 마스크가 오프라인의 초강력 재화로 떠올랐다면, 적어도 오늘 페북 최고의 재화는 ‘힘내요’ 버튼이군요. 힘내요를 지닌 이는 힘이 나고 그렇지 못한 이는 박탈감을 느끼는 모순. ‘힘내요’ 버튼이 없으면 상대에게 힘내라 말할 수도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비극. 부익부빈익빈은 오프 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렇게 반응이 뜨거운 걸 보니 페북이 ‘커스텀 버튼’ 장사를 한다면 큰 돈을 벌지도 모르겠어요. ‘아재개그가 싫어요’, ‘휴, 이걸 진짜 다 읽었어요’, ‘한번 더 이러면 블락이예요’, ‘평소 글은 진짜 별로인데 이 글은 좋네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우쭈쭈’, ‘투쟁투쟁투쟁’ 버튼 같은 버튼을 디자인해서 파는 거예요. 근데 아무리 돈이 된다고 해도 한 사람이 좋아요 백 개 올려주고 하는 식으로는 안했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생태계’에서 최소한의 평등은 남아있을 수 있도록 말이죠. 여러분 힘내세요. 저도 힘낼게요. 힘내라 버튼 따위. 버튼은 그저 버튼일 뿐이예요. (미괄식)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금배지 언박싱’에 관하여

말이나 행위를 가져오는 것은 그저 ‘선택의 자유’일까

1. ‘언박싱’ 담론이 의례의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품의 영역, 자신의 구매를 보여주는 영역, 때로 누군가의 제품을 홍보하는 영역이다. 언박싱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상품,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라는 네트워크에서 작동한다. 언박싱 영상의 생산자와 시청자는 재화를 통해 매개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다.

2. ‘국회의원 금배지’가 점하는 담론의 영역이 있다. 기본적으로 배지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지만, 자주 ‘국민을 내려다보는’ 태도를 함의한다. ‘금배지 좀 달았다고’와 같이 정치인에 대한 못마땅함을 표현할 때도 종종 사용된다. 그렇게 금배지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민주정치의 표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금배지는 공적영역의 담론 안에 위치하여 대표자로서의 정치인을 상징한다.

3.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들이 교섭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말은 섞이고 의례는 ‘선을 넘는다’. 교회 내에서 랩뮤직의 사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에서 ‘신박한 예배 형식’이 되었다. 도덕적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 합쳐져 ‘착한 가격’을 낳았고, 이는 또 다른 영역과 만나 ‘착한 임대인 정책’을 만들어 냈다.

4. 담론간의 선을 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모든 가로지르기를 긍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교육의 일주체인 학습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 여길 수 없으며, 비상시의 온라인수업을 ‘미래교육’이라 표현하는 것에 손뼉칠 이유도 없다. 담론이 섞이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하지만, 그 가능성은 희망일 수도, 타락일 수도 있는 것이다.

5. 그런 면에서 정치의 영역에 있는 ‘금배지’를 ‘언박싱’하는 행위는 위태롭다. (물론 이걸 ‘재미있다’고 표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라면 공공의 영역을 상징하는 금배지를 개인과 상품 담론의 최전선에 있는 언박싱이라는 의례에 얹어놓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구시대의 끝자락에 머무는 일일 수 있지만 말이다.

담론을 섞는 일은 창조적인 행위일 수도 상식의 파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점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위치에서 어떤 가로지르기가 용납되고 요청되느냐를 판단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가로지르기의 예술’에 능통해야 한다. 거침없이 가로지르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덧. 이 글을 쓰고 나니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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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키워드는 ‘윤리’입니다. 보통 윤리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 윤리적 측면이 개입하죠. 얼마 전 온라인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작명이 있었어요. 바로 ‘버닝쑨대국밥집’과 ‘버닝선대인’인데, 국밥집과 프로그램 이름을 저렇게 지은 거예요. 여기에서 타인의 말을 자기 말이나 글로 가져올 때의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아마도 저 이름을 택한 사람들은 주목받는 말장난을 원했겠죠.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켜 한 번 더 쳐다보게 하는 효과를 노리면서요.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말만 달랑 떼어오려 했다는 점이에요. ‘버닝썬’이라는 말이 태어난 자리의 착취와 잔혹함, 분노와 고통은 아랑곳없이 말의 힘만을 가져오려 한 거죠.

저는 이런 행위가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말은 사전 위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 상태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관계 속에 뿌리박고 또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말 주위로 권력과 욕망, 아픔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말을 가져오고 이름을 정하는 데 필요한 윤리는 세계를 만나고 해석하는 윤리이고, 말이 자라난 사회정치적 토양에 대한 살핌의 윤리이며, 무엇보다도 그 말로 엮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죠. 삶과 세계를, 거기 살고 있는 감정과 모순을 지워버리고 말만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시키는 행위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이건 단순히 말실수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망각, 맥락에 대한 몰이해, 나아가 자기중심성으로의 한없는 함몰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기에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러시아의 문학평론가이자 이론가인 바흐친이 간파했듯이 우리의 말은 원래 누군가의 말이었고 우리의 조어는 결코 완벽한 창조가 아니라는 점, 말이 우리 곁에 올 때 세계가, 사건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이 함께 따라온다는 사실이에요. 말을 쓰는 것은 늘 삶에 잇대는 행위이고, 새로운 세계를 지어가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습득은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성장과 떼어놓을 수 없어요.” (265-266쪽)

비판적 전회(Critical Turns)

Posted by on Apr 26, 2020 in 강의노트,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한 연구모임에서 내 삶의 궤적과 비판적 응용언어학자로 살게 된 계기들(critical turns)에 대해 이야기했다. 밋밋한 인생이지만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솔하게 말씀드렸고, 공부의 과정에서 무지와 안이함의 껍질을 깬 경험들을 나누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삶 자체를 주제로 한 발표는 처음이었기에 준비하면서, 또 마치고 나서 여러 생각이 스쳤다.

수년 간 모든 역량을 가르치는 일에 쏟아부으면서 논문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다. 관념이나 지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양태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지금의 나는 응용언어’학자’라기보다는 응용언어학/영어교육 커뮤니케이터에 가깝다.

선생님과 학생들, 여러 학부모를 만나 ‘삶을 위한 영어교육/리터러시’ 이야기를 나눈다. 학부와 대학원 수업을 중심으로 고민을 이어가고 다양한 사회현상을 엮어 논문과 대중서의 중간 쯤 되는 글을 써낸다. 이런 일을 늘상 한다.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사교육이 자본의 논리로 영어교육을 이끌고, 대다수 국민이 영어교육 전문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소위 ‘삶을 위한 영어교육’에 매진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닐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기 보다는 힘에 부친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읊조린다. ‘생활을 이끄는 것은 전망이 아니라 의지다.’

허나 의지는 미약하고 게으름은 달콤하고 분노는 쉬이 사그라든다. 현실은 강고하고 욕망은 집요하건만 나의 말은 이상적이며 나이브하기까지 하다. 다만 돈을 위해 이론을 알아볼 수 없는 괴물로 만들어 버리거나, 이론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잊지/잃지 않기를 바란다. 대단한 연구자는 아니어도 쓸만한 이야기꾼이 되길 소망한다.

갈수록 대학 안이냐 바깥이냐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써내고 나누느냐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게 보니 할 수 있는 일들이 적지 않다. 몸을 좀더 바삐 움직여야 한다. 무른 생각을 다져야 한다. 그래야만 한 선생님의 말처럼 누군가의 ‘곁’을 지킬 수 있다.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묻어두었던 고민들과 재회한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쓰는 사람으로서, 지식을 만들고 나누는 사람으로서, 배우는 사람으로서, 언제까지나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일상을 꾸려가야 할 것인가. 언제 혼자여야 하고, 언제 뜻을 모을 것인가. 왜 이 질문은 수십 년 반복되는가.

덧. 오늘 발표는 bell hooks의 책 <Teaching to Transgress> 11장 “Language”를 다루었다. 부제는 “Teaching New Worlds/New Words”. 조만간 나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 보고 싶다.

필요 없는 책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대한 독자반응에 대해 편집장님과 말씀을 나누었다. 유튜브와 텍스트 문화에 대한 성찰과 논의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로서의 책의 역할과 엇갈리는 반응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에 대한 편집장님의 답이 마음에 남아 기록해 둔다.

“만인을 위로하고 안심하게 하는 책은 나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인상깊었던 모리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을 때가 많은 사람이면 됩니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유튜브는책을집어삼킬것인가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Apr 21,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공지가 떴다. 이론 중심의 수업은 학기말까지 온라인 수업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상 처음 학생들과 직접 만나지 않고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기말고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2. 학교방침에 따라 ‘모든 수강생이 동의한다는 조건 하에’ 학점을 S/U(Successful/Unsuccessful)로 바꿀 수 있었다. 학생들이 투표를 원해서 돌렸더니 약 1/3이 절대평가에 기반한 기존 학점체계(A, B, C 등)를 요구했다. 단 한 사람의 반대만 있어도 S/U 학점 시행은 불가하기에 2/3 정도의 학생들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학점체계를 따르게 되었다. (통계적으로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이 두 학점을 선호하는 학생의 비율이 흥미롭다.

3. 집이 학교가 되었으니, 이제 학교가 집이 될 차례 아닐까. 예전에 서울비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듯이, 학교라는 공간은 편안함 보다는 규율에 중심을 둔 공간이다. 널브러져 있거나 누워서 뭘 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글로벌 대기업들의 ‘창조적 사무공간’과 휴식시설은 칭송되지만 학교공간을 그렇게 개조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교과교실이나 도서관 등의 시설에 상당한 재정을 투자하는 학교가 늘고 있으나 ‘학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네모반듯 책걸상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다. 학생수가 급감하는 지금, 공간에 대한 급진적 상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4. ‘직설법’만 남은 언어라면 사람들은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될까? 메타포도, 환유도, 암시도, 풍자와 비꼼도, 아이러니도, 완곡어법도 없는 언어라면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질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언어와 결합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그거 참 잘됐네.”가 오만가지로 이해되진 않을까? 결국 의미다양성의 문제는 직설적/비유적 언어의 문제가 아닌 다양한 삶의 문제 아닐까?

5. 정부재정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국민 재난수단 지급’ vs. ‘하위소득 70%에만 지급’ 논쟁에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상황이 위급하고 신속한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건 확실하지 않은가?. 문득 생각난 것은 IMF시절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98년 당시 우리국민은 약 21억 3천달러어치의 금을 국가에 모아 주었다. 당시 돈으로 2조가 넘으니 인플레를 고려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큰 돈이 될 것이다. 뻘소리인 걸 알지만, 그때 준 돈 다시 국민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전국민 지급 못할 것도 없을 듯하다. (먼산)

6. 자기말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고, 대화상대와 더 큰 말을 지어가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씨줄과 날줄 모두가 자기에게 나오고, 후자는 자신이 씨줄이라면 상대를 날줄로 본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뭔가 더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민의를 대표해야 하고, 미디어에 노출되어야 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해야 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상대와 자신의 말을 엮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정치인이 소중하다. 수많은 대화를 한땀한땀 엮어 정치와 제도를 빚어내는 정치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비판교육학 수업을 준비하다가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1. “갈등이 없으면 삶의 존엄성이 손상됩니다. 투쟁과 갈등이 없는 삶 또는 인간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갈등을 부정하는 것은 생생하고 사회적인 경험의 현실적인 측면을 대부분 무시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2.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읽어가며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학생들은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불만도 많다. 거의 모든 학생이 현실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흥미로운 것은 변화의 당위에 대한 긍정과 갈등과 투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동시에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변화가 필요하지만 갈등이 심해지는 건 피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다.

3. 첫 인용구에 드러나듯이 프레이리는 갈등을 대면하는 행위를 삶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본다. 양심의 동반자라 칭한다. 세상을 경험하고 의식화가 진행되고 나면 갈등을 알게 된다기 보다는 갈등을 직시하는 가운데 존엄과 양심이 회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갈등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윤리적 삶의 지표다.

4. 프레이리가 말하는 ‘의식화’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며 거기에 존재하는 갈등과 희망을 받아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습량과 비례하지 않는다. 헨리 지루는 “해방적인 지식을 거부하는 이들은 오히려 지식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알면 알수록 껄끄러운 일들을 멀리하고, 지식을 해방의 도구보다는 축적의 수단으로 쓰는 이들이 많아진다. 프레이리와 지루의 말을 더하면 알면 알수록 존엄은 스러지고 양심은 잊혀진다.

5. 비판교육학에서의 ‘갈등’이 주변 사람들과의 불화와 같지는 않다. 물론 정당과 노조활동가, 사회운동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은 직접적인 갈등상황을 피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학생들과 비판교육학을 논의할 때 나는 ‘주어진 내러티브’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곤 한다. 다시 지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이른바 자기가 생산한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담론은 교사와 학생이 구현하고 생산하는 복잡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형식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많은 쟁점들은 이 관심사를 중심으로 비판교육학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교사는 지성인이다>, 211쪽)

6. 지루의 말 중에서 핵심은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미를 만들고 공유하고 때로는 강요하며 살아간다. 사회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장 잘 하는 일이 의미생산인 것이다. 그런데 갈등없는 삶에서 이 의미는 그저 부여된다. 앎이든 삶이든 저항없이 순항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삶은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바람을 맞고 무르팍이 깨지기 전에는 몸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암묵적으로 만들어낸 의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상황이 계속된다.

7. 학교 현장에서의 비판교육학은 지배적 서사에 대한 온갖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식을 쌓음과 동시에 그에 대해 의심하는 습속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 누가 규율을 제정하는가? 누가 상식을 정의하는가? 누가 나의 생각을, 나아가 우리의 생각을 만드는가? 김성우는 왜 나에게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는가?

8. 비판교육학 수업을 앞두고 갈등에 대해 끄적여 보았다. 갈등에 취약한 사람으로서 갈등을 끌어안는 사상에 대해 논의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갈등이 삶의 필연적 조건임을 깨닫고 그 복판에 뛰어들었음에도 희망과 사랑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제나 마음이 차오른다. 비록 한 주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학생들이 삶의 서사의 작동방식을, 생각의 연원을, 갈등과 저항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제 수업 준비를 마무리해야겠다.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Apr 18, 2020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코로나 19가 준비할 틈도 없이 미래교육을 앞당기고 있다”는 MBC 뉴스의 한 꼭지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교육이 ‘미래교육’이라고? 정말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구나 싶다. 교사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이 미래의 교육일 수는 없다.

2. 선거가 끝나고 ‘자유 민주주의’는 가고 ‘평등 민주주의’가 오기를, 하고 중얼거렸다. 단지 정치세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종종 아쉬우나 우리의 불평등은 내내 잔혹하다.

3. 학생들에게 절대 내 책을 읽히지 않는 이유

나: 대학 때 자기가 쓴 책 읽히는 교수님들 있었어?
짝: 어어 두어 명 있었던 거 같아.
나: 어떤 기분이 들었어?
짝: 장사꾼 같았어.
나: (깨달음)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수업에서 나의 책을 읽으란 말을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대학원 수업 시간 나의 책을 읽었다는 학생이 무려 둘이나!

말하지도 않았는데 읽는 것은 말리지 않는다. 그저 감사할 뿐. ^^

4. 바이러스와 인간, 공간과 시간, 개인과 사회, 신뢰와 공포, 내부와 외부, 국가와 국가, 정치와 의료, 디지털과 아날로그, 손과 얼굴, 무엇보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처절하게 배운다. 최대한의 거리확보를 위해 각자의 방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시절, 모든 것이 거대한 하나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를 세상에 중심에 놓았던 어리석었던 날들을 돌아보길 빈다. 인간은 그저 변방의 한 노드(node)일 뿐이니까.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지만, 만물과의 전쟁에서는 대패하기를. 이제껏 그래왔듯 득의양양 오만한 승자처럼 나대는 행태는 사라지길 간절히 빈다.

5. ‘생각해 보면’이나 ‘돌아보면’ 같은 단어를 자주 써왔다. 어쩌면 스스로가 성찰의 시늉을 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일기를 쓰고, 쪽글을 쓰고, 수업에 대한 메모를 하고, 대화를 기록하고, 이들에 대해 곱씹고… 그것들을 ‘성찰’이라는 두루뭉술한 이름으로 묶어 온갖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기충족적인 성찰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는 나의 비판과 성찰은 글 밖에서 무엇이란 말인가.

6. 다음 영어교육과정 수업 주제가 비판적 교육학(critical pedagogy)이다. 간만에 프레이리를 다시 읽는다. 점점 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끌린다. ‘희망’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빛을 잃어가는 시대라서일까. 온몸으로 세상에 부딪치는 사랑과 희망이 된 이들에게 감사한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대화도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창조와 재창조의 행위는 사랑과 융합되지 않는다면 가능할 수 없다. 사랑은 대화의 주춧돌인 동시에 대화 자체이다. 따라서 사랑은 책임있는 주체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지배관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지배관계에서는 사랑의 병리적 현상이 나타난다. 지배자에게서는 사디즘, 피지배자에게서는 마조히즘이 엿보인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사랑의 행위가 그들의 대의, 즉 해방을 바라는 욕구에 더해져야 한다. 사랑이 깃든 이런 헌신은 대화라는 형태를 띤다. 사랑하려면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사랑은 감상적 사랑일 수 없다. 자유의 행위로써 사랑이 조작의 구실거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또 다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행위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조건이 더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억압적 상황을 없애야만 비로소 억압적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던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파울로 프레이리. – 피터 맥라렌 저. 강주헌 옮김. <체 게바라, 파울로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 (아침이슬, 2008) 266-267.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짝과나 #일상스케치

실력이 없어 떨어진 걸 누굴 탓해

Posted by on Apr 18, 2020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가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곤 하는데 이런 거다. 모든 정당에 대한 언론보도의 양과 질이 균등해진다면 국민은 어떤 세력을 선택할 것인가? 신문과 방송, 각종 포털이 민주당과 녹색당, 미래통합당과 정의당, 노동당, 여성의 당을 같은 비중으로, 어느 정도 공정성을 유지하면서 다룬다면 누가 ‘손해’를 보고 누가 ‘이득’을 얻을 것인가? 지극히 비현실적인 가정임을 알지만 사고실험을 해보자는 거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표의 결과를 균등하게 배분하려는 노력이라면 투표의 사회문화적, 정보적, 제도적 조건을 좀더 균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물론 현실은 연동형 비례대표의 취지마저 무색해지고 다수당은 꼼수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다수당 지지자 다수가 소수정당에 ‘실력이 없어서 떨어진 걸 누굴 탓하냐’고 말할 때 놓치고 있는 것은 선거의 조건이다. ‘다수 프리미엄’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과연 지금의 정당과 선거제도는 이같은 ‘메타인지’를 촉진하는가? 아닌 것 같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교육의 온라인화를 넘어 급진적 상상력으로

‘교육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했다’는 패러다임으로는 지금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적확하고 풍부하게 이 사태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고, 이 상황에서 삶과 교육이 접속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다’는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 좀더 적절하다. 그저 교육이 오프에서 온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삶의 양태와 교육이 접속하는 방식이 되돌릴 수 없을만큼 변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전에는 삶이 교육과 접속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는 ‘등하교’였다. 등하교를 중심으로 일련의 사건들이 조직되고 실행된다. 등하교가 적절히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을 적절히 조직해야 한다. 아침 등교를 위해 일정시간 취침을 취해야 한다. 등하교 시간을 염두에 두고 하루가 계획되어야 한다. 저연령 학습자들의 경우라면 그 시간에 맞추어 보호자들의 시간 또한 조정되어야 한다.

즉 성공적인 등하교를 위해서는 가족이, 학생 본인이, 대중교통 운행주체가, 교사가, 학교가 책임져야 할 영역들이 존재한다. 작업계획서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협업이 기막히게 맞물려 돌아가야만 ‘등하교’라는 의례가 성공적으로 수행된다. 그런데 이것은 학교생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수업의 시작과 끝, 교과서를 펴고 읽는 행위, 준비물을 가져오는 일, 학교에서의 점심식사, 학교행사, 도서관 등 학교시설 이용 등 모든 것이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근거하고 있다. 실로 엄청난 ‘사회계약’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몸(body)의 문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은 교수학습방식의 변화를 낳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몸의 변화를 가져온다. “어 생각보다 콘텐츠가 괜찮네”라고 말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이 콘텐츠를 하루 종일 시청해야 할 몸”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고려가 없는 온라인 교육은 결국 ‘훈육에 적합한 몸’만을 겨냥한 교육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실로 교육의 몰락, 아니 타락이다.

근본적으로 학교는 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공간이다. 그 안이 시끄럽고 삐걱거릴지라도 결국 한 공간 안에 여러 사람이 함께 존재(copresence)함으로 발생하는 사회문화적, 제도적, ‘분위기적’ 힘이 존재한다. 물리적 공간에서 문화와 규율을 공유하는 개인들은 결코 ‘개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온라인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탈각된다. 화면 안에 수십 명이 들어왔을 때 작동하는 사회성은 한 교실 안에 수십 명의 몸이 공존할 때 작동하는 사회성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육이 수반하는 다양한 의례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책임과 역할, 온라인 교육에서의 몸의 변화, 공존의 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콘텐츠를 잘 만들 것인가’나 ‘어떻게 인프라를 확충할 것인가’의 고민으로 해결될 수 없다. 교사들의 노력은 소중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교육을 만들어 내려는 궁리는 존경스럽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육부가 소위 ‘뉴노멀’이 될지 모르는 온라인 교육의 미래를 고민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온라인 교육으로 기존의 교육을 커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삶의 질서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온라인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질문은 ‘어떤 콘텐츠를 만들고 나누어줄 것인가’를 넘어 변화하는 삶의 지형 속에서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야 한다. ‘온라인 교수학습’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재구조화 속에서 교육의 본질을 재구조화하는 작업’이 절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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