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의 정치학

Posted by on Sep 10,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좋아요”의 메인 운영체제는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감성과 진영이다. 섣부른 ‘동의’와 ‘공감’은 동의되지 않는 지점을 감추고 공감될 수 없는 영역을 망각케 한다. 소통의 양이 증가될 수 있었던 것은 결을 지웠기 때문이다. 때로는 결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MIT 미디어 랩 – 엡스타인 스캔들

Posted by on Sep 8,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 No Comments

MIT 미디어 랩이 Jeffrey Epstein의 범죄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작지 않은 규모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뉴요커의 보도가 있은지 하루만에 MIT 미디어 랩의 디렉터인 Joi Ito가 교수직을 내놓고 사임했다. 흔히 ‘세계 최고의 미디어 연구기관’이라고 불리는 조직이 구역질나는 범죄를 용인하고 돈을 택했다는 점은 끔찍하게 징후적이다. 자본에 완전히 포섭된 엘리트기관은 과연 엘리트적일 수 있는가? 그 어떤 범죄도 돈으로 덮을 수 있다는 생각에 투항한 대학은 대학일 수 있는가? 아래 뉴요커와 가디언의 기사를 링크한다.

“New documents show that the M.I.T. Media Lab was aware of Epstein’s status as a convicted sex offender, and that Epstein directed contributions to the lab far exceeding the amounts M.I.T. has publicly admitted.

Update: On Saturday, less than a day after the publication of this story, Joi Ito, the director of the M.I.T. Media Lab, resigned from his position. “After giving the matter a great deal of thought over the past several days and weeks, I think that it is best that I resign as director of the media lab and as a professor and employee of the Institute, effective immediately,” Ito wrote in an internal e-mail. In a message to the M.I.T. community, L. Rafael Reif, the president of M.I.T., wrote, “Because the accusations in the story are extremely serious, they demand an immediate, thorough and independent investigation,” and announced that M.I.T.’s general counsel would engage an outside law firm to oversee that investigation.”

https://www.newyorker.com/news/news-desk/how-an-elite-university-research-center-concealed-its-relationship-with-jeffrey-epstein

““Third culture” was a perfect shield for pursuing entrepreneurial activities under the banner of intellectualism. Infinite networking with billionaires but also models and Hollywood stars; instant funding by philanthropists and venture capitalists moving in the same circles; bestselling books tied to skyrocketing speaking fees used as promotional materials for the author’s more substantial commercial activities, often run out of academia.

That someone like Jeffrey Epstein would take advantage of these networks to whitewash his crimes was almost inevitable. In a world where books function as brand extensions and are never actually read, it’s quite easy for a rich and glamorous charlatan of Epstein’s stature to fit in.”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9/sep/07/jeffrey-epstein-mit-funding-tech-intellectuals

학습법에서 학습하는 주체로

<단단한 영어공부>를 쓰고 나서 과분한 평도 듣지만 비판과 불만 또한 종종 접한다. 후자의 대표적인 내용은 “그래서 당장 어떻게 하라는 건지?”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시 실행가능한 학습법을 꼼꼼히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의 손을 떠난 글은 독자에 의해 해석되고 재창조된다. 그런 면에서 몇몇 분들이 실망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로서 전달하려고 했던 내용은 “남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말고 이러저러한 원칙 하에서 스스로 할 일을 만들어 가라”는 것이었다. 학습서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학습서를 써내려가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이를 대화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나: “그간의 학습서는 ‘이렇게 하면 된다’였어요.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쉽게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원칙은 이렇지만 결국 방향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하루하루 실행하는 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 독자: “그래서 당장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요? 이 책에는 그게 안 나와 있는데요. 실망스럽네요.”

어떤 면에서는 필자의 잘못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독자의 잘못이겠다. 내 책이 모든 이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으며 그럴 자격도 없음을 안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땅에 곤두박질친 이야기들이 안쓰러울 때가 있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어쩌면 <학습법> 카테고리로 <학습하는 주체>에 대한 책을 써낸 업보일지도 모르고.

#단단한영어공부

AI, 그리고 지식민주주의

과문한 탓인지 AI의 발전과 ‘지식 민주주의(knowledge democracy)’의 관계를 깊이있게 다룬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AI가 진화하면 수많은 지식 관련 업무가 자동화될 것이라는 예상이나 고도의 지식노동을 포함한 대부분의 직업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넘쳐나지만, 진보된 AI가 현존하는 지식수준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지식 단계에 따라 썰을 풀 수 있는 인공지능의 발전”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 당연히 양자역학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태반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지식을 1000단계로 나눈다면 0에 수렴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바라는 건 대충 이런 거다. AI가 충분히 발달했을 때 양자역학의 특정 개념을 1000가지 단계로 나누어 학습자의 수준과 흥미에 따라 ‘썰을 풀어내는’ 기능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 클락의 이야기처럼 충분히 진보된 AI라면 ‘마법처럼’ 수많은 개념을 엮어 재미나게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돈을 따라가는 법이다. 지식과 리터러시가 모두의 것이 되는 방향으로 기술이 개발되고 대규모 투자가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식의 공유는 가속화되겠지만 핵심 지식/알고리즘의 소유는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지닌 사람들의 특권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교육을 위한 AI의 발달 또한 기본적으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할 가능성이 높으며, 지식장의 근본적인 평등에 대한 관심은 ‘시늉’으로 남을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이것을 빈 껍데기 지식민주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줄 장밋빛 미래사회, 살기는 조금 편해지고 지식은 온 세상에 넘쳐나 모두의 손에 닿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이해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근본적 이해가 불가능함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냉소로 숨어들고, 적지 않은 이들이 ‘앎의 환상’에 빠져 ‘매트릭스의 삶’을 영위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끔 ‘몰라도 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공동체, 그리고 미디어가 필요하다. 모든 것에 대한 팩트체크를 할 수 없다면 나의 지향과 관점에 대한 방향체크가 필요하다. 하지만 점점 그게 어려워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팩트체크는 당파성이 지배하고 신뢰의 영역은 부족주의에 잠식된다. 계몽은 비웃음을 사고 사랑은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다양성에 대한 포용은 강조되지만 조금만 다른 언어를 써도 철저한 타자로 규정된다. AI가 이 시대를 넘어설 수 있을까? 나는 심히 회의적이다.

#삶을위한리터러시

권력과 희망

Posted by on Sep 7,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이들에겐 힘이 넘쳐나고, 힘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 와중에 어떻게라도 세상을 바꿔보려는 이들에겐 속절없는 분노가 배어든다. “힘을 내자”, “뭐든 해보자”는 말이 ‘민폐’가 되어버린 것은 그들이 모든 힘을 가져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권력의 비대칭은 희망을 사치로 만들고 일상의 토닥임마저 파괴해 버렸다. 참담한 날들이 계속되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힘없이, 희망없이, 응원없이, 중단없이 걷는 이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공부하는 삶, 그리고 돈

Posted by on Sep 6,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꼰대’스럽지만 요즘 공부를 하고 싶다는 후배/대학원생들에게 하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음… 조심스럽긴 하지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어요.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면 정말 정말 최소한의 돈만 있어도 인생이 괜찮은지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물론 ‘괜찮다’는 게 사람마다 다 다르겠죠.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분야가 결코 돈이 되질 않는다는 거예요. 돈을 벌 수 없다는 건 점점 더 자명한 현실이 될 거 같아요.

그래서 꼭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인생에서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면 이 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거예요. 선배로서 미안하고 또 무능력한 이야기지만 저도 처음 공부할 때에는 이런 점에 대해 깊이 고민하질 못했어요. 그런데 나와보니 현실이더라고요. 좀 웃긴 이야기지만 저 공부 그렇게 못하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거랑 관계 없이 팍팍한 현실을 피할 수는 없더라고요. 지금 버는 돈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다 놀라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ㅎㅎㅎ”

강사법 시행으로 시간강사 7800여 명이 일자리를 아예 잃었다고 합니다. 강의가 줄거나 겸임/초빙 등으로 전환한 사람들까지 하면 그 수가 엄청나겠죠. 교육부가 해고된 강사들을 위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생활을 지탱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책임을 져야 할 주체인 대학은 1-3년의 고용, 4대보험, 방학 중 약간의 임금 때문에 대학이 망할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강사법을 원흉으로 몰고 여론을 호도합니다. 그동안 말도 안되는 저임금의 노동에서 취한 천문학적 이득은 생각도 하지 않죠. 법이 만들어진 원인을 제공한 게 누구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절반의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또다시 살길을 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남는다고 해서 슬픔이 쉬이 가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후배들과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세요. 같이 연구하고 토론하면 좋겠어요. 응원합니다!’라고 웃으며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희망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희망을 버리는 것이 좀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임을 알지만 여전히 놓을 수 없는 생각이 있네요. 미련이겠지요.

책읽기, 세계, 그리고 실천

Posted by on Sep 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책읽기는 세계만큼이나 커다란 리허설 무대를 선사한다. (Reading gives us a rehearsal stage as big as the world.)”

예전에 봤던 “Why reading matters” (BBC) 의 한 구절이다 뜻을 새겨 풀어 써보면 이렇다.

1. 리허설은 실제 공연과 아주 많이 닮았다. 몰입해서 하면 실제 공연과 다를 바 없다.

2. 하지만 실제 공연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관객들과 함께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삶에 가 닿지는 않는다. 책읽기의 순간만큼은 개인적 경험이 지배한다.

3. 그렇다고 리허설 없이 실제 공연을 하려 드는 것도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다.

4. 그렇기에 제대로 된 무대에서 리허설을 해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모든 게 갖춰진 리허설 장소 싸게 대여해 드려요!” 라는 호객꾼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는 사기를 조심해야 한다. (각자의 경험에서 이런 호객꾼이 누굴 가리키는지 떠올려 보시기를.)

셰익스피어가 말한 세계라는 공연장에 나가기 위한 리허설 장소로서의 독서.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지만 삶과 실천의 준비 단계로서의 책읽기. 생각해 볼만한 메타포다.

이 시대의 책읽기는 어떤 세계로, 어떤 실천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가?

#삶을위한리터러시

합정-망원시대 막을 내리다

Posted by on Sep 2,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개강일,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 이사 준비를 끝냈다. 거실에는 책과 박스들이 즐비하다. 이사하고 짐풀고 정리하고 자리를 잡는 데까지 또 몇 주가 걸리겠지만 어쨌건 고비는 넘긴 듯하다. 지금 이 자리에 내일은 다른 이가 앉아 있겠지. 휙 하고 떠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세계는 평온하다.

돌아와 계획에 없던 결혼을 했고 합정동과 망원동에서 5년 여를 보냈다. 꽤 많은 시간강의를 했고, 5년 여 어머니의 말을 경청하고 기록했으며, 수년간의 영어교육/응용언어학 공부를 풀어낸 작은 책을 냈다. 논문쓰기 강의도 이 동네에서 기획되고 실행되었다. 종종 친구들과 학생들이 찾아와 주었고 길고양이들과 꽤나 가깝게 지냈다. 아쉬움은 남지만 내겐 과분한 시절이었다.

동네는 조금 번잡해졌고 상가가 주택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골목이 살아 있고 이것저것 볼 것도 많지만 소음은 언제나 큰 고민이었다. 세입자 신세, 선택할 여지는 적었지만 떠나기로 결정한 가장 큰 요인은 집값과 소음이었다. 그래도 떠날 때가 되니 시장의 단골 떡볶이집과 얼마 전부터 정을 붙인 구석 식당과 가끔 술떡을 사다 먹던 동네 떡집이 그리워질 것 같다. 가끔 들르던 주전부리 가게와 야쿠르트 아줌마도 보고 싶겠지. 그러고 보니 다 먹는 거구나.

가끔 옥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한 시간 넘게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지는 해는 가장 찬란한 순간을 포착하고 밤에 자리를 내준다. 이내 망각의 어둠으로 사라질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밤.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안녕, 망원동.
그간 고맙고 따뜻했어.
새로운 사람들도 잘 부탁해.

벨 훅스, 그리고 이론

Posted by on Aug 31, 2019 in 강의노트, 단상, 사회문화이론, 일상 | No Comments

이런 방식으로 이론을 이야기해 준 이는 없었다. 이론은 세계관이고 분석의 도구이며 변화의 방향이라고 말해주는 이는 있었지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고통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삶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그리하여 아픔을 떠나보내기 위해 이론을 찾아갔다는 말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이젠 그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론은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개념과 명제의 집합이지만 누군가에겐 고통을 줄이고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갈 힘을 주는 친구이기도 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하여 나와 세계는 어떻게 만나 변화하고 있는지.

“I came to theory because I was hurting—the pain within me was so intense that I could not go on living. I came to theory desperate, wanting to comprehend—to grasp what was happening around and within me. Most importantly, I wanted to make the hurt go away. I saw in theory then a location for healing.” – bell hooks

 

커뮤니티는 어떻게 교사의 발달을 중재하는가 (논문 출판)

[A new article] 방학에 처음으로 내러티브 논문을 한편 썼습니다. 대단하진 않지만 제겐 큰 의미가 있는 글이네요. 한국 응용언어학과 영어교육 지형에서 이런 내러티브가 출판되는 일이 그리 잦은 편은 아니죠. 여타의 인문사회과학 논문과도 결이 상당히 다르고요. 구체적으로는 제가 비원어민 작문교사로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준 커뮤니티의 역할을 고찰하는 내용입니다. 아래 초록과 서문 첫 부분을 읽으시고 더 읽어보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메시지 주세요. 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How a Nexus of Communities Mediates a Novice Writing Teacher: A Case of the Dialogically-Interpreted Narrative from the Sociocultural Perspective

Abstract

In this self-reflective narrative inquiry based on teaching journal entries and interpretive dialogues, I trace how a nexus of communities mediated my own development as a novice writing teacher when I first began teaching in another languaculture. Combining activity systems analysis and autoethnographic narrative analysis allowed me to better understand the roles and influences of the community in gradually transforming me from a deficient nonnative teacher to a crosscultural meaning-maker with multimodal affordances. Specifically, three types of interrelated communities were mediating my development, namely the co-working, the co-walking, and the co-orienting community. This inquiry revealed two significant lessons. First, my development as a multilingual writing teacher was a process of reconceptualizing the scope of communities that mediate me. Second, the support of these communities materialized when it met my multimodal, multilingual, and conceptual repertoire.

1. Introduction

How do nonnative teachers manage to live with the anxiety of teaching another language, which for many feels forever alien to them? How do these teachers survive the social stigma of inadequacy and the haunting agony of being judged based on the criteria they will never be able to meet however hard they may try?

There are different ways to deal with this seemingly insurmountable hurdle. Some may choose to bear the burden, swallowing the bitterness of ‘transgressing’ another world that permits only native speakers to inhabit. Others may rationalize their work by attaching different roles and values to native and nonnative teachers. However, there is an alternative, that is, to reinvent the meaning of language teaching itself. The current study demonstrates that narrative inquiry can be a powerful mediational tool in achieving the enterprise of reconceptualizing language pedagogy.

The Journal of Studies in Language 35.2, 237-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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