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포인트 잡감

수업에서 파워포인트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나의 말에 집중하길 원하는 마음에서인 듯하다.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교감하며 수업하길 원한다.

TED를 책임지고 있는 크리스 앤더슨의 말을 따르자면
강연에서 청중은
두 가지 인지적 아웃풋(cognitive output)을 접한다.
다시 말해 두 가지 채널을 통해 연사의 강연을 경험한다.
하나는 시각, 다른 하나는 청각이다.

파워포인트와 같은 비주얼이 없을 때
학생들의 집중력은 하나의 대상 즉 강사에게 맞추어진다.

하지만 파워포인트가 등장하는 순간
그들의 시선은 파워포인트로 향하고
귀로는 강사의 설명을 듣는다.
인지 채널이 갈라지는 것이다.

훌륭한 프리젠테이션이라면
이 두 채널의 정보가
완벽하게 (영어로는 seamlessly 정도?) 통합된다.
말과 슬라이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협력하며 더 훌륭한 프리젠테이션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슬라이드를 읽는다.
슬라이드의 정보와 강사의 말을 실시간으로 싱크하려 든다.

이런 경향은
텍스트로 가득한 슬라이드에서 극대화된다.
학생들이 슬라이드를 바쁘게 흝어보는 동안
선생의 말은 온전히 소화되지 못한다.
때로 슬라이드의 정보를 강사의 말 위에 놓는다.
두 가지 정보 채널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슬라이드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수업을 흘려 듣기도 한다.
가끔 연수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나면
“파워포인트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이 꼭 있다.
내 경험상 그분들이 파워포인트를 다시 보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면에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일은
할 말을 정하는 스크립팅과
슬라이드 만들기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해당 프리젠테이션의 특성을 파악하고
주어진 시간에
청중의 주의(attention)의 흐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프리젠테이션의 핵심 내용을
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것은
대본과 시각자료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 위에 청중의 주의를 배치하는 일이다.

디자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UI의 문제가 아니라 UX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이 단지 빌딩의 구조가 아닌
인간과 구조 ‘사이’의 인터랙션으로 이해되듯
프리젠테이션은 ‘전달’이 아닌 ‘수용’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슬라이드 없이 대단히 수업을 잘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만 학생들이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집중하여 이야기를 듣길 원하며
그러기 위해 그 이야기를 준비할 뿐.

결론은
적어도 나의 경우
슬라이드를 준비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준비하는 게 낫다고 본다.

On nativespeakerism

Native-speakerism is a powerful ideology machine that mass-produces unfairness, contempt, inferiority, and frustration. It ruthlessly divides native and nonnative speakers, veils the hard fact that we are all legitimate users of a certain language, and naturalizes sociocultural, economic biases against additional language learners.

Through this seldom-challenged mechanism, it effectively molds discrimination out of differences, mimics racism in placing the categorical value on an innate capacity, and colludes with the ‘sacred’ meritocracy by establishing native speaker-favored standards, qualifications, and market environments. Where native-speakerism prevails, foreign language learning functions as a viable tool for the old ruling strategy: divide and conquer.

So I remind myself that I do not need to say, “I perfectly understand what you mean by that. However, it is wrong: native speakers would not speak like that.” No, they’re not wrong. They are communicating in a fully legitimate way. Ultimately, the right to judging right and wrong lies in the interlocutors in situ, not in an idealized group of native speakers. However the myth of the all-mighty native speaker persists, mainly due to its role in perpetuating the sense of deficiency and illegitimacy on the part of language learners and ever invigorating the market value of native speakers.

#영어로쓰면거의안읽힘
#여기까지읽어주신분께감사를

Translanguaging, Composition, 그리고 영어교육

1. 내가 가장 즐기는 두 활동인 글쓰기와 음악 모두 composi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실 이 두 영역 뿐 아니라 미술 및 사진을 비롯한 예술 영역에서 composition이라는 말이 두루 쓰인다.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보다 복잡한 구조체를 만드는 활동을 통틀어 composi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2. 단어건 음표건 컷이건 공간이건  요소들이 함께 배치되는 데서 패턴이 생겨나고 패턴이 반복되고 중첩, 변주되면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추상적인 수준에서 글쓰기를 비롯한 예술창작 전반을 관통하는 단어가 composition 아닌가 싶다. (이 의미에 상응하는 우리말이 있을까? ‘구성’이라고 번역되긴 하지만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3. 일상에서 작문이라고 하면 대개 한국어 작문을 가리킨다. 영어로 쓸 경우는 영작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용례들의 특징은 작문행위가 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서는 하나의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4. 하지만 ‘구성composition’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글이 하나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협소하기 짝이 없다. 당장 시내의 간판들과 광고들만 봐도 다양한 언어가 어울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은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들이 일상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다. 도시의 언어경관은 분명 여러 언어로 구성된다.

5. 인간을 ‘한국어를 쓰는 존재’, ‘영어를 쓰는 존재’ 등의 틀에 가두지 않고 ‘의미를 만드는 존재’로 바라본다면 여러 언어를 섞어 쓰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전혀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겠으나, 특정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구절에 대해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도적인 구성의 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6. 예를 들어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글에 ‘아랫목’과 ‘고구마’, 그리고 ‘할머니’를 한국어로 쓸 수 있다. 필요하다면 각주를 통해 이 세 단어의 의미를 밝히겠지만, 본문에서 이들 단어를 계속해서 고집할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7. 응용언어학 분야에서 다언어를 활용한 담화 구성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 translanguaging 이 부상하고 있다. 언어 사이를 넘나들며 발화나 작문을 구성하는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10여 년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도 뿐 아니라 교육적 활용도 활발히 논의되는 중이다.

8. 한국 영어교육 상황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는 것은 금기다. 가급적 ‘영어로만 사고’해야 하고, 영어로만 말하고 써야 한다. 그래야 영어가 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존재는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섞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으며 수사적 효과 또한 노릴 수 있다. 조금 더 급진적인 시도를 한다면 기계번역의 힘을 빌어 수십개 언어로 시를 쓰거나 ‘팝아트적’ 글쓰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9. 그런 면에서 우리말을 벼려 더욱 견실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혼종성(hybridity)을 실험하려는 시도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10. 생각해 보면 영어야 말로 엄청난 짬뽕언어 아닌가!

#삶을위한리터러시 #translanguaging

강사법이 강사를 쫓아낸다?

적잖은 사람들이 “강사법 때문에 강사들이 대학에서 쫓겨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강사법의 내용과 법안의 역사, 합의주체 등을 살핀다면 저 표현은 철저히 대학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사들은 강사법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 책무를 저버리고 철저히 돈의 논리를 따라가는 일부 대학과 이를 간접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교육부가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

“강사법 때문에 강사들이 쫓겨난다”는 말은 “강사법이 강사를 쫓아낸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강사법을 둘러싼 주체들의 실질적 권력관계를 은폐하고 있다. 주어-목적어-동사로 이루어진 문장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다단한 사회적 맥락에서 이 세 자리에 적절한 요소를 배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결론은 이렇다. 강사법은 강사를 쫓아내지 않는다. 대학이 강사를 쫓아낸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비판담화분석

단단한 영어공부, 첫 인터뷰를 하다

지난 화요일, 처음으로 <단단한 영어공부> 인터뷰를 했다. 언론사도 블로거도 아니었다. 내 책을 읽은 한 고교생 독자였다.

졸업 프로젝트로 삶을 위한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다 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느냐 물었더니 ‘나만의 텃밭 가꾸기’ 같이 소박한 실천이나, 지역 연구 등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한다고 했다. 나와의 인터뷰도 학교에서 지정한 프로젝트 집중 준비기간을 활용해 진행하는 것이라고. 소수의 학교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내가 받은 고교 교육과는 참 많이 다르구나 싶었다.

그는 영어와 한국어 이외에 터키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터키로 대학을 진학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이 계획에 상당히 호의적이신데 도리어 터키어를 가르치시는 원어민 선생님이 터키의 불안한 정치상황 때문에 괜찮겠느냐고 걱정해 주시는 상황이라고 했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좀더 잘 준비했어야 했는데’라고 수줍은 듯 질문지를 건넸다. 인터뷰 질문을 읽어나가면서 고민과 숙고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한 질문에 두서없는 대답이 한 시간 가량 이어졌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제 이야기만 듣지 마시고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시면 좋겠다”고 답했다. 소위 ‘전문가’의 이야기도 좋지만 그게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반대로 어떤 면에서 적용 불가능하며 비판받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인터뷰로 출출해진 우린 함께 멸치국수를 먹었다.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는 터키어 수업을 받으러 떠났고 나는 다음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돌아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차분하고도 단단하게 인터뷰 질문을 던지던 그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그의 삶을 위한 외국어 공부와 더 넓은 세상으로의 도약을 응원한다.

#단단한영어공부 #삶을위한영어공부

뿌리뽑힌 상호텍스트성

‘뿌리뽑힌 상호텍스트성(uprooted intertextuality)’

1. 글은 배후에는 언제나 맥락이 있다. 맥락은 관계성과 역사성을 모두 포함하며 권력의 플랫폼 위에서 작동한다. 예외는 없다.

2. 미디어의 특성상 단문과 카드뉴스, 적지 않은 소셜미디어 포스팅은 맥락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권력의 문제는 피해가기 일쑤다. 결국 맥락이 사라진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을 채운다.

3.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맥락을 아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개념체계는 맥락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A라는 포스트의 주요 맥락은 B가 제공하고, B라는 텍스트의 맥락은 C와 D가 제공한다. 이렇게 텍스트는 서로서로의 맥락이 되어 서로를 강화한다. 삶으로 가는 길은 종종 희미하거나 험난하다.

4. 결국 삶이 맥락이 된 텍스트는 줄어들고 텍스트가 맥락이 된 텍스트가 증가한다. 인간의 얼굴과 몸, 관계가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공유된 글”이, “내가 좋아하는 ‘인플루언서’의 포스팅”이 맥락의 자리에 들어선다.

5. 이렇게 ‘뿌리뽑힌 상호텍스트성(uprooted intertextuality)으로 구성된 텍스트의 매트릭스가 향하는 길은 명확하다. 삶의 질서와 유리된 텍스트만의 질서가 구축되는 것. 그 안에서 새로운 권력과 관계가 자라나는 것. 빨간약과 파란약을 선택할 기회마저 봉쇄당하는 것.

5. 가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곤 하지만 여전히 그 공간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물론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이라고 이름붙인 대부분의 텍스트는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발음에 대한 태도 그리고 정체성

You may not be satisfied with and want to improve someone’s pronunciation in educational contexts. However, you don’t have any right whatsoever to make fun of other people’s accents: it would be to despise their sociocultural history and, sometimes, even biological characteristics. Respecting someone’s accent is part of respecting the person.

외모를 놀리는 것이 문제이듯 발음을 놀리는 것 또한 문제다. 우리는 타인의 발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마음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 된다. 이점은 모국어의 흔적을 갖게 되는 외국어학습에서 특히 중요하다. 각자는 세상에서 유일한 각자만의 액센트가 있고 이는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존중받아야 한다. #삶을위한영어공부 #언어기반차별

일상스케치

Posted by on May 10, 2019 in 단상,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방학은 집필로, 이후에는 수업으로 달려왔더니 체력이 간당간당하다. 허리가 아프기 시작한 지 벌써 만 1년이 되었다. 뭐 이 정도면 버틸만 한데 버거움이 훅하고 들어올 때가 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현대의학의 힘과 선한 사람들의 기운을 엮어내며 하루하루를 지난다.

2. 특강이나 독자와의 만남은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데 일회성이라는 점이 좀 아쉽다. 강의로 먹고 살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 한 학기 단위. 단발성 강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꾸 사춘기 고독소년의 감성이 들러붙는다.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3. 갈수록 win-win 보다는 lose-lose하고 weep-weep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해진다. 사실 윈윈은 비즈니스로 맺어진 관계에서 쓰이곤 하는데, 이 나이 먹고도 ‘비즈니스’라는 말 자체가 생경하다. 자본주의는 익숙한데 비즈니스가 멀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는 어딘가 뻥 뚫려 있는 멍청이거나 삐딱투성이이 바보가 맞는 것 같다.

4.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나를 왜”라고 묻지는 않는다. 그는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로 나를 미워할 것이고, 나는 딱 그만큼의 ‘타당한’ 의지로 그 이유에 대한 무관심을 견지할 것이다. 그의 증오와 나의 무관심이 만나지 않는 만큼의 평온함은 허락된 삶이기를 빈다.

5. 공저와 단독저서 몇 권이 있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여전히 낯설다. 성과 최종학위를 붙여 불러주는 이의 호의는 알지만 그게 영 내 옷 같지 않다. “OOO 선생님”이나 “OO님” 정도가 좋은 것 같다. 작가가 되기에 나의 글은 한없이 어설프고 학위로 나를 부르는 것은 묘한 비자발적 투항의 느낌을 자아낸다. 내 마음대로 불리고 싶다는 것 또한 욕심이겠으나, 호칭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인간이 가진 능력 중 꽤 놀랍다고 생각하는 것 둘.

1. 자기를 쪼갤 수 있다. 나와 내가 대화할 수도 있고, 나와 다툴 수도 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화해하기도 하고, 둘이 토론을 할 수도 있다. I를 I-me로 나눌 수 있기에, 추가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작가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되어 대화하는 사람이다.

2. “같다”를 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줄리엣은 태양이 아니지만 태양이고, 내 마음은 호수가 아니지만 호수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동네이면서 우주이고, 인생은 여정이고 항해이며 게임이자 전쟁이다. 분명 “이다”로 표현되는 세계이지만 우리는 안다. 인생은 항해는 아니라는 것을.

전자가 마음의 분신술이라면 후자는 세계를 믹싱하는 능력이다.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세계를 순식간에 통합시켜 볼 수 있다는 건 꽤나 멋진 능력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리터러시 그리고 세대간 소통

인터넷과 멀티미디어가 휩쓰는 세상의 리터러시는 분명 전통적인 활자 중심의 리터러시와는 다르다. 프린트에 중심을 두고 공부를 해온 나같은 사람들에겐 지금의 새로운 리터러시 트렌드가 당혹스럽고 의심스러우며 위험하게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진단은 단지 리터러시 모드의 변화 자체에서 연유하지 않는다. 속도라는 변수가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상황은 리터러시 지형의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다. 진부한 수사적 구호로서의 ‘위기가 곧 기회’라는 뜻이 아니다. 전통이 순식간에 새로움에 잠식당할 위기이지만, 전통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가운데 새로움과 결합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의 리터러시 트렌드를 결함을 가진(deficient) 것으로 판단하는 관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작업은 기성세대의 관점의 변화라기 보다는 교육과 평가체제의 개혁, 새로운 리터러시가 성장할 수 있는 구조의 창출이다. 생각해 보자. 기존의 방식으로 평가한다고 뉴미디어에 뿌리박은 새로운 리터러시의 성장을 막을 수 있을까? 기존의 체제를 수호함으로 리터러시의 생태계 변화를 막아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도리어 새로운 세대 전체가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는 ‘제스처’를 보내며 자신들의 세계를 더욱 공고히 구축할 것이다. 그럴 때 남는 것은 전통적 리터러시의 더욱 빠른 사망과 새로운 리터러시의 조용한 ‘창궐’일 뿐이다. ‘승자’는 당연히 새로운 세대이다. 결국 “부수적 피해”는 늙어가는 세대들에게 전가될 공산이 크다. 새로움에 귀기울이지 않는 세대에게 다음 세대는 말걸기를 그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세대간 소통에 있어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문화, 미디어, 리터러시, 세대간 커뮤니케이션 등을 떼어놓고 생각해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미디어리터러시 #듣는다는것

Lo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