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한계에 관하여

Posted by on Dec 16,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집필 | No Comments

1. 공감을 강조하는 담론에 대해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공감이 갖는 본래적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2.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진정한 공감’은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경험이라는 것이 특정한 몸이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특정한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해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3. 이를 하나하나 풀면 이렇다.

(1)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2) 특정 경험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얻는다고 해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3) 특정 사건과 상황을 깊이 이해한다고 해서 당사자가 평생 쌓아온 이해와 해석의 방식을 체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 즉, 우리는 ‘누군가의 처지와 경험’을 상상(imagine)하는 것이지 경험(experience)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언어(상황을 상상해서 나오는 진술)와 상황 내에서의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과 경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5. 문법용어를 빌리자면 공감은 기본적으로 가정법(subjunctive mood)이고, 경험은 과거시제이자 현재완료(진행형)이다. 공감하는 이는 If 절을 피할 수 없고, 동사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If I were you, I would … 에서 I는 you가 아니며 ‘were’는 ‘am’이 아니고, ‘would’는 철저히 생각의 세계에 속한다. If절이 아무리 정교하게 짜여진다고 해도 가정과 추측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올 수 없는 것이다.

6. 그렇다고 해서 공감을 무조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한계를 온전히 넘어설 수는 없지만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당 개인의 경험을 ‘그 사람 고유의 경험’으로 봄과 동시에 구조적 요인들의 분출로 보는 것이다.

7. 다시 말해 해당 경험을 순수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요인들이 개인을 통해 세상에 뛰쳐나온 것으로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고유한 경험은 보편적 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고, 보편성에 대한 고민에 기반한 실천을 통해 해당 경험과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온전히 공감할 수 없을지라도 그 경험의 기반을 변화시킬 실천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8. 공감의 언어는 과대평가되었다. 더욱 가치있는 일은 연대의 손길이다. 매끄럽고 완벽한 말보다는 말없이 함께 떠날 수 있는 꾸준하고 투박한 발걸음이 소중하다.

9. 결국 공감의 중요성은 응당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히 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와 닮았다.

10. 알 수 없어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 있다. 다 알 수 없다고 해도 함께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함께 궁리하는 가운데 우리 ‘사이’를, 우리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이해하는 척에서 끝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닫힌 이해가 아닌 열린 실천, 이것이 공감이 지향해야 할 바 아닐까.

기말의 ‘폭력’

Posted by on Dec 11, 2019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학점을 채워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기말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학교가 신체적/심리적 폭력에 가까운 부담을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수 개개인의 가혹함이나 학생 하나하나의 욕심에서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평가를 위한 시험과 과제의 구조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숨가쁘게 휘몰아치는 일정을 이악물고 헤쳐나가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대학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집요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 이 모습이 정말 최선일까?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소셜미디어, 동네, 그리고 태깅

Posted by on Nov 26,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소셜미디어의 사용 패턴이 많이 변했지만 그중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소위 ‘멘션(mention)’의 사용법이다. 2008-2009년 시기트위터에서는 누군가를 ‘소환’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운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길을 걷는데 뒤에서 반가운 친구가 ‘김성우!’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달까.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소환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거 좀 봐바바’하면서 링크나 이미지를 공유하는 일 또한 일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트위터는 ‘동네’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억을 너무 우려먹는 것 같지만) 당시 진행했던 ‘떼창’ 프로젝트는 소셜미디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남았고, 덕분에 공중파도 살짝 탔다. 놀랍게도 그때 맺은 인연 중 적지 않은 분들과 페이스북 친구로 지내고 있다.

지금은 누군가를 호출하는 일이 상당히 조심스러워졌다. 트위터에서의 멘션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피하게 되었고, 페이스북에서 누군가를 태깅하려고 할 때는 ‘이 사람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짐짓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갑작스런 호출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정도로 친한가 가늠해보게 되는 것이다. 호출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누군가의 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려지는 게 탐탁치 않다. 그룹 초대도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강제로 그룹 멤버로 추가했다가는 블락/언팔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오래 전 치기 어린 초초보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온라인 공연을 몇 차례 가졌다. 추운 겨울 밤 김광석과 유재하의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스트리밍 링크를 남기고 사람들을 태깅으로 초대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못난 음악을 들어주었고, 따스한 감상을 남겨주었고,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고 위로했다. 이제 소셜미디어상에 그런 동네는 사라지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느낌이다. 트위터에 가끔 놀러가긴 하지만 이젠 정이 가지 않는다. 대책없는 향수는 아니고 그냥 그렇게 바뀌어 왔다는 거다.

당시 종종 연주했던 ‘잊혀지는 것’을 슬쩍 남겨놓으며, 마음 속으로 꽤나 많은 이름을 태깅한다. 고마운 이들이 이 음악과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던바의 수, 정보의 양, 그리고 탈진실

Posted by on Nov 21,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은 소통을 증가시켰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서 혐오하고 공격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이제 우리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든 분노하고 상처받을 수 있다. 편재하는 고통과 혐오(ubiquitous suffering and hatred)의 시대. 사람들이 벽을 쌓고 오로지 자기편만을 불러들이는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상처받기 전에 믿음을 진실로 만드는 ‘선제공격’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지금, ‘탈-진실’은 ‘탈-상처’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암울하다.

가끔은 개인이 사회적인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이야기하는 ‘던바의 수’와 같이 심리적인 안녕을 유지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와 양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 뇌를 찔러대기 시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발동하는 것이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그 학생의 질문

“선생님께서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요. 말씀하시는 영어공부의 방법이 살아오신 것과 모순되는 점이 있지 않나요?”

오늘 강연에서 한 고등학생이 한 질문입니다. 제가 중고교 시절 공부했던 것과 <단단한 영어공부>에서 말하는 바 사이에 사뭇 큰 괴리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요. 저도 성적 잘 받고 진학 잘 하려고 공부를 했으니까요. 제 삶의 전체 궤적을 보면 모순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삶에서 한결같은 일관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자신이 겪은 일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겪었던 영어공부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이후에 영어교육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깨달은 바를 나누려고 책을 쓴 것입니다. 지금 학교 생활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게 있다면 잊지 마시길 바라요.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학생의 묵직한 질문에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 답변이 학생에게 만족스러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모순들을. 결코 잊혀서는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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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이렇게 하지만
너무 자주 잊고 사네요.

학생과의 대화를 잊지 않으려
기차간에서 글을 남겨 놓습니다.

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54: 환유(Metonymy)의 세계 (2)

Posted by on Nov 17, 2019 in 단상, 말에 관하여, 인지언어학 | No Comments

환유(metonymy)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유(metaphor)와 비교, 대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유와 은유는 비유적 언어(figurative language)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인지언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언어는 환유와 은유를 통해 문자 그대로의 세계를 넘어 복잡다단한 비유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인지언어학의 흐름은 환유와 은유가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합니다만, 전형적인 환유와 은유는 생성 메커니즘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은유는 두 영역간의 사상에 기반한다

먼저 은유를 봅시다. 은유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영역(domain)과 그들 사이의 사상(mapping)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최근 방영되고 있는 <동백꽃 필 무렵>의 등장인물 ‘용식이’에 대해 한 시청자가 “용식이는 호랑이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이는 전형적인 은유의 구조인 “A는 B이다”를 취하고 있습니다(아마도 가장 유명한 A=B 은유는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은 호수요’겠죠).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용식이는 호랑이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이 문장은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이 경우 대략 다음의 세 요소가 사상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종열, 2003, 109쪽)

(1) 호랑이 -> 용식이
(2) 호랑이의 용맹 -> 용식이의 용맹
(3) 호랑이와 용맹간의 관계 -> 용식이와 용맹간의 관계

“용식이는 호랑이다.”라는 진술에서 동원되는 영역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호랑이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용식이의 영역입니다. 이 두 영역은 각각 근원영역(source domain)과 목표영역(target domain)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서 ‘근원’과 ‘목표’라는 말을 살필 필요가 있는데, 근원영역은 화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즉 타겟이 되는 목표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나무나 호수, 바다 등과 연결시킨다면, 목표영역(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람이고, 근원영역(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영역)은 나무, 호수, 바다 등입니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중요한 사실은 은유가 두 개의 영역 간의 관계설정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용식이와 호랑이는 각각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하지만, 위의 예에서 ‘용맹함’이라는 특징을 통해 연결되지요. 즉, “용식이는 용맹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용식이는 호랑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용맹함”에 간접적으로 접근(access)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호랑이’라는 라는 단어가 문장에 등장하면서 단지 ‘용맹함’이라는 추상적 특징 뿐 아니라 호랑이의 여러 특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말하고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호랑이의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고, 우렁찬 호랑이 소리가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서는 호랑이의 여타 특성들이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환유 생성의 기본 원리는 인접성(contiguity)

이렇게 은유가 인지적으로 구별되는 두 영역 간의 사상을 기반으로 생성됨에 반해 환유는 개념적으로 인접한 개체들을 엮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지난 회에서 살펴본 아래 두 문장을 봅시다.

a. “버스 파업중이야. 지하철 타고 가.“
b. “빨간 모자 너무 시끄럽다. 가서 한마디 할까?“

a의 경우 ‘버스’는 ‘버스 운수 노동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둘은 개념적으로 떼어내기 힘듭니다. 실제로 운수노동자들은 버스를 운전석에 앉아 일하면서 생계를 꾸리기 때문이죠. 아래 ‘빨간 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시끄럽게 떠드는 건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지만, 그 사람과 모자는 공간적으로 인접해 있습니다. 이같은 공간적 인접은 환유 생성의 기본 원리 중 하나입니다.

공간적 인접성 외에 시간적 인접성 또한 환유 생산의 주요 원리가 됩니다. 다음 두 예를 보시죠.

c. 3년이 흘러 소설가는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d. 테잎 커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건물이 다 올라갔네?

c에서는 ‘마침표를 찍었다’는 표현이 ‘소설을 완성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편집을 거치면서 여러 번 수정되었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시점과 소설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시점은 매우 가깝습니다. d에서는 ‘테잎 커팅’이 건물을 짓기 시작한 시기를 대표합니다. 유명 인사들이 테잎을 자르는 기념식을 한 것으로 건축의 시작을 표현한 것인데, 이 경우도 시간적 인접성이 환유 생성의 기본 원리로 사용되었습니다.

환유가 기본적으로 인접성에 기반한다는 주장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Roman Jacobson을 거쳐 최근 Peirsman와 Geeraerts에 의해 정교화되었습니다 (Littlemore, 2015, p. 14). 이들에 따르면 은유는 유사성(similarity)에 기반을 두는 반면 환유는 인접성에 기반합니다. ‘Love is a journey.’는 사랑의 과정과 여행의 과정이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에 기반하고 있는 은유임에 반해, ‘We need new brains.“는 특정인과 뇌가 인접해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 환유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다양다종한 비유언어를 모두 설명해내진 못하지만 비유를 설명하는 종래의 이론들에서 가장 강력한 설명원리로 제시된 바 있습니다.

<참고문헌>
이종렬. (2003). <비유와 인지>. 서울:한국문화사
Littlemore, J. (2015). Metonymy: Hidden shortcuts in language, thought and commun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덧.

2013년 연재 시작. 한 해에 여덟 개의 원고. 이번 학기에도 예외 없이 네 개의 이야기를 송고했다. 원래는 50개 정도가 되면 책으로 묶을 준비를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쓰다 보니 수년 간의 연재 중 1/3 정도는 울퉁불퉁하고 부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어교사 뿐 아니라 ‘영어와 사고’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원고로 발전시키고 싶다. 아마도 내년 여름이면 본격적으로 작업이 가능할 것 같다.

#인지언어학이야기 #영어와사고

반 발짝 나아가기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썼던 문장들을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강해졌다.

아니 실제로 그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세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 번째는 물론
내 공부의 부족이다.
먹고산다는 핑계로
깊게 공부하기 보다는
얕은 지식을 꿰어 강연을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게으르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강사와 연구자 사이에서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를 본다.

내 삶의 조건들이 못마땅하기도 하고
괜한 비통함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안다.
결국 공부를 지속하는 것은
오롯이 내 책임이라는 것을.

두 번째는,
현실의 완고함이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해오던
‘삶을 위한 영어공부’나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이루기 위해
현실에서 아직 갈 길이 머니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영어교육과
리터러시 교육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 듯하다.

목요일 성미산 학부모 강의 후 접했던
가장 뼈아픈 반응은 이것이었다.

“말씀하시는 방법이 참 좋은데,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을 찾을 수가 없어요.”

학원이든 과외든
삶을 중심에 두고 가르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는 말씀이셨다.

입시도, 내신성적도
학생에게는 중요한 삶의 일부이고
시장은 그것을 중심으로 자원과 전략을
배치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렇기에 더더욱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이지만
끈질기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 번째는,
경청의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응용언어학/영어교육 연구자에게
지속적으로 소통할 ‘현장’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일 것이다.

학생이건 학부모건 교사건
아니면 일반 학습자이건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누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뭔가 질러보려고 한다.
방학때부터 학부모님들과
삶과 교육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어 보려고
이런 저런 궁리중이다.

나의 경험과 지식이
그들의 삶과 만나
또다른 삶이, 실천이, 깨달음이 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쳇바퀴 돌듯 쫓기는 일상이지만
사유와 실천에 있어서는 반발짝이나마 나아가고 싶다.

내 힘으로는 도무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해 주시겠다는 분들이 있으니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큰 일이 아니면 어떤가.
서로의 삶으로 인해
아주 조금이나마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씨익 웃으며
‘이게 사는 거지’라고
중얼거릴 수 있다면.

세대론 유감

Posted by on Nov 15, 2019 in 단상,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여러 세대론이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

(1) 어느 세대나 ‘이상한’ 사람들이 일정비율로 존재한다. 해당 세대 내의 권력과 자본의 배분은 개개인의 성품을 압도하는 경향을 만들어낸다.(구조와 시스템의 힘)

(2) 글을 읽는 사람이 누구이든 주변에 해당 묘사에 맞는 사람들이 꼭 있다. 세대론 설명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이 ‘플레이된다.’ (확증편향)

(3) 세대는 역사의 흐름을 어느정도 인위적으로 잘라낸 단위이다. 인위적으로 잘라내는 행위는 본질화(essentialization)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본질화된 묘사는 ‘깔끔하게 핵심을 짚기에’, 설명력을 갖춘 이론의 아우라를 지니게 된다. (‘론’의 위력)

이에 더해 요즘들어 우려하는 것은 다른 세대를 타자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 않나 하는 점이다. 세대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강력한 설명기제로 삼을 때 세계는 더 깊이 분열된다. 말을 거는 세대론이 아니라 침묵을 요구하는 세대론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영어로 논문쓰기 초청강연 후기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초청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무사히 마쳤다. 30-40명 정도의 인원을 예상했는데 거의 150명이 왔다. 대학원생들에게 영어논문쓰기가 꽤나 큰 관심사임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한 대학에서 영어논문쓰기 강의를 열었을 때 대학원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적지 않은 분들이 논문에 대한 이해를 대학원 필수과정으로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다. 하지만 강의의 수명은 2년을 넘지 못했다. 강의를 열어주신 교수님 개인의견을 넘어 단과대학 차원의 정규과목 조정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비정규직 교수로서 오래 일을 하는 것이 학교로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논문쓰기를 도제식으로 배운 선생님들은 ‘많이 읽고 많이 쓰면 된다’, ‘피드백을 잘 따라오라’ 정도의 수준에서 논문지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도 충분히 논문을 써내고 학계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성공’의 예가 해당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논문을 읽고 쓰는 훈련의 기회가 체계적으로 주어질 때 대학원생들의 잠재력이 더욱 빠르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학술정보원 팀장님은 강의평가에서 후속강의를 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지만 다시 강의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꼭 내 강의가 아니더라도 대학원의 학술리터러시 교육이 좀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길, 대학이 진짜 돈을 써야 할 곳에 쓰기를 바란다.

#영어로논문쓰기 #학술리터러시

뭉크의 ‘절규’가 말하는 것

Posted by on Nov 10, 2019 in 단상, 링크, 삶을위한리터러시, 일상 | No Comments

기사의 내용은 현시대를 꽤나 흥미롭게 보여주는 유비다. 우리는 <절규>의 인물이 비명을 지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비명소리를 듣고 공포와 근심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항상 주의해야 한다. 정작 소리를 질러대는 건 우리이고, 절규하는 이는 온갖 비명에 겁먹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I was walking along the road with two friends – the sun was setting – suddenly the sky turned blood red – I paused, feeling exhausted, and leaned on the fence – there was blood and tongues of fire above the blue-black fjord and the city – my friends walked on, and I stood there trembling with anxiety – and I sensed an infinite scream passing through nature.”

https://qz.com/1577796/the-figure-in-edvard-munchs-the-scream-isnt-actually-screa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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