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육 투 트랙 전공과정

돌아보면 영어교육 전공과목을 들으며 강독을 해본 적이 없다. 다양한 이론이 응축되어 탄생한 교재를 다시 요약하여 공부하다 보니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느낌만 남았달까. 이에 비해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음미해야만 했던 몇몇 문학과목에서는 갑갑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사범대학의 교과교육과목은 “현장”에 대한 관심을 전면에 놓는 추세다. 발표와 토론 등의 방식 또한 종종 활용된다. 이는 양날의 검이다. 교육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만 이론적 엄밀성과 학문적 깊이를 희생시키는 결과 또한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범대 영어교육과의 교과교육과정을 두 트랙으로 재편하였으면 한다. (사범대학 내 타전공 또한 비슷한 처지일 터이나 필자가 알고 있는 언어교육영역에 한정하여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는 개념적 토대를 닦는 트랙으로, 언어학, 심리학, 인지과학, 사회학, 인류학 등의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 통해 ‘언어교육학’이라는 응용분야의 뿌리를 이해한다.

둘째는 한국사회와 영어교육 트랙이다.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의 현 교육환경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교과교육방법을 연구한다. 해외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수정하고 재맥락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연구’라는 표현을 썼다.

나아가 대학원 수준에서는 이론강독 수업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특히 방법론 관련 강좌의 강화가 시급해 보인다. 필자 또한 주요 논문들을 꼼꼼히 읽어내려가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이론강독이 가능한 학교에서 얼마나 더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문장

Posted by on Jun 5, 2017 in 단상, 일상 | No Comments

밤새 얕은 잠 속에서 뭔가를 계속 썼다. 쓴 것을 모두 다 버리고 딱 한 문장을 남겼다. 그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시 아침. 애를 써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남은 것은 지독한 아쉬움, 휴식 후의 피로감. 그리고 뭔가 나쁘지 않은 걸 쓰긴 했다는, 몇 분 되지 않아 화석이 되어버린 기억.

꿈은 때로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아니 현실은 종종 무서울 정도로 꿈같다 해야 할까.

재귀대명사의 탈출

Posted by on May 30,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언어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잡생각) 일반적으로 myself, herself, himself 등 영어의 재귀대명사는 짝을 이룰 때만 허용된다. 문장에 재귀대명사와 연결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재귀대명사 홀로 쓰이는 예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an effort from John, Stephanie, and myself.” 같은 식의 용례 말이다.

이들은 ‘재귀(reflexive, 자신을 반영함, 자기로 돌아감)’라는 정의에서 탈출하고 있는 중이다. 자유롭지만 돌아갈 자신(self)이 없는 자신들은 본질과 현상의 구별이 사라진 시대를 닮았다. 기준점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물론 ‘진정한 나’ 따위는 없지만 가끔 대면할 ‘나’를 갖는다는 게 나쁘진 않을 것이다.

난 아직 모르잖아요~

Posted by on May 29,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변변찮은 연주를 마음으로 품어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작은 음악회를 두 번이나 했었죠. 제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관객 요청 리사이틀’이었습니다.

처음 모였던 곳은 합정동의 작은 연습실.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10명 남짓 다닥 다닥 붙어 앉을 정도의 아담한 공간이었습니다. 이전 집과 지금 집 딱 중간에 그 연습실이 있었다는 걸 최근에야 알고 놀랐습니다. 연습실은 사라졌지만 그 즈음 녹음한 곡들은 아직 남아 있네요. 그마저 언제 흩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참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

사람, 교육개혁의 시작

Posted by on May 29, 2017 in 강의노트, 단상 | No Comments

학생들이 학교에서 가장 살아있는 때는 언제입니까? 역설적이게도 쉬는시간과 점심시간, 학교를 나설 때입니다. 교사들이 살맛나는 건 언제인가요? 쑥쑥 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번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때 아닐까 합니다. ‘4차산업혁명’ 같은 외부/미래가 아니라 ‘학생과 선생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라는 내부/현재에서 출발하는 교육개혁만이 살아남습니다. 학교를 그 무엇에 대비하는 도구로 파악하는 순간 개혁은 좌초하게 되죠. 주체를 배제한 채 내용을 손보는 우매함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간강사의 시간

Posted by on May 27, 2017 in 단상, 링크 | No Comments

소득세를 신고할 때마다 살짝 우울해집니다. 작년 한 해 총소득이 사회생활 첫해 연봉과 비슷하더군요. 20년 가까이 월급이 안 오른 셈이죠. 저는 시간강사 중에서 형편이 좋은 편입니다.

시간강사에게는 임노동의 단위시간만 있을 뿐, 경험과 전문성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기말, 또다시 시지푸스의 절망이 기다리고 있지요. 끝없는 시간의 리셋 속에서 삶의 도도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우리를 응원합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요.

노 룩 패스 (No look pass)

Posted by on May 26,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어떤 인간이 ‘노룩패스’로 짐을 다른 인간에게 넘겼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는 당당했고,
바퀴는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러웠고,
넘겨받은 이는 “평소 자상한 편”이라는 말을 남겼다.

처음엔 웃었다.
재치 넘치는 패러디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의원’이나 ‘수행원’,
지위나 호칭 따위는 걷어치우고
상대의 얼굴을 봄(to look)이
사람 대접의 기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많이
슬펐다.

화가 났다.

우리 사회는 성소수자의 고통과 좌절, 아픔과 분노, 무엇보다 존재와 대면하며 정책을 집행하고 있나? 학생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살피며 교실을, 교육과정을, 평가와 입시를 만들어가고 있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수십 일 곡기를 끊어야 하는 노동자들, 그저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위해 수년을 싸워야 하는 장애인들은 여전히 얼굴없는 존재 아닌가?

“노룩패스”는 그저 개념없는 정치인의 우스꽝스런 모습일까? 상대의 얼굴에 관심이 없는 행위들을 응축한 캐리커처는 아니었을까?

이 사회는 거대한 노룩패스의 경연장 아닌가 말이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는 순간
자신의 얼굴도 사라진다.

대화의 성립조건

Posted by on May 23, 2017 in 강의노트, 말에 관하여, 수업자료 | No Comments

말은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다. 따라서 말은 화자에게서 청자에게로 향한다. 여기에서 “화자—말—>청자” 도식이 나온다. 여기까지가 커뮤니케이션 개론에서 들을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의 말은 언제나 양방향으로 달린다. 생각이 언어를 통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양날의 검이 된다. 단어 하나 하나는 단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를 규정한다. 단순히 정보의 매개가 아니라 정체성과 정치성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말을 다듬고 또 다듬는 사람들은 안다. 말은 짜냄(expression)이면서 누름(suppression)이고, 전달(delivery)이면서 성찰(reflection)이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던지는 말은 언제나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때로는 더 빠르고 강하고 날카롭게.

대화자는 말하는 동시에 듣는 주체여야 한다. 따라서 두 사람간의 대화에서 청자는 늘 둘이어야 한다. 이것이 대화의 성립조건이다.

외국인 유학생들의 고충

Posted by on May 22,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이리 저리 강의를 다니다 보니 외국인 학생의 증가세가 확연히 느껴진다. 중국 학생들이 가장 많고 몽골이나 동남아 국가들에서 온 학생들도 꽤 된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엔 무리가 없으나 전문지식에 대한 논의를 따라오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다 보니 시험도 과제도 최하위를 면치 못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말하기 수준이 어느 정도 된다 해도 글쓰기에 익숙한 편은 못된다. 하지만 전문지식을 한국어와 영어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나같은 교수자는 과제와 시험의 언어로 한국어/영어 옵션 외에는 줄 수가 없다. 다른 교수자들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대학평가에서 국제화 지표의 중요성, 유학생 유치를 통한 대학재원 마련 등의 요인이 외국인 학생의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이런 동인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언어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학생들을 무더기로 받는 것은 대학의 책임 방기로 밖에 볼 수 없다. 외국인 유학생들이 겪고 있는 언어적, 사회문화적 고충에 관한 조사, 이에 기반한 실질적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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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아래 Kisang Kim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우리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으로 유학가면 당연히 그 나라 언어부터 익히고 시작하쟎아요? 근데 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해외 유학생들이 한국어를 못 하는 거에 대한 고민을 더 먼저 할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에 오는 유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기준에 전혀 못미친다는 점은 두고 두고 문제가 될 듯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슈가 있습니다. (1) 선발 과정에서 요구하는 한국어 능력 기준 그리고 (2) 입학 후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 제공.

현재 상황에서 (1)의 한국어 능력 기준을 상향조정하고, (2)를 좀더 체계적으로 정비해야 합니다. 북미지역의 종합대학 다수가 ESL 프로그램을 체계화한 것처럼 말이죠. 물론 저의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주장이니 좀더 체계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오직 서로의 상처에 입맞추느니”

Posted by on May 21, 2017 in 단상, 말에 관하여 | No Comments

개개인은 고유한 존재입니다. 서로 비슷해 보여도 또 많이 다르죠. 그래서 ‘우리’라는 표현은 늘 양날의 검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남 이상의 남’이지요.

오프라인도 그렇지만 소셜미디어에서의 관계를 미화하지도 폄하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다만 최근의 격렬한 논쟁 중 일부에는 아래와 같은 관계가 자리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논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의 비판은 모든 시민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패거리’를 전제로, 깎아내리기를 과정으로, 피아식별을 목표로 하는 논쟁에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말을 거는 줄 알았는데 암구호를 묻는 ‘논쟁’은 그저 패싸움일 뿐이니까요.

일관된 논리와 객관적인 데이터를 확보하는 능력,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함께 발딛고 있는 일상과 닮은 꼴의 가치관, 무엇보다 추스리지 못한 상처, 상처들을 볼 수 있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학기가 끝나면 그간 공수표를 던진 분들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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